이 글을 인터넷에 게재하기 위해 故문명자 기자님의 부군이시며 아직 미국에 생존해 계시는 최동현 할아버님과 통화를 하였습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려도 된다는 승낙을 받았습니다. 기력이 많이 쇠하시고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이 댁을 지키고 계시는데 약한 기운의 목소리를 접하고서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전화받는 것도 버거워 하시는 최동현 할아버님의 건강을 위해 먼곳에서 마음으로나마 기도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T T- |
-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
문명자 기자님께서 쓰신 책의 독서 평을 간단히 말씀 드립니다. 단언컨대, 저의 모든 인생을 걸고서 말씀 드리지만 이보다 더 유익한 책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허구나 가상이 개입되지 않은 실체적 진실을 평생 동안 파헤치신 문명자 대(大)기자님 이기에 그렇습니다. 기자도 기자 나름 일테지만 요즈음 현대사회에서 기자라는 직업으로 삶을 영위하시는 분들이 얼마만큼의 진실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기자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는지 되새겨 봐야 할 부분입니다. 결코 되살리지 말아야 할 망령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깨어나지 말아야 할 이 망령은 실체가 없으며 조작된 허구이기에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터무니없이 조작되고 날조인 망령을 막기 위해서 나 역시도 누군가는 무덤에서 깨우쳐 내야 할 善의 혼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망령을 막기 위해서 도대체 누구를 무덤에서 호출해 내야 할까.. 누구를... 김대중? 아니면 노무현? 그도저도 아니면 김구선생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 정말 고민에 고민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딱 한사람! 바로 문명자(julie Moon)님을 무덤에서 호출하여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몇 번이고 읽었지만 다시 정독 하였습니다. 대다수 많은 분들이 이 불합리하고 어긋나 있는 근현대사 때문에 심오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감히 말씀 드립니다. 문명자 기자님께서 전 인생에 걸쳐 딱 한권의 책을 내셨는데, 여러분들께서 이 책을 읽으면 진정으로 고통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이 책은 그 어떠한 책과도 레벨을 달리합니다. 꼭 정독해 주십사 하고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진실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자유로워지길 바라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근현대사에 관련된 모든 책들을 던져 버리더라도 이 한 권 만은 손에 쥐고 있겠습니다. 반드시 정독하셔서 느낌으로부터 역사적인 영감을 이끌어 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꼬~옥 정독해 주십시오. 망령을 막는 것은 선의 혼령을 일깨워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다큐영화 번영 도 꼭보세요. Episode 1. Thrive #1.바로보기(다큐영화) Episode 2. Thrive #2.바로보기(다큐영화) 혼자서만 알고 계시지 마시고 주위에도 알 수 있도록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 서문 -
- 파시스트의 망령을 끌고 21세기로 갈 것인가 -
박정희 기념관을 건립한다고 한다. '박정희와의 화해'를 역설한 김대중 대통령이 그 사업의 명예회장을 맡았다고 한다. 이국땅에서 유신독재 철폐를 위해 평생 동안 싸웠던 사람들이 그런 소식을 들을 때 어떤 심정이 되는지는 아무도 상상치 못할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과거를 미화해 거기서 안식처를 찾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현상이다. 현재와 같은 IMF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총결집해서 "박" 정권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과 같은 '제2의 경제도약'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에 온 나라가 휩쓸릴 만도 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착오가 있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IMF를 맞은 근본 원인이 정치권력과 결탁한 재벌중심의 경제구조에 있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바로 그 재벌 경제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 박정희 정권이라는 점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하에서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들은 잠 쫓는 알약을 먹어가며 미싱을 돌려야 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죽어간 전태일의 외침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리며 죽어간 YH 여성노동자 김경숙에게까지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전두환-노태우의 부정부패와 그들을 모방한 김현철의 작태에 진저리치면서 "박정희 시대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에는 그런 사건들이 거론조차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잊고 잊는 것이다.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각 당 후보들이 앞 다투어 박정희 신화를 제창하고 다닐 때 박정희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는 모 일간지에 박정희 회고담을 연재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정도도 아니고 바로 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비서실장의 증언을 사실 확인도 없이 객관적 진실인 양 보도하는 언론사의 양식도 문제이려니와, '청렴결백했던 박 대통령 이야기에 열화 같은 성원을 보냈다는 많은 독자들의 때 이른 건망증에도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렴씨의 말대로 대통령 박정희가 한여름에도 집무실에서 선풍기를 틀지 않았고, 파리채로 손수 파리를 잡았으며 구멍난 러닝셔츠를 마다 않고 입었던 사람이라 치자. 과연 그것이 그의 진면목었는가. 그렇다면 그의 18년 통치는 간디사상과 같은 고귀한 정신철학에 입각한 철인정치 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 침실 변기에 벽돌을 집어넣어 한 방울의 물까지도 아끼려 했다는 박정희가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를 만들어 거액의 외화를 예치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박정희 자신이 온갖 특혜를 퍼부어 육성한 재벌들에게서 뜯어 낸 돈은 대체 어디로 흘러갔는가. 아울러 수도꼭지까지 금으로 된 안가에 뭇 여성들을 불러들여 방종한 생활을 일삼은 그의 행적과 '청와대 변기의 물 한 방울 아끼기'는 어떻게 비교,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의 18년 독제체제가 남긴 가장 큰 문제는 4.19 이후 한국민들이 씨 뿌리고 키워 가던 민주주의의 싹을 근원부터 잘라 버린 일이다. 그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후 이 나라에서는 오직 그의 말과 뜻만이 법이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학생들의 반유신 운동을 지원했다 해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받다 숨진 최종길 교수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그가 취조중 변소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주장했으나 시신을 끝내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만큼 최 교수에게 가해진 고문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거나 그의 죽음에 밝히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박' 정권은 또 64년 국가 전복을 음모했다 하여 41명의 지식인들을 구속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이란 이름 하에 무리하게 기소하려다가 일선 담당 검사들의 사표파동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박' 정권은 이 사건 관련자들을 74년 다시 국가 전복 혐의로 잡아 넣었고, 불과 반년 후인 이듬해 4월 이들 중 8명을 전격 처형했다. 격화되고 있는 민중의 저항을 공포정치로 차단하려 한 것이었다.
75년 8월17일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가 나에게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어도 박정희만은 안된다"고 역설하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광복군 간부로 일제에 저항하던 장준하로서는 관동군 중위로 독립투사들을 잡으러 다니던 박정희가 해방 조국의 대통령으로 행세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민중의 저항을 누르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급기야 박정희는 호남이라는 희생양을 동원했다. 국민 전체가 호남과 반호남으로 나뉘어 대립 갈등하게 만든 그의 분할 통치전략이 장기집권에는 주효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지역주의라는 민주주의 최대의 장벽을 이 땅에 뿌리박게 만들고 말았다.
이 같은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 비판이 미국 조야에 빗발치자 박정희는 70년대 초부터 워싱턴 정가에 거액의 달러를 뿌리기 시작했다. 김동조 주미대사는 현직 대사의 신분임에도 의회를 돌면서 거액의 돈봉투로 미국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려다 말썽을 일으켰다. 박정희가 기용한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 역시 로비를 한다며 의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뿌렸다가 자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한국으로 도망갔다. 김한조 사건 역시 미국 국회의원 매수작정의 일환이었다. 전 대한적십자사의 총재 강영훈 씨도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워싱턴에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 미국 학계와 언론계에 친박정희 여론을 조성하려고 활동하다가 FBI로부터 강제 소환장을 받자 가족을 놔두고 혼자 손가방 하나만 들고 한국으로 도망갔다.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국익보다는 박정희 개인 찬양과 정권 연장에 힘썼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국 정부로부터 60만 달러를 받아 자신이 챙기고는, 푼돈으로 미국 국회의원을 매수해 국회 의사록 한 귀퉁이에 박정희를 찬양하는 발언을 올리게 하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 기록을 가져다가 박정희에게 보이고 대단한 공을 세운 양 과시한 자도 있었다.
내 인생을 바꾼 두 인물 박정희와 김대중
사실 박정희는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바꾼 인물이다. 나는 6.25 전쟁 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61년부터 73년 미국에 정치망명 할 때까지 10여 년 간 워싱턴에서 특파원 생활을 했지만 미국에 정착하려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이란 잠시 출장 나와 있는 곳에 불과할 뿐이었다. 비록 철권정치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곳이지만, 그럴수록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한국이라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완전히 통제도고 있었다. 나는 당시 MBC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뉴스 시간에 유엔총회 보도 말미에 슬쩍 붙여 이 사건을 언급했다. 본사로부터 바로 귀국명령이 떨어졌다. 출국 전날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김포에 내리자마자 중앙정보부로 연행될 것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얘기였다. 한 동료가 나를 염려한 나머지 위험을 무릅쓰고 전화한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전화는 나로 하여금 서울행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유신체제 하에서 단 한 사람의 기자라도 살아남아 박정희의 정체를 사실 그대로 보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나는 미국에 정치망명했고, 미국 시민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한국에 있던
나의 형제자매들이 중앙정보부의 갖은 협박과 탄압에 시달려야 했던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나는 나로 인해 고통받다 세상을 떠난 그들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나 개인으로서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철천지 원수로 치부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나의 심리는 그처럼 단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아내 육영수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나에게 박정희는 자료속의 취재 대상이 아니라 만나서 악수하고 대화하고 밥 먹고 입씨름 했던 살아 숨 쉬는 동시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61년부터 72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그와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로 날아가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무려 14년간 동안 3선개헌에 대해 입씨름한 일도 있고, 육 여사의 초청으로 참석한 대통령 가족 식사 자리에도 '손잡고 일하자'고 권유하는 박정희 부부의 호의를 뿌리치기도 했다.
특히, 육영수 여사와의 만남은 '친교'라고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처음 육 여사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육 여사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애정과 연민으로 발전했다. 그녀가 털어놓는 내면의 갈등과 고통의 소리를 통해 나는 인간 박정희와 그 시대의 본질에 더욱 세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박정희와 함께 나의 인생 행로를 바꿔놓은 또 한 사람의 인물이 김대중이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와 맞서 싸우는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김대중은 한 개인이 아니었다.
70년대 내내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 재미 민주화 운동 세력들의 피켓에는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씌어 있었다.
이 짧은 문장이야말로 유신체제의 폭압성과 그것이 무너져야 할 당위성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에게 덮어씌워진 무고한 혐의들을 벗기고 그를 살려 내는 것은 필자의 70년대 최대 과제였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 부부와 나는 민주화 동지로서 깊은 우의를 맺었다.
마침내 김대중 씨는 지역연합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의 숙원이던 자리에 올랐다. 나는 지난 97년 대선 과정에서 김종필과 나란히 선 김대중 씨의 모습이 텔레비젼 화면에 비칠 때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결단코 DJP연합에 찬성할 수 없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복형제들을 죽이는 반인륜적 방식을 통해 왕위에 오르긴 했어도 집권 기간 동안 세종시대라는 태평성대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 태종처럼, 김대중 씨가 이왕이면 재임중에 민족사에서 의미 있는 업적을 쌓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 책에서 김대중 씨에 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것은 그가 아직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미완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를 중심으로 박정희와 유신시대를 평가해 보는 작업은 일단 뒷날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새삼 30~40년 전의 취재수첩을 들춰가며 죽은 박정희와 씨름하게 된 것은 한국 땅에서 들려오는 '박정희
신드롬' 이라는 푸닥거리 때문이었다. 21세기를 앞두고 그리워할 것이 그리도 없어 파시스트의 망령을 불러 댄단 말인가.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 없이 화해란 빈말일 뿐이다.
박정희 권부의 언론통제로 빛을 보지 못했던 필자의 워싱턴 발 기사들을 이제 공개한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낀 조그많고 까무잡잡한 사내가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나타나던 시절에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6.25가 터졌을 때 나는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생이었다. 막 들어간 대학을 석 달도 다니지 못한 채 학업은 중단되었다. 그 후 전쟁 중인 1951년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피난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으셨던 어머니가 나의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일본에서 메이지대학 경제학부를 마친 후 와세다대학 국제법 대학원에 다니면서 당시 한국 최대의 여성지였던 [여원]사의 도쿄지국장으로 1956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1961년은 나에게는 여러모로 큰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우선 61년 1월 미국의 일간지 [존 크로니클]의 초청으로 두 달 간 미국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존 크로니클]은 오랜 전통의 지방신문으로서 이승만에 대해 많이 보도했다. 그 때의 인연으로 나를 초청했던 것이다.
특히, 1월 20일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나는 60년 11월 취임식 준비위원장인 험프리 상원의원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나는 한국의 [여원]이라는 여성지의 도쿄지국장이다. [여원]은 미국의 [레이디스 홈 저널]과 같은 성격의 품위있는 여성 잡지다. 케네디 대통령의 역사적인 취임식 광경을 우리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고 싶다. 부디 나의 취재 신청을 허가해 주기 바란다."
편지를 보낸지 한 달 후 거짓말처럼 한 묶음의 초청장이 왔다. 취임식 및 그 부대 행사들에 대한 취재 초청장이었다. 일본 기자들도 "전에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 했다. 내가 이 초청장을 받기까지 사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펄 벅 여사가 애를 많이 써 주었다. 펄 벅 여사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뒤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1961년 1월 16일 내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연일 내리는 눈으로 워싱턴은 은세계로 변해 있었다. 이미 대통령 취임식 축하 전야제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워싱턴 시는 물론이고 주변의 버지니아, 메릴랜드주의 호텔들까지도 미국 내는 물론 외국에서 온 수백만의 축하객들로 초만원이었다. 취임식장은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었다. 취임식 후 백악관까지 축하 퍼레이드가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백악관 정문 앞에 마련된 퍼레이드 접견대와 나무 의자들도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1월 20일, 무릎까지 눈이 쌓이던 날 나는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거행된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그 유명한 연설을 경청할 수 있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묻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
좌석이 앞자리라서 젊은 케네디 대통령은 물론 그의 부인 재클린, 큰딸 캐롤라인의 모습도 자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후 나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땅에 정착해 케네디, 존슨,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에 이르는 장장 8명의 미국 대통령들의 취임식을 지켜봤다. 케네디의 취임식은 그 가운데 그다지 요란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클린 케네디는 취임식 두 달 전에 제왕절개 수술로 아들을 출산한 몸이었다. 그날따라 눈은 멈출 줄 모르고 사람들의 입에는 하얀 입김이 끊이지 않았다. 비서들이 담요를 가져와 재클린의 무릎에 덮어 주고 계속 뜨거운 커피를 갖다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취임식을 마친 케네디 대통령 부부는 오픈카로 백악관을 향해 퍼레이드를 펼쳤다. 연변의 시민들이 환호했다. 케네디 부부가 손을 흔들 때마다 군중들을 "와와"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앞다투어 악수를 청했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는 시종 미소를 지으며 '생큐'를 연발했다.
백악관 정문 앞에서는 전국 각 주의 특색있는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이후 취임 축하행사가 펼쳐졌다. 공식행사가 모두 끝났을 때 눈은 10인치 이상이나 쌓여 있었다. 교통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참석자들은 자동차를 길가에 주차에 놓은 채 모두들 걸어서 각자의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그 때, 나는 워싱턴 16번가에 있는 YMCA 호텔에 묵었는데, 거기에서 기억이 인상깊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 페서디나 민주당 선거사무소에서 케네디 선거운동을 했는데 당시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케네디 선거운동 하는 동안 공화당측으로부터 얼마나 압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화당 대통령 전성시대 아니었습니까. 선거운동 하려고 책상을 가져다 놓으면 지방 주경찰이 와서 '여기에 놓지 마라' , '저리로 옮기라'는 둥 또 '이것도 선거법 위반, 저것도 선거법 위반'하는 바람에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기막힌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필자가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것을 알자 그녀는 말했다.
"우리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피땀 흘려 개척한 땅을 백인들에게 모조리 빼앗긴 것입니다. 그 문제로 소송중인데 케네디가 당선돼야만 그 소송이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케네디 당선을 위해 뛰었던 것입니다. 당신도 우리 인디언의 역사를 취재하러 한 번 캘리포니아에 와 주길 바랍니다."
그 할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필자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한 맺힌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살펴보니 미국 정부의 내무성에 아메리칸 인디언 국이 있기는 한데 간부자리는 모두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고, 예산도 인디언들을 위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었다.
케네디 취임식 때 발생한 또 하나의 사건은 훗날 나의 남편이 된 최동현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과의 만남이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우선 한국대사관으로 갔다. 당시 주미대사는 장리욱 씨였다. 나는 그가 서울법대 학장을 재직하던 시절 인사를 드린 일이 있었다. 장 대사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미스 문 참 대단하네. 케네디 취임식 초청장 가지고 워싱턴에 나타난 사람은 미스 문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옆에 있던 최동현 특파원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봐요, 최 기자. 여기 미스 문은 한국의 애니 파일(미국 [UPI 통신]의
유명한 종군 여기자)이야. 미스 문, 우리 최 기자는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워싱턴 특파원입니다. 서로 인사하지."
최 특파원은 나의 안내역을 자청했다. 다음 날 그는 고물 폭스바겐을 몰고 YMCA 호텔에 나타났다. 그 차를 타고 국회의사당까지 간것은 좋았는데 취임식 후 시내 미술관에서 열린 축하무도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문제의 폭스바겐이 고장나 버렸다. 덕분에 나는 무도회 때 입었던 롱드레스 차림으로 신발을 벗어 들고 씨근덕거리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숙소까지 걸어와야 했다. 하긴 차가 고장나지 않은 사람들도 폭설로 차를 세워 두고 걸어가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에서 도쿄로 돌아온 후 최 특파원으로부터 계속 편지가 날아왔다. 구혼의 편지였다. 인연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61년 4월 나는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등록도 했다. 백악관 출입기자증을 내주기 전에 미국 정보기관이 14세 이후 나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음을 알게 되었다. 주함 미대사관의 조사관이 통역자를 데리고 나의 본적지인 경북 김천에까지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워싱턴으로 간 후 최 특파원과 나는 급속히 가까워져 우리 집안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5월 6일 주미 한국대사관저에서 장리욱 대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집안에서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한 것은 그가 혈혈단신의 이북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우리가 결혼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발발한 5.16 군사 쿠데타 때문이다.
5.16 당시 워싱턴에 주재하던 한국 특파원은 [합동통신]의 이용후, [한국일보]의 설국환, [동양통신]의
최동현, 그리고 [조선일보]의 필자 이 네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워싱턴에서 제일 먼저 안
한국 사람은 아마 남편 최동현이 아닐까 싶다.
남편은 "민족교육은 서울에서 받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제시대에 서울에 와서 중앙고보에서 공부하던 중 해방을 맞았는데 3.8선과 곧이어 터진 6.25로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사람이다.
이남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그는 미국에 오기 전 기자 생활을 해서 모은 얼마간의 돈을 어머니처럼 믿고 따르던 같은 평안도 출신의 하숙집 주인 차씨 아주머니에게 맡겨 두었다. 그런데 결혼도 하고 해서 돈이 필요해지자 남편은 한국시간으로 61년 5월 16일 꼭두새벽에 전화통을 붙들고 그 아주머니에게 맡긴 돈을 보내 달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아까 총소리가 났는데 방송에서는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남편은 돈 보내라는 용건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황급히 전화를 끊더니 도널드 맥도널드 미 국무성 한국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데 아십니까? 모르겠다고요? 알겠습니다."
남편은 이번에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대사관에서도 깜깜부지였다. 결국 서울에 연락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와 남편은 주동자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 전화통에 매달렸다. 얼마 후 한 외신에서 "5.16의 주동자는 전직 공산주의자인 박정희, 김종필" 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남편은 깜짝 놀랐다. 그는 다른 이북 출신들처럼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했다. 그런 그가 박정희, 김종필 등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크게 우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무렵 남편은 5.16 주체들의 사상 문제 때문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5.16이 일어난 지 한 달쯤 돼서 나와 같은 대구 출신이자 일본 유학생 동료이기도 한 동양 통신사 외신부장 김규환이 워싱턴에 왔다. 현 한나라당 고문 김윤환의 친형이기도 한 김규환은 서울대 사범대를 다니다가 6.25동란으로 중퇴했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밀항해 한국의 조선대 졸업장을 가지고 청강생으로 동경대에 다녔다. 50년대 일본에 있던 한국 남자 유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그 같은 '밀항패'였다.
그 뒤, 김규환은 동향 출신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김성곤의 후원으로, 자유당 시절 김성곤이 삼킨 동양통신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동경대에 다녀 한국 최초로 신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성곡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 4대 민의원 당선하여 정치 참여 이후 6,7,8대 국회의원 역임)
그는 4.19 이후 귀국해 동양통신 외신부장으로 일했다. 61년 6월 IPI(국제언론인협회) 총회가 유럽에서 열렸는데, 김규환은 사장 김성곤을 수행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가 김성곤은 먼저 귀국하고 김규환은 미국에 들렀던 것이다.
당시 남편은 동양통신사로부터 받을 밀린 월급도 받아낼 겸 해서 김규환을 집으로 초대했다.
"미스터 김, 그런데 이번에는 용하게 미국 비자 받았네요?"
- "하여간 미국놈들 굉장합디다. 공항에 떨어지자마자 FBI가 졸졸
미행하는데 혼이 났습니다."
자기 회사 외신부장이긴 하지만 김규환을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남편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눈이 둥그레졌다.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김규환의 애인이자 나의 친구인 ㅈ의 소식을 물었다.
"ㅈ은 지금 보스턴에 있어요?"
- "예."
"이번에 만납니까?"
- "못 만날 것 같습니다."
"이것 봐요. 미스터 김. 김성곤 씨가 지금 우리 남편 밀린 월급을 안 주고 있어요. 돌아가면 김성곤 씨에게 말해서 월급 좀 보내 주세요."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그가 돌아가고 난 후 남편이 물었다.
"여보, 아까 그게 무슨 소리요? FBI가 왜 그 사람을 미행한다는 말이요?"
- "규환이가 옛날에 남로당 했거든요. 경북중학 시절 좌익 학생운동 리더였고 대구 10.1 사건 때도 가담했지요. 6.25 때는 인민군 군복까지 입고 행세했는걸요."
"뭐요?"
-"규환이가 그것 때문에 경찰에 쫓겨 다닐 때 내 친구 ㅈ이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러다 그 애가 먼저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미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대요. 규환이가 일본으로 밀항해 온 후 미국 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비자가 안 나와서 결국 못 갔어요. 그러다 4.19 나고 나서 김성곤씨 덕으로 한국에 돌아가 동양통신 일을 하게 된 거죠. 자유당 때 주일 한국대표부의 유태하 참사관에게 이화고녀 나와 미국 유학 간 외동딸이 있었는데 유 참사관 부인이 규환이를 사윗감으로 탐냈거든요. 동경대에서 박사를 딴 수재라고요. 그래서 미국 보내서 사위 삼으려고 미국 대사관에 알아보는데 '이 사람은 과거 좌익 전력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절대 비자 안 나온다' 고 하더래요. 그래서 규환이가 미국 오는 건 결국 포기 했다던데 이번에는 용케 비자를 받았네요."
"그런데 김성곤 씨가 어째서 그 사람을 봐줬지요?"
-"김성곤씨도 빨갱이 하기는 마찬가지니까요. 그사람은 일제 때는 남대구경찰서 순사로 칼을 차고 다니더니 해방 후에는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들어가 대구 10.1 사건 때 경북도 인민위원회 재정부장을 지냈고, 부인 김미희는 여성동맹 위원장을 했어요. 김성곤은 경북 지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인 박정희의 형 박상희, 황태성과도 친한 사이였어요. 6.25 때 그 사람이 인민군 장교 계급장을 달고 서울 거리를 활보 하는 걸 본 사람도 있어요."
김성곤은 그런 좌익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6.25 때 이기붕이 대구로 피난 오자 그와 사귀어 자유당이 몰락할 때까지 재정부장을 지낸 수완 있는 인물이었다. 이기붕을 등에 업은 위세에다 한국 운크라(UNKRA - 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단) 단장 콜트 장군과의 친분을 이용해 금성 방직을 설립해서 기업가로 승승장구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이승만이 '내 아들' 이라면서 뒤를 봐주던 연합신문사 양우정 사장과도 대구 피난 시절 친교를 맺어 연합신문 이사직을 맡았다. 그런데 연합신문 도쿄 특파원이던 정국은이 간첩으로 몰린 이른바 '정국은 사건'으로 양우정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틈을 타서 회사를 빼앗아 연합신문 사주로 취임했다. 그리고 이후 동양통신까지 인수했다.
자유당 재정부장에다 신문사, 통신사까지 소유하게 된 김성곤은 자식들을 모두 도쿄에 유학 시키면서 도쿄에 부지런히 왔다갔다 했다. 내가 김성곤을 처음 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는 그 때 [여원]사의 도쿄지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김성곤도 4.19 이후 마침내 부정축재자로 걸려들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는 법망을 무사히 빠져 나온다.
60년 12월 내가 미국 [존 크로니클] 신문사 초청으로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무렵에 나는 도쿄에 온 김성곤과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동양통신과 미국 UP통신사의 계약 갱신을 위해 자기도 곧 미국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문 기자, 내 처가 막내를 임신해 지금 만삭이라 곧 출산하러 미국으로 떠날 텐데 말이오. 미국에서 출산을 하면 아이는 물론이고 부모에게도 시민권을 준다는게 그게 사실인지 좀 알아봐 주시오."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여간 좀 부탁하오. 뉴욕에서 만납시다."
나는 내심 '이 사람은 그런 전력을 가지고도 정권이 부침할 때마다 교묘하게 살아남더니 이젠 미국 시민권까지 필요한 모양이구나'
싶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남편은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에서는 도대체 어느 놈이 암까마귀고 어느 놈이 수까마귄지 알 수가 없구먼."
결국 남편은 특파원 임기 만료에 따라 귀국하려고 이삿짐까지 다 싸 놓았다가 회사로부터 밀린 월급 받는 것도 포기하고 미국에 정치망명 했다. 5.16 주동자들이 합헌 정권을 총칼로 뒤엎은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데다, 그들의 사상전력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로써 한국인 정치망명 1호를 기록했는데, 이 때 그의 신원보증인이 돼 준 이가 바로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였다. 펄 벅 여사는 우리 부부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신 분이다.
내가 펄 벅 여사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1960년이었다. 당시 펄 벅 여사의 단편소설 [빅 웨이브]를
미.일 합작으로 영화화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작은 도에이 영화사에서 맡고 있었다. 감독은 다니엘스키라는 헝가리 출신
감독이었다.
촬영은 주로 규슈의 경치 좋은 해변가에서 진행되었다. 펄 벅 여사는 통역 겸 수행 비서를 필요로 했는데, 그에게 나를 추천한 이는 사와다 미키 여사였다. 그는 한.일 회담에서 일본측 수석대표를 맡았던 사와다 렌조 전 유엔대사의 부인이다.
미키 여사는 미쓰비시 기업의 창설자이자 초대 사장 이와사키의 장녀였다. 그녀는 당시 흔치 않던 미국 유학생 출신이자 크리스천이기도 했다. 그녀의 딸인 사와다 에미는 나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미키 여사는 종전 이후 유산으로 물려받은 오이소(일본의 유명한 별장지) 별장에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차렸다. 그 같은 일을 하게 된 배경을 물었더니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패전 후 맥아더 점령군이 미쓰비시를 차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이소 별장도 차압당했다. 그것은 사유재산이니 돌려 달라는 운동을 하느라 내가 살고 있던 요코하마에서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까지 기차로 자주 왔다 갔다 했다. 한 번은 요코하마 역에서 내리려는데 내 머리 위 선반의 짐 보따리 뒤에서 웬 아이 소리가 났다. 살펴보니 짐 사이에서 흑인 혼혈아가 하나 튀어 나왔다. 차장이 와서 '당신 애냐' 고 묻는데 고운 눈길이 아니었다. 옆자리에 있던 술취한 남자는 아예 '흑인 놈이나 붙어먹고 잘한다'는 식으로 쏘아 붙였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나 가련했다. 나는 '저건 내 짐도 아니고 내 아이도 아니지만 저 애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 후, 그런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찾은 오이소 별장을 고아원으로 만들었다."
미키 여사의 소개로 펄 벅 여사를 처음 만나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장소는 도쿄의 제국호텔이었다. 펄 벅 여사는 나에게 "지금은 바쁘니 내일 아침 8시에 만나서 아침 같이 먹으며 얘기하자"고 했다. 그녀는 나를 시험해 볼 요량인 것 같았다.
나는 오전 7시 55분에 펄 벅 여사 호텔 방문 앞에 가서 섰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2분 전에 벨을 눌렀다. "예에스" 하는 높은 톤의 소녀 같은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와요, 미스 문은 매우 정확하군요."
펄 벅 여사는 식사에다 커피까지 모두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을 같이 먹으면서 그녀는 내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 하는 듯 했다. 자신의 스케쥴도 설명하고 영화에 출연할 일본 여성들의 영어 발음이 시원치 않다는 등 여러가지 얘기를 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녀가 "규슈(九洲)의 영화 제작 현장에 함께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합격인 모양이다' 싶었다.
내가 펄 벅 여사의 통역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은사인 숙명중고녀 문남식 교장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그 분은 나를 포함한 몇몇 학생들을 모아 하와이 교포 출신인 한동삼 선생에게 영어회화 개인교습을 받도록 했다. 숙명고녀에 진학한 후 한동삼 선생은 필자에게 "소질이 있다"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여러모로 이끌어 주었다. 내가 일본에 유학와서 미국인들과 별다른 불편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 덕분이었다.
내가 펄 벅 여사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모시고 한국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식민지로, 전쟁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이승만 독재와 부정부패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 후, 나는 펄 벅 여사를 모시고 규슈에 다녀왔다. 그런데 영화제작 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인 주연 여배우가 "감독인 다니엘스키가 나를 강간하려 했다"면서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당사자인 다니엘스키는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배우가 기자들을 만나 그렇게 떠들어 대니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 여배우는 당시 그다지 유명한 배우는 아니었는데, 그 같은 스캔들로 화제의 초점이 되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빅 웨이브'였다. 극성스러운 기자들 때문에 펄 벅 여사는 호텔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병중에 있던 남편 워시가 위독하다는 전갈까지 미국에서 날아왔다. 여사가 급히 미국에 다녀와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하네다 공항까지 펄 벅 여사를 배웅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해 놓을테니 걱정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바깥분 간호 잘 하시고요."
-"그래주면 고맙겠어."
나는 펄 벅 여사의 영화 제작 일을 성심껏 도우면서 한국 방문 약속을 받아낸 바 있었다.
"저하고 하신 약속 잊지 않으셨죠? 한국 가시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많다는데?"
"오히려 일본에 공산당이 많지, 한국에는 없습니다."
펄 벅 여사가 떠난 후 나는 우선 다니엘스키의 기자회견을 주선해 기자들 앞에서 사실을 밝히게 했다. 아울러 기자들에게 주연 여배우의 의도를 설명해서 그녀가 계속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검찰총장을 지낸 한 거물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는 나의 메이지대학 동창생의 아버지였다. 대학시절 그의 집에 놀러 가면 친딸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곤 했다. 그는 평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매번 그 때문에 고생했다. 서울 집에서 간혹 인삼을 보내오면 나는 생강, 대추를 넣고 달여서 그에게 갖다 주곤 했다.
"조선 인삼 안 먹어 보셨지요? 술 깨는 데는 조선 인삼이 최곱니다. 냉장고에 넣어 두시고 꿀 타서 마셔 보세요."
그는 내 말대로 했더니 정말 술 먹은 다음날 머리도 안 아프고 좋더라면서 "분짱(문양)이 내 딸이다"며 고마워했다.
전직 검찰총장이 나서니까 일이 상당히 수월하게 풀렸다. 그는 일본 영화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오카와 히로시(도에이 영화사 사장)를 만나 "자기가 유명하게 되려고 이런 근거 없는 일을 벌이는 것은 미.일 관계에 좋지 않다. 그 여배우 좀 잘 타일러 달라"고 부탁했다.
오카와의 "알겠습니다" 하는 한마디로 상황은 끝나 버렸다.
2주일 후 펄 벅 여사가 돌아왔을 때 모든 문제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영화 제작도 순탄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펄 벅 여사는 무척 고마워하며 나를 자신의 양딸로 삼겠다고 했다. 쥬리(Julie)라는 미국 이름도 그 때 그녀가 지어 준 것이었다.
"미국 이름이 꼭 필요한가요?"
-"미국에 와서 활동하게 되면 미국 이름이 필요해. 내가 지어주는 대로 하렴."
그녀의 예상대로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백악관 동료 기자들은 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 작가가 지은 이름이니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문제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었다. 동료 기자들이나 미국 정계 인사들까지도 '문'이라는 내 성을 들었다 하면 "무니(Mooni-통일교도)하고 관계있는가?" 라고 묻는 바람에 일일이 해명하기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4.19 이후인 1960년 10월 나는 마침내 펄 벅 여사를 모시고 한국을 방문했다. 펄 벅 여사는 이화여대와 경기여고, 숙명여고에 들러
한국의 미래 여성 지도자들을 위해 감동적인 강연을 했다.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 [살아있는 갈대] (The Living Reed)를
출간했다.
필자가 61년 미국에 온 후에도 펄 벅과의 교류는 계속 되었다. 그녀는 펜실베이니아 벅스 카운티에 있는 350에이커 정도 되는 농장에서 살고 있었다. 서재가 널찍하고 마당에서 농구까지 할 수 있는 넉넉한 저택이었다. 그녀는 가정적으로는 불행한 편이었다. 첫 남편과는 이혼했고, 두 번째 남편은 사별했다. 첫 남편과의 사이에 장애인 아들이 있었는데 결국 죽고 말았다. 의사는 "부부간에 혈액형이 맞지 않아 장애아가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다. 내가 결혼을 앞두고 최동현 특파원과 함께 펄 벅 여사를 찾아 갔을 때도 그녀는 조용히 "피 검사, 해봤니?" 하면서 걱정하기도 했다.
그녀의 집은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5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필자의 아이들도 펄 벅 여사를 좋아해서 "그랜드 마더 가자"고 졸라대곤 했다. 한번은 펄 벅 여사가 나의 아이들을 위해 미국식 비프를 준비해 놓았는데 아이들이 "그랜드 마더, 밥 줘요" 하고 때를 썼다. 펄 벅은 물었다.
"밥? 그게 뭐야?"
나는 웃으며 가지고 간 쌀을 보여 주고 밥을 앉혔다. 그러나 펄 벅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앉혀 놓은 밥이 다 타 버려 결국 밥은 먹지 못했다.
백악관 앞 5.16 반대 시위자들 - 장리욱 신병현 최경록 강문봉 오세응
미국에 망명한 후 남편은 미국 영주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스크립터로 일하면서 한편으론 워싱턴에 있는 한국 학생, 지식인, 예비역 장성 등 5.16에 반대하는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백악관 앞에서 반대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에 5.16을 인정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기 위해서였다.
이 때 열성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5.16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리욱 박사,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 신병현, 국회 사무처장을 지낸 김문봉 박사, 최경록, 강문봉, 김응수 장군과 국회의원 양일동씨 등이 있다. 강영훈 씨는 5.16 직후에는 시골에 있어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워싱턴으로 온 뒤부터는 이 모임에 항상 참여했다.
강영훈씨는 5.16 당시 육군사관학교장 이었는데 쿠데타 세력이 요구한 육사생도들의 5.16 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하는 등 5.16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와 처남 매부지간인 김응수 장군( 전 제 6군단장), 장면 정권 하에서 육군 참모 총장을 역임한 최경록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최 장군은 5.16 당시 대구 소재 2군사령부 사령관이었는데 자기 밑에서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하극상 사태를 당한 셈이었다. 최경록은 [조선일보]등에 "군은 절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등 끝내 5.16을 반대했다. 이들 세 사람은 5.16이 기정사실화된 후 미국 측의 배려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국에 왔다. 이들은 사실상 미국이 키운 사람들이었다.
강문봉 장군은 자유당 시절 육군 정보국장과 작전 국장을 역임하고 5.16 무렵에는 중장으로 예편해 있었는데, 역시 같은 이유로 미국에 유학 와 있었다.
신병현씨는 민주당 정권 때 워싱턴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으로 나와 있었는데, 5.16 발발 이후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특히, 신병현 참사관의 부인까지 백악관 앞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에 재학 중이던 한국 유학생들도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당시 열심이던 학생으로는 오세응(현 한나라당 의원)과 한광년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오세응은 워싱턴 지역 한국 학생회장이자 워싱턴 지역 '한국인 택시운전사 1호' 였다. 한광년은 불행히도 청년 시절의 신념으로 초지일관 하지 못하고 70년대 들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5.16 직후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이 임명한 주미대사관 공관원들을 모두 해임해 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자신의 수족들로
채웠다. 그가 특히 신경을 썼던 주미대사직에는 당시 하버드 대학 청강생으로 있던 정일권을 미국통이라고 해서 앉혔다.
사실, 정일권과 강문봉은 군부의 권력 암투 속에 56년 1월 발생한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 대령이 모든 책임을 지고 정일권과 강문봉은 살아났는데, 그것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정일권이 밴플리트에게 한국 처녀들을 계속 상납하는 등 채홍사 노릇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 셈이었다. 박정희는 이 같은 정일권의 대미 인맥을 자신의 방패로 활용하려 했다.
정일권이 주미대사로 앉게 되자 백악관 앞 5.16 반대시위 참여자 중 여러 사람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우선 남편 최동현 부터가 정일권의 하버드 시절 그의 영어 가정교사를 했던 사람이었다. 영어 선생과 학생이 데모 대장과 진압대장으로 만난 셈이었다. 또 강문봉 장군은 정일권과 같은 함경도 출신으로 현역 시절부터 형님동생 해 온 사이였다. 그런 그가 백악관 앞에서 박정희 반대 시위를 하러 다니니 정일권이 닦달할 만도 했다. 그 때마다 강문봉은 "골프 치러 가려고 운동화 신고 나서는데 마침 최경록이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 갔어요" 하는 식의 변명으로 곤란한 자리를 모면하곤 했다.
나는 열심히 이 시위를 취재해 [조선일보]에 송고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일보]의 논조가 살아 있어서 백악관 시위 기사들이 간간히 실리곤 했다.
심지어 나는 펄 벅 여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케네디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게까지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박정희 군사 쿠데타 세력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두 통을 작성해 하나는 백악관에 전달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일보사로 보냈다. "힘으로 독재하는 정권은 오래 못 간다. 국민이 깨야 한다"는 등의 원문이 그대로 [조선일보]에 실렸다. 조선일보사가 펄 벅 여사의 친필 편지를 잘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펄 벅 여사가 편지를 보냈을 때 케네디는 캐나다에 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인들이 우리 두 사람을 얼마나 바보같이 봤을까
싶다.
케네디는 죽기 전 마지막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그 한마디에 흥분한 나는 "박정희 쿠데타는 오래가지 못한다"라고 단정하는 기사를 송고했다. 케네디가 결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젊은 케네디의 이상, 정의감, 프론티어 정신. 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을 30대 초반의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5.16 당시 미국인들의 행적에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주한 미대사관의 대리대사로서 매구르더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5.16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마샬 그린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케네디 행정부의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일이 있다.
"왜 미국은 5.16을 진압하지 못했나요?"
-"코리안 전체가 한물갔어요. 모두 기회주의자요. 내가 쿠데타 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고 하니까 윤보선 대통령의 답변은 '우리 군끼리 충돌하면 언제 북괴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군사 쿠데타와 같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 총리라는 사람이 수녀원에 숨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5.16은 장면 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난 95년 위컴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의
측근으로부터 5.16 당일 반도 호텔에 있던 장면을 지프에 태워 혜화동 깔멜 수녀원으로 이동시킨 사람이 다름 아닌 위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직책은 부사령관이지만 계통은 정보라인 이었다. 박정희 쿠데타를 뒤에서 봐줄 수 있는 위치였다. 위컴은 당시 반도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었는데, 5.16 직후 장면이 반도호텔 뒷문으로 나가서 준비된 지프에 타고 깔멜수녀원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면으로 하여금 미 8군이 아닌 깔멜수녀원으로 가도록 한 것이 누구의 의사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나는 어쨌든 위컴이 장면을 미 8군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미국 측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사실은 미국 측이 장면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징표로 해석 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측근에 따르면, 위컴은 5.16 직후 그 살벌한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서울 시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연평도에서 주재하며 목회하던 한 유명한 미국인 신부를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에게 보내 5.16 군사 쿠데타 세력들을 인정해 주라고 호소하게 한 것도 바로 위컴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미국인 신부는 여자 문제로 정보기관에 약점이 잡혀 있던 상태였다. 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한창일 때 프레이저 청문회장 방청석에 그 신부가 나타난 일이 있다. 나와 함께 청문회를 방청하던 시노트 신부(74년 한국에서 목회중 인혁당 사형수 처형에 항의하다 박 정권에 의해 추방된 메리놀 교단의 신부)는 흥분해서 "당장 저 빤질빤질한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면서 역시 머리까지 빨개졌었다. 두 사람이 모두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런 위컴의 행적을 미 국무성 사람들이 몰랐을까? 미국이란 나라의 생리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겉으로는 주한 미 대사관과 미8군 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내 합헌 정부를 지지한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은밀히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5.16을 둘러싸고 '미국인들이 서로 짜고 쇼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지지만 믿고 자기 진영의 규합을 이루지 못한 장면 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미 행정부가 상당히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미 국무성은 부산 정치파동 이전부터 장면을 지지했다. 4.19 혁명으로 장면이 집권한 이후에도 미국은 오랜 숙원사업인 환율 현실화, 한.일 관계 정상화 과정을 조속히 이루기 위해서 장면 정권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5.16 이후 미 국부성의 한 관리가 "장면 박사가 무력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쿠데타를 꾸미던 세력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말한 것을 놓고 볼 때, 미국측은 5.16 쿠데타 직후 장면 정권에게 쿠데타 기도에 맞서 내부를 단합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렇게 안 될 경우 성공한 군부 인사들과의 협력의 길을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워싱턴에서 5.16 군정 승인 문제, 공석이던 주한 미대사 부임(새무얼 버거), 박정희 장군 방미 등 주요 외교 문제가 거침없이 수행된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5.16 이후 이 사건을 미국민들에게 어떻게 홍보하는가 하는 문제는 케네디 행정부의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미 행정부가 4.19 혁명을 지지했던 기억이 미국민들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장 정권이 약하기 때문에 교체돼야 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더구나 케네디를 지지해 준 스펠만 대주교 같은 인물은 장면 박사를 강력히 지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와 같은 사람을 납득 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 내의 사태 진전을 현지 보고 하는 방식으로 미국민들에게 5.16을 알렸다. 국무성 관리들이 그 문제를 다루게 하고, 케네디 자신은 태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63년 11월 케네디 암살 후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나의 기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 케네디의 시신은 장례식장인 국회의사당으로 가기 전까지 백악관 이스트룸에 있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은 시신이 떠나기 전날 밤 시신 앞에서 마지막으로 추도식을 가졌다. 냉정한 기자들도 하나 둘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마지막 기자 회견에 한없이 감동하고 있던 나 역시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떠난 케네디의 죽음을 한없이 애도했다.
나는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 장관을 역임했던 딘 러스크에게 "한국이 언제 통일 되겠는가?" 라고 질문한 일이 있다.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 살아서는 못 본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45년이 흘렀다. 그의 말이 사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러스크 국무장관과
얘기하던 중에 38선 문제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38선은 내가 그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4년 나는 미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의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8월 10일 일본 측이 자신들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미.영.소 3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날 밥 늦게 정책과에 긴급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일본군에게 제시할 항복 문서중 한반도와 극동지역에 대한 초안을 작성해서 30분 안에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정책과장은 본스틸 대령이었고 나와 매코맥 대령이 과장 보였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소련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을 그어 그 이남으로는 소련군의 진주를 저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북위 40도로 분할하면 너무 북으로 치우쳐 소련 측이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고 38도선 정도라면 절반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38선이 이남에 수도 경성과 미군 포로수용소, 주요 항만시설등이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유리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38선을 그어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접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초안을 30분 만에 작성해 전략 정책단에 보냈는데 소련 놈들이 그걸 수용해서 뒷날의 38선이 된 것입니다."
엄청나고도 어이없는 얘기였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분단문제를 한민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 육군 일개 대령들이 30분 만에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이와 관련된 국무성 문서가 공개되어 이를 [동아일보]에 송고했던 기억이
난다.
백악관 앞에서 같이 5.16 반대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의 그 후 행적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생각되는 바가 많다. 박정희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회유해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미국에서 세계은행 이사를 지내던 신병현 씨는 그의 후배 김정렴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 후 본격화한 회유공작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 뒤 귀국해 청와대 경제담당 특별 보좌관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최경록 장군도 "선배님, 그러실 것 없이 한국에 와서 손잡고 일합시다"라는 박정희의 간청에 점차 흔들리더니 결국 귀국해 런던대사-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최 장군이 민주당 정권에서 육군 참모총장직에 있을 때 박정희가 관련된 영관급 쿠데타 음모가 적발 되었는데 최경록은 그들을 관대하게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비록 최경록이 5.16을 반대했지만 이 같은 과거의 은혜를 생각해 박정희는 그를 심하게 박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들어가도 다른 백악관 시위 동지들은 만나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최경록과는 가끔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적선동 옛날 한옥 집에서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백악관 시위 동지'들 중 가장 부끄럽게 처신한 것은 강영훈이라 하겠다. 강영훈도 초기에는 깨끗하고 꿋꿋하게 생활했다. 강영훈의 부인은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독한 파마액 때문에 손가락이 다 헐 지경이었다. 이 같은 생활고 때문이었던지 결국 70년대 들어 강영훈은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설립해 미국 언론계, 학계 등에 친 박정희 세력을 심는 역할을 담당했다.
백악관 앞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5.16을 반대한다고 떠들었던 몇몇 사람들의 행적도 기억해 둘 만하다. 장면 정권 하에서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석기와 나중에 야댱 당수를 지낸 이철승이 그들이다. 이석기는 주미대사관 국정감사를 위해 워싱턴에 와 있다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급보를 접하자 장리욱 대사 방에 달려와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부치고 "대사님! 미군을 동원 시켜야 합니다" 하면서 열을 올렸다.
그런데 5.16이 기정사실화 하고 CIA 부장 매쿤의 초청으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처음으로 미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한국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김동환의 집에서 김종필 환영 파티가 열렸다. 다른 특파원들과 함께 필자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이석기와 이철승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석기에게 대뜸 물었다.
"이 의원, 와이셔츠 걷어부치고 미군 동원시키라고 하던 분이 여긴 웬일이세요? 번지수를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이석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김부장하고 나는 한 고향 출신이라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게다가 우리 김부장의 춘부장도 제가 잘 알고 김부장 형님도 내가 은행에 취직시킨 처지라 먼 길 오셨는데 몰라라 할 수도 없고..."
그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부터 잘 아는 그 인연을 통해 권력의 신주체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뒷날 김종필이 정계에 진출할 때 이석기는 자기 지역구인 부여를 그에게 주고 자신은 서울로 옮겨갔다. 그 점에서는 이철승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열렬히 5.16을 반대한다던 그가 그 자리에는 왜 왔겠는가.
5.16 당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워싱턴에 와 있던 송요찬의 떳떳하지 못한 처신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직 중 4.19가 발발하자 계엄 사령관에 취임했는데,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집요한 정군운동에 밀려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루는 송요찬이 저녁 늦게 남편 최동현을 급히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돌아왔는데 별로 기분 좋은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물었다.
"그 양반이 무슨 일로 당신을 불렀어요?"
-"최기자는 장도영이하고 같은 평안도 출신인데 무슨 닿는 선이 없는가 합디다"
"그래서 뭐라 했어요?"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라기는? '그런 선 없어요 하고 딸기만 한 접시 먹고 왔지요."
5.16 후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명목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장도영과 닿는 선을 찾는다는 것은 곧 박정희에게 다가갈 길을 찾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박정희가 일으킨 하극상으로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밀려나 미국에 와 있는 처지면서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권력을 쥐자 다시 그 밑으로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송요찬이었다.
제 2장 - 박정희가 추방한 CIA 요원 '래리 베이커 증언'
- " 박정희와 황태성 3번 만났다 " -
황태성 사건 추적하다 추방된 CIA 요원 래리 베이커
5.16 직후 박정희는 미국 내에 남아있는 자신의 좌익 경력 근거를 없애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5.16 직후 박정희가 보낸 한
특별팀이 워싱턴에 왔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미국통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이 팀의 임무는 미국 국회 도서관 등지에 소장돼 있는 박정희의 과거 좌익 경력수록 자료들을 없애 버리는 것. 그러나 신문자료 같은 것은 빌린 다음 안돌려 주면 된다지만 마이크로필름으로 소장돼 있는 자료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 팀은 도서관의 모든 신문 자료들이 마이크로필름으로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미국에 왔다가 결국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63년 8월 30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군복을 벗었다. 다음날 그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로써 5대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9월 23일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언급했다. "여순반란 관련자가 정부 내에 있다. 박정희 씨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라는 것이었다. 이 '박정희 사상 논쟁"은 이른바 '황태성 사건'이 폭로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대구 10.1 폭동 때 피살됨)의 절친한 친구로서 대구 10.1 폭동 때 경북도인민위원회 선전 부장을 지냈다. 그는 이후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차관)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다가 5.16이 발발하자 박정희와의 비밀 회담을 위해 61년 9월 남파되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황태성을 체포한 후 간첩죄로 재판을 진행 하면서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 챈 미국 정보 당국이 황의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박정희는 사건 발생 후 거의 2년이 돼 가는 63년 9월까지도 그것을 계속 거부해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 시켰다. 시중에는 62년 여름부터 비밀리에 진행된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에 황태성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63년 9월25일 야당측은 이 사건을 폭로 했다. 중앙정보부는 이틀 뒤에 어쩔 수 없이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발표하고 그의 공화당 창당 관여 설을 전면 부인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황태성 사건에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63년 8월 강문봉 장군이 내게 귀가 번쩍 뜨일 얘기를 해주었다.
"미국 정보기관 G2의 비밀 정보원 출신이며 CIA 요원으로 한국에 주재하면서 '황태성 사건'을 제일 먼저 알아챘던 래리 베이커라는 사람이 박정희에 의해 추방돼 지금 자기 고향인 네브라스카에 돌아와 있다고 합니다."
강 장군은 과거 육군 정보국장 시절의 자기 동료들을 통해 그 같은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래리는 주한 미고문단 참모장으로 한국군 창설을 주도한 후 주한 유엔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한국군의 대부'라 불리는 하우스먼 밑에 있던 사람인데 CIA 비노출 요원으로서 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가장해 한국에서 일했다고 했다. 5.16 후 외교관 추방 1호가 주한 미 대사관의 그레고리 헨더슨 문정관이라면 민간인으로서는 래리가 추방 1호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황태성 사건에 달라붙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곧 래리 베이커에게 연락을 취했다.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를 만나러 오라고 했다. 네브라스카까지 가기가 너무 멀어 인터뷰를 서면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63년 8월 27일 질문서를 보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인 9월 13일 나는 래리 베이커로부터 10여 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답변서를 받았다.
그는 답변서에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은 물론 박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내용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서재에서 36년 전 래리 베이커가 보내온 답변서를 찾아내 다시 읽어 보았다. 래리 베이커의 미국적 시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전히 귀중한 자료로 생각되었다.
나의 질문서와 래리 베이커의 답변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Q) 질문서
1. 5.16 세력들이 공산권 제도를 모방해서 정부기구를 개조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이 같은 행태에 대해 논평해 달라.
2. 박정희와 그의 동료 일부가 공산주의 경력을 가졌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그들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현재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
3. 한국 중앙정보부는 대공 정보활동보다는 국내 정치사찰 부문에서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자금을 조달하는지 밝혀 줄 수 있는가.
4. 귀하는 군사 정권하에서 체포된 다음 사실상 한국에서 추방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5. 귀하는 미국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잇는가. 또 앞으로 사정이 허락한다면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 있는가.
A) 래리 베이커의 답변서
문명자 기자에게.
오레곤 주 변두리에 있는 나의 목장을 한 친구가 사겠다고 해서 그 목장의 장비 목록을 정리하고 소 마리 수를 헤아리느라 두 주일을 보냈습니다. 그 곳에서는 우편을 포함해서 외부 접촉을 하기가 어려워 63년 8월 27일 귀하의 서신에 대한 회답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먼저 귀하의 질문에 대해 귀하가 원하는 만큼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나는 법치주의가 확립된 미국에 돌아와 있어 안전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폭로하면 정부가 법을 제멋대로 좌지우지 하는 한국에 남아있는 나의 한국 친구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내가 우려하는 점을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1. 공산권 제도를 모방에서 정부기구를 개조한 박 정권의 행태에 대한 논평 및 2. 박정희와 그의 동료 일부가 공산주의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이 그들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는 것. 또 그들이 현재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을 통제하는 현 정권의 구조는 전부 공산주의 행정구조에 따라 조직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도한 행정기구의 개편 결과 61년 5월 이후 한국의 각 부처와 군에는 지휘계통과 관계없이 군사위원장(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할 자격을 가진 자가 한두 명씩 끼어 있습니다. 공산권 통제 기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중 명령계통은 사실상 정치위원 제도임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중 계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로서 국립경찰 경감과 총경 자리에 위관급 장교들을 대거 부임 시켰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는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만 상관이 군사위원장에게 불리한 사항을 보고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실을 군사 위원장이나 그의 측근자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 중앙정보부 조사부에 근무하는 이상태 중령이 또 다른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63년 3월에서 4월까지 본인이 중앙정보부 조사부에 체포, 구속되어 있는 동안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해임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의 후임인 김재춘 부장은 중앙정보부 숙청이란 명목으로 인사 개혁을 했습니다. 이 중령은 그 때 김재춘 부장이 데리고 온 다섯 명의 상급자 밑에 있었지만 사실상 조사부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하루 24시간 언제라도 박정희 의장과 직접 연락할 수 있었으며 그 때 일어난 중앙정보부의 대전환 속에서도 그런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 논평하고 싶습니다. 5.16 이후 군사혁명위원회(이하 군사위원회)가 처음으로 결성 됐을 때 그것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단일한 조직 같았으나 실제로는 여러 그룹을 대표한 것이었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토론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이 군사위원회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비밀계획에 따라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금년(63년) 2월, 박은 김윤근 소장과 동료들을 군사위원회에서 몰아냈습니다. 게다가 김종필이 갑자기 국외로 나가게 됨에 따라 군사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박정희의 노골적인 1인 독재를 위장하는 도구가 돼 버렸습니다.
미국 대사 사무엘 D 버거는 '군사정부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김종필이 군사위원회 내의 반대파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수많은 조처를 취했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습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대규모의 증권파동을 대담하게 일으키고 박정희가 행한 화폐개혁의 진정한 의도가 밝혀지자 버거 대사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화폐 개혁은 사회주의로 가는 장기계획의 첫 조처임이 명백했습니다. 침략적인 공산국과 인접하고 있는 한국에서 그런 조처는 한국을 급속히 공산화 시키는 수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하튼 박정희와 김종필이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군사위원회로부터 축출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 대사가 다 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경향에 반대했을 때는 이미 시기가 늦었던 것입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득세한 후 한국에는 수많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한국 국민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를 다시 맺으려고 2년 전에 북한에서 장관급 공산주의자가 남하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파업 담당자, 연락원, 정치 선동가 등등 여러 가지 임무를 띤 북한 첩자가 한국에 침투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그 같은 이북 첩자들은 대부분 이남에 사는 친척이나 친지와 먼저 접촉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국 국민들은 대부분 고민하다가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그들을 고발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정전 이후 북한이 각료급 공산주의자를 남파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61년 9월 얼마 전까지 이북에서
차관으로 일했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사람이 서울에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황태성입니다.
그가 온 다음 두 달 동안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세 번 만났습니다. 602호실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 방 바로 건너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24시간 감시하는 장소였습니다. 본인은 이 세 번 모임에서 그들이 무엇을 논의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박정희는 다른 '애국적인 한국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황을 투옥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후 61년 10월 경찰에서 황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그 사실을 발표하기도 전에 중앙정보부가 황을 가로채 가지고 비밀리에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황에게 사형이 언도 되었으나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62년 5월 이남의 공산주의 죄수들은 모두 대구 형무소로 집결되었는데 이 중 황태성만은 62년 7월 말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현재 황은 서대문 형무소 귀빈 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이상으로 귀하의 처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대답했다고 봅니다.
3. 한국 중앙정보부는 대공 정보활동 보다는 국내 정치사찰 부문에서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자금을 조달하는지 밝혀 줄 수 있는가.
- 중앙정보부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지향인사들과 친미 인사들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 오랫동안 산 미국인으로 CIA가 이 부패하고 악질적인 야수를 열렬히 지지하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CIA는 남베트남에서 부패한 고 딘 누 비밀경찰과 특별부대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고 봅니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특히 한국에서 CIA의 사업 방향을 돌리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예산만 가지고는 자금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자금 출처를 마련하고 있는데 자유당 추종자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능률적 방식으로 자금을 염출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미국 대사와 전 미8군 사령관 메로이 장군의 협력을 얻어 미군 잉여 자재판매업을 독점하고 있고, 심지어 미군 쓰레기 처분까지 맡고 있습니다. 미군 택시 운영권도 아무런 경쟁 입찰도 없이 따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허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버거 대사와 멜로이 장군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는 62년 6월 미국 대사가 현실에 눈을 뜰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중앙정보부는 김종필의 형 김종락을 통해서 새로운 자금 출처를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장사를 하려거나 한국에 투자할 일본인들로부터 자금을 짜내는 것입니다. 김종락은 새나라 자동차 공장과 의암 수력발전소 건설 사업에서 자금을 염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한국 증권파동은 주로 한국 중앙정보부 자금 조달을 위해 생긴 사건임은 물론입니다. 이런 파문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는 현재도 증권시장을 이용해서 중앙정보부와 간부들의 개인 치부를 위해 계속 자금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4. 귀하는 군사 정권에게 체포된 다음 사실상 한국에서 추방 되었다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 한국에서 내가 추방된 이유에는 의심스러운 측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추방은 나에게도 고역이었지만 가족에게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실상 망명객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박정희는 내가 아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여겨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봅니다.
체포 됐을 때 나는 한미 간의 우호통상항해 조약에 보장된 바대로 공개재판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인 공개재판에서는 저명한 한국인들이 당한 것과 같은 부정재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박 정권은 공개 재판을 하지 않고 나를 추방한 것입니다.
5. 귀하는 미국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가. 앞으로 사정이 허락한다면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
있는가.
- 나는 한국에서 미국 정보기관에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미국 정보기관은 한국정치에 개입하는 기관은 아니었습니다. 그 기관의 역할은 기술정보 부문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미국인이지만 조속한 시일 내에 자유로운 한국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래리 베이커의 증언을 즉시 기사화해서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특종성 기사가 보도되지 않았다. 실망이 컸지만 그 무렵 내가 보낸 기사 중 상당수가 휴지통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군사정권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됐겠거니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문봉 장군이 다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자유당 때 육군 정보국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 분야에 매우 밝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순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는데 그 사건 재판장 최석 장군이 지금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시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정일권과 백선엽, 이용문 장군 등이 박정희를 구출 하느라 힘썼는데 결국 박정희는 3천여 명에 달하는 군내 남로당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주고 자신은 구제받아 문관으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곧바로 나는 최석 장군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그는 강문봉 장군의 말대로 "박정희는 남로당 군책으로 있었다"라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곧 국회도서관에 가서 당시의 신문들과 미군 정보자료 등을 찾아냈다. 자료 내용은 강문봉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었다. 수집한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나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 본사에 보냈다. 필자는 그 기사의 첫 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박정희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기사를 보낸 직후 국군의 날을 맞아 주미 대사관저에서 파티가 열렸다. 당시에는 정일권 후임으로 김정렬 대사가 와 있었다. 파티에 갔더니 홍성철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가 2층으로 나를 불렀다. 그 곳에는 김정렬 대사는 물론 [한국일보]의 설국환, [동양통신]의 문도상 특파원과 강문봉 장군이 앉아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다른 특파원들과 내가 보는 앞에서 강문봉을 다그쳐 그에게 '박정희 남로당 군책' 발언을 번복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내 기사를 오보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인민재판이었다. 나는 강문봉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강 장군, 박정희가 여순 때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얘기, 분명히 나에게 했지요?"
-"네. 했습니다."
나는 다시 설국환에게 말했다.
"미스터 설도 분명히 들었을 테니 똑바로 보도하세요."
김정렬 대사가 당황해서 말했다.
-"문 기자, 내가 보증하는데 박 장군은 그런 경력이 없어요. 내 말 믿어요."
"저는 그 말씀 못 믿겠습니다."
내가 [한국일보] 특파원 설국환에게 "똑바로 보도하라"고 다그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잘 내는 재주꾼이었다. [한국일보]가 주최한 '이 대통령배 연날리기 대회' , '씨름대회' 따위가 모두 그의 아이디어 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연좌제 때문에 미국에 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다가 해방 후 임화와 같이 월북한 사회주의자 설의식이 바로 그의 삼촌뻘이었다.
설국환은 그런 곡절 때문에 자유당 시절 출국을 못하고 있다가 허정 임시 정부 때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의 후원으로 마침내 미국에 왔다. 그러나 한국일보사가 특파원 체재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다. 이 같은 형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신원상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는 5.16 후 서서히 박정희에게 협조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국무성에 브리핑이 있는 날이면 곧장 한국 대사관으로 가서 무슨 큰 기밀 정보라도 주는 듯이 생색을 내며 정일권 대사에게 브리핑 내용을 전하곤 했다.
나아가 설국환은 박정희를 위해 미 국무성의 도널드 맥도널드 한국 과장에게 로비를 한다고 다녔는데 그 덕분인지 귀국 후 67년부터 코리아나관광진흥(주) 사장, 코리아 그레이하운드 사장, 대한 여행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박정희 시절 모든 공무원들은 비행기표를 대한 여행사에서 사야 했다. 그는 유신 이후 다시 대미 로비를 한다고 나섰는데 그것이 얼마만큼 통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 없다.
대사관에서 한바탕 한 후 집에 돌아왔는데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본사에다 전보로 기사를 보냈다.
"나는 캥거루 코트(인민재판)에 올라갔다."
몇 시간 후 AP 통신의 국무성 출입기자 스펜서 데이비스를 만났는데 그가 말했다.
"당신이 캥거루 코트에 올라갔다며?"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보낸 기사가 신문에 나오려면 하루는 더 있어야 하는데 이 친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데이비스를 다그쳤더니 그는 "국무성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외국 특파원들이 본사에 타전하는 기사들은 모두 국무성에 한 카피씩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스펜서 데이비스를 데리고 국무성의 마샬 그린 차관보 방으로 갔다. 마샬 그린은 5.16 당시 한국 대사 대리직에 있으면서 대통령 윤보선에게 "군을 출동시켜 쿠데타군을 진압하자"고 설득했던 인물이다. 나를 보자 마샬 그린은 "그런 인민재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수를 치고 나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미리 본 기사대로 나는 박정희 전력 기사 때문에 캥거루 코트에 올라갔다. 당신들은 여순 반란 사건에 관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기록들을 모두 공개하면 내 기사가 오보인지 아닌지 밝혀질 것이고, 내가 더 이상 캥거루 코트에 올라갈 일도 없을 것이다."
퇴근 후 남편에게 국무성 사건에 대해 얘기했더니 남편은 오히려 되물었다.
- "텔렉스 회사에서 외국 특파원들 기사를 국무성으로 넘기는 걸 아직도 몰랐단 말이오? 당신 특파원 헛했구먼."
"그러면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국 민주주의는 몽땅 거짓말인가요?"
-"이 여성은 미국이란 나라를 너무나 모르고 좌충우돌 하는 게 문제야."
사실 그랬다. 당시 나는 미국이란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실리든 안 실리든 박정희 관련 기사를 계속 본사로 보냈다. 당시 박정희 의전실에 근무하던 이 아무개가 나중에 미국에 왔는데 그로부터 " 당시 박의장이 '워싱턴 문기자가 또 뭐 또 보내온 것 없나' 하고 줄곧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63년 10월 9일 대통령 선거를 불과 한 주일 앞둔 상황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은 황태성 사건의 의문점을 강력히 제기하고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선거 쟁점화 시켰다. 그러자 다급해진 박정희는 10월 10일 안동행 열차 안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황태성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박정희는 "장도영계의 조웅과 모 외국기관에 근무하는 베이커가 황태성과 나에 대한 허위 사실을 조작해 유포했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10월 11일 래리 베이커는 미국에서 다음과 같은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 반박문의 내용은 래리 베이커가 필자에게 보내온 답변서와 상당부분 일치하므로 중복되는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지난 10일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 군사정권의 박정희 의장은 자신이 최고위급 북한 간첩과 직접 만난 사실이 최근에 폭로되자 이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장도영 장군과 내가 그것을 허위 조작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박의 비난은 철두철미 조작된 것이다. 그가 북한 첩자와 비밀리에 접촉한 것이 알려지면 오는 10월 15일 대선에서 당락이 좌우될 것이므로 그는 계획적으로 국민을 속이려 한 것이다. 이 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의 내용은 62년에서 63년 사이 본인이 서울에 있을 때 지극히 믿을 만하고 신빙성 있는 소식통들에게 들은 것이다. 이들 소식통 중 일부는 군사 정권의 최고 지도층에 속한다. 또한 이 정보는 세 번이나 재검토. 재확인 된 것으로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61년 9월1일 남하 직전까지 북한 정권의 무역성 부상(차관)으로 있던 황태성이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30년대에 황은 박의 형과 가까운 친구였다. 황은 조사를 받을 때 자기가 박상희의 친구라고 밝힘으로써 박정희와의 관계를 교묘하게 회피했다. 박상희는 45년~48년 사이의 미군정 시기에 큰 소란(대구 폭동을 의미함-필자 주)이 있었을 때 주모자로 피살된
사람이다.
박정희는 61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서울에 있는 반도호텔에서 비밀리에 세 번이나 황을 만났다(중략)
지금으로부터 2주일 전 허정 민주당 대선 후보가 황태성 사건을 공개했다. 그러자 한국 중앙정보부는 황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대법원에 상고중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허정 후보가 이 사건을 공개하기 전에 한국 정부가 황태성을 체포한 사실을 발표 했다면 그것은 군사정권에게 굉장히 유리한 인상을 주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2년 동안 이 사건은 국민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본인은 박 의장의 궁극적 목적을 완전무결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46년에서 48년 사이의 공산당과의 연관, 황태성 사건을 다룬 방식, 그리고 공산당식 통제 방법을 쓰고 있는 것 등은 그에 대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그가 이번 대선에서 이긴다면 한국의 장래가 대단히 우려스럽다.
오레건 주에서 래리 베이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71년 나는 뜻밖에도 김형욱의 입에서 내가 보낸 래리 베이커 서면 인터뷰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지 못하게 된 이유를 듣게 되었다.
당시,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나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위협과 견제로 전전긍긍하던 처지였다. 그는 멕시코를 방문하고 오다가 뉴욕에 들렀는데 역시 유엔 취재를 위해 뉴욕에 있던 나와 '우리하우스'라는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는 [동아일보] 기자로서 당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 연수 과정을 밟고 있던 이웅희도 함께 있었다.
김형욱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멧돼지'라는 별명과는 달리 상당히 두뇌회전이 빠르고 교활한 인간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박 정권 최고의 충신은 나이며 이후락과 김종필은 썩었고 나는 깨끗하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JP 가지고는 안 된다고 내가 각하에게 이야기해서 그를 두 번이나 쫓아냈다"고 열을 내기에 나는 물었다.
"JP하고는 왜 그렇게 원수가 됐습니까?"
-"우리는 철저한 반공이지만 그는 과거에 좌익 운동을 했기 때문이오."
"그렇게 치면 박 대통령은 여순 사건 때 남로당 군책 아닙니까?"
-"각하야 모든 걸 다 불고 전향했지만 JP는 다릅니다. 그는 한 번도 잡혀들어 가지 않았고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갔소. 그는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놈이오."
그러다가 김형욱은 갑자기 내가 옛날에 썼던 황태성 기사 얘기를 꺼냈다.
-"문 기자가 보낸 황태성 관련 기사 말이요. 그거 보고 나는 사실 문 기자가 굉장히 무섭게 생긴 여성인 줄 알았소."
"래리 베이커가 증언한 기사 말이죠? 그런데 황태성이를 진짜 죽이기는 죽였습니까?"
-"6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에서는 계속 황태성이를 넘기라는데 박 의장은 계속 미루지, 참 혼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래가지고는 선거 못 한다고 밀어 붙여서 CIA에다 넘겼지요. 사형 판결 뒤에도 박 의장이 굉장히 아쉬워하면서 사형 집행 결재를 계속 지연시키는 거요. 결국 내가 다시 밀어붙여 받아냈지요. 그런데 문 기자가 보낸 기사 말이요. 그거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지."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왜 김부장한테 갔습니까?"
-"방일영씨가 그 기사 가지고 나한테 왔습디다. 받아서 읽어 보니 등에 식은땀이 나더구먼. 얼른 비서실장 불러 금고에 넣으라고 하고 '뭘 도와드릴까요' 했지요."
"그래서요?"
-"방일영 씨가 '융자 좀 해 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결국 한 2~3억 해줬지 아마."
"뭐라구요?"
나는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박정희의 집권과 함께 한국 언론도 권력의 시녀 꼴로 전락해 버렸지만 그래도 60년대 초반까지는 언론으로서 기백이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미 자사 기자의 기사를 중앙정보부장에게 갖다 바치고 돈을 얻어 쓴 언론사 사주가 있었다니, 나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조선일보 이놈들, 나 참을 수 없습니다. 김부장, 지금 하신 얘기 당장 폭로하겠습니다. 여기 이웅희 기자가 증인이에요."
김형욱은 몹시 당황해하며 신신당부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만 참아 주시오. 꼭 기회가 있을 거요."
그의 기색으로 봐서는 내가 그의 얘기를 기사화할 경우 완전히 오리발을 내밀 것만 같았다. 다음 기회에 그의 말을 비밀리에 녹음하든지 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기사를 보류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김형욱은 그 때 이미 자신의 미국 도피를 염두에 두고 '나중 기회' 운운 했던 것 같았다.
방일영은 김형욱 하고만 거래했던 것이 아니었다. 69년 김형욱과 같은 시기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던 이후락이 당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이것만은 꼭 해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것이 바로 코리아나 호텔 건설 자금이었다고 한다.
김성곤의 소원, "미국 내에 남아 있는 나의 좌익 경력 기록을 없애라"
미국에 남아 잇는 자신의 좌익 전력 기록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제 3공화국의 또 한 사람의 실력자가 바로 김성곤이다.
김성곤은 65년 한일 기본조약 조인에 따라 일본이 제공하게 된 무상원조 3억불과 유상 2억불, 차관 1억 불의 분배 과정에서 1억5천만 불을 넘겨받아 쌍용양회를 설립했다.
한일회담은 한일 간의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식민치 통치를 통해 한국민에게 끼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배상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일본과 한국을 한데 묶어 강력한 반공 동맹을 수립하려 했던 미국의 전략 아래서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한일회담의 의의를 청구권 문제에서 경제협력자금 구걸 외교로 전락시켜 버렸다. 한일 회담 협정문에서 무상원조 3억 불, 유상 2억 불, 차관 1억 불을 받는 대신 청구권을 포기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전쟁 징용자 등 모든 식민지 침략 피해자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피맺힌 자금을 수완 좋게 분배받아 일약 제 3공화국 최대의 기업가로 발돋움한 사람이 바로 김성곤이었다. 그는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서 제 3공화국 금권 정치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69년 그는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과 이른바 공화당 4인 체제를 이루어 삼선개헌안 통과의 돌격부대역을 맡았다.
김성곤은 자신의 좌익 전력 기록을 은폐하기 위해 역대 내무부 장관을 매수해 형님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곤 했다.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일 때 김성곤은 김형욱에게 중정에 비치되어 있는 그의 신상카드를 말소해 달라고 청탁했다고 한다. 김형욱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김성곤은 본격적으로 김형욱 제거 작업에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한국 내에 있는 자기 경력 기록을 거의 다 없앤 후 김성곤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미국 관계기관에 남아 있는 경력 기록을 없앨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 그는 나에게도 물은 일이 있다.
-"문 기자, 미국에 있는 내 경력 기록을 없앨 방법이 없을까?"
"힘들다고 봅니다. 그런 기록들이 국무성뿐 아니라 CIA, 군정보부등 여러 기관에 있을 텐데 그 자료를 어떻게 다 없애겠습니까? 5.16 직후에 박정희 의장도 특별 사절단을 워싱턴에 보내 국회 도서관 자료를 없애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했지요.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돼 있는 것을 어떻게 없앱니까?"
-"없앨 수 없다? 영구히 남는다?" 그는 몹시 고민스러워 했다.
김성곤이 구워 삶았던 내무장관 중에 엄민영이란 이가 있다. 그 역시 경북 출신 좌익 경력자로 6.25 당시 월북했다. 그 후 처자를 이북에 놔두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가 미군 정보부대에 체포 되었고 전향해서 남쪽에서 새로 가정을 꾸몄다. 엄민영은 방첩부대 등을 거쳐 5.16 이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도쿄에 주재하기도 했고 주일 대사와 내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엄민영이 주일대사로 부임해 신임장을 제정할 때 그의 경력 때문에 한.일 간에 마찰이 빚어진 일도 있었다.
통상 호적초본만 가지고 처리하던 일본 측이 유독 엄민영에게는 호적 등본을 제출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엄민영이 주일대사로 재직하던 중 북에 남겨 둔 그의 아들이 연일 북한 방송에 출현해 아버지를 부르는 사태가 생겼다.
"아버지, 저 00 입니다. 민족의 통일을 앞당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 속히 북으로 오십시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엄민영은 일본 게이오 병원에서 갑자기 숨을 거둔다. 공식적인 사인은 위장병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자살이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김성곤이 일본으로, 미국으로, 떠도는 낭인 신세가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71년 10월 일어난 이른바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파동' 때문이었다.
야당이 국회에 상정한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을 부결시키라는 박정희의 엄명에 맞서 그것을 가결 시켰다가 하루아침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그 유명한 카이젤 수염까지 뜯기고 박정희에게 버림받았던 것이다.
71년 국내에는 '실미도 특수군 난동사건' , '광주 대단지 폭동', '한진 빌딩 노동자 난입사건', '기동경찰 총기난사 사건', '무장공비 마을 점거'등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야당측은 이에 책임을 물어 오치성 장관 해임안을 제출했는데 당시 공화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성곤씨 등의 4인방은 이것을 기회로 오치성을 해임시켜 버리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오치성이 내무부 장관으로 들어서자마자 경찰 간부 2백 20명을 권고 해임 시키고 시장, 군수, 구청장, 도청의 국.과장 등 2백 4명을 인사이동 시켰는데 이는 4인 체제의 밑바탕을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오치성이 이 같은 과감한 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 박정희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행정조직의 골격이고 선거 시 집권자의 손발이 돼야 할 내무. 경찰, 관료가 공화당 4인방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는 꼴을 두고 볼 박정희가 아니었다.
김성곤 등 4인방은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10월 2일 야당의 주장에 편승해 오치성 해임 결의안을 통과시켜 버렸고, 대노한 박정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항명 주동자들을 색출해 엄중 조치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김성곤 길재호 등 주동자 전원은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그야말로 개처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의 권위에 도전했던 4인 체제는 이로서 끝장이 났다. 박정희는 그의 권력을 넘보는 2인자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이후 공화당에는 박정희 아닌 실세는 결코 등장하지 못했다. 완전한 박정희 친정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그것은 유신체제의
전주곡이었다.
나는 김성곤이 중정에서 풀려나와 일본을 거쳐 미국에 왔을 때 그가 겪은 수모를 직접 들었다.
-"갑자기 정보부원들이 집에 들이닥치는데 하도 급해서 다락에 숨었지 그래도 꼼짝없이 끌려갔는데 그 대접이란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놈들이 내 수염을 한 올씩 한 올씩 뽑는데 미치겠더구먼."
그 얘기를 할 때만은 평소 술도 잘하고 노래도 자 부르는 호방한 성격의 김성곤도 분노와 공포로 말할 수 없는 심정인 듯했다.
"그만하면 막강한 위치에 계셨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하극상을 했습니까?"
-"3선으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3선을 밀었던거요. 김형욱이가 남산에 앉아 도청하는 줄 다 알면서도 이만섭이하고 짜고 공화당 의원총회를 열어 '이후락.김형욱이 해임 안 시키면 우리는 3선 반대한다'고 강력하게 발언하게 해서 결국 그것을 관철시켰지. 그런데 막상 3선하고 나서 보니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더구먼. 박정희가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입법부는 제 맘대로 못 한다는 것을 보여 줘야겠다 싶었지."
김성곤은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봐야 겠다'는 정치적 야망이 굉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자기 장기인 자금 준비는 물론 사람준비도 상당하게 했다. 여야 할 것 없이 돈 봉투로 정치권을 줄줄이 자기 사람으로 엮는 데 그치지 않고 '성곡재단'이라는 걸 만들어 언론계 사람들까지 포섭했으니 말이다. 오치성 사건이라는 것은 결국 그 같은 야심의 발로였던 셈이다.
그는 72년 10월 유신 발표 당시 미국에 있었다. 하루는 김성곤으로부터 좀 보자고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로 갔더니 그가 성명서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성명을 하나 발표하려 하는데 이만하면 될까? 좀 봐 주시오."
읽어보니 영락없이 유신을 고무.찬양하는 글이었다.
"글쎄 이런 걸 왜 해야 되는지 저는 모르겠고, 그래서 성명서가 잘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됩니까?"
-"허허, 유신으로 우리나라가 뒷걸음질할 것은 뻔한 일이지만 나야 한국에 벌여놓은 사업도 많고 한데 어쩌겠소. 한국에는 들어가 봐야 되겠고..."
김성곤은 그 성명으로 박정희가 자신을 구제해 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자신이 동양통신 사주를 할 때 친하게 지낸 AP, UPI 관계자들에게 그 성명서를 보냈다. 그 덕분인지 그는 소원대로 귀국했다.
그러나 쌍용그룹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경제인으로서의 위상은 회복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끝내 재기하지 못한 채 폭음으로 건강을 해쳐 결국 75년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가 자신에 대한 항명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내가 5.16 이후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이유는 백해무익한 사상논쟁을 재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51년 피난 수도 부산을 떠나 도쿄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조차 사상대립으로 인한
민족적 비극은 계속 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메이지 대학만 해도 학생회관에 민단 계통의 재일 한국학생동맹 사무실과 총련 계통의 유학생위원회 사무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당시 학생동맹의 상임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우리가 문만 열고 나섰다 하면 복도에서 좌우투쟁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신탁통치 문제, 6.25 책임 문제 등등을 가지고 나를 포함한 메이지대 유학생들은 좌.우로 갈려 일본 학생들이 보든 말든 고래고래 목청을 높여가며 싸우곤 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좌익학생들은 동포이기 전에 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53년경 도쿄 신주쿠에서 우연히 제주도 출신의 한 법정대 유학생과 대화하게 됐다. 그의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제주 4.3 사건 때 우리 아버지, 형님이 모두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었다. 그대로 있으면 나도 죽을 판이라서
일본으로 밀항해 왔다 이곳에서 공부를 하려니 학비는커녕 먹을 것도 없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총련을 알게 됐다. 거기서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관심 없다.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진짜 같은 동포 아닌가."
개인적인 얘기를 구구하게 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실 비교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일본인들도 세 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50년대에는 나는 별 걱정 없이 유학 생활을 했다. 그러니 배고픈 고학생들의 처지를 알 리가 없었다.
당시 민단측에서는 밀항자들은 물론 재일동포들에게도 장학금은커녕 별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반면 총련측은 동포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법정대 학생처럼 총련의 도움으로 공부한 사람들과 총련이니 민단이니, 빨갱이니 아니니 하고 싸워 봐야 무슨 민족적 이익이 있을 것인가.
더구나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은 나로 하여금 새삼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박정희의 과거 전력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그의 독재체제를 떠받친 댓가로 온갖 영화를 누렸던 자들, 유신정권과 그 연장선인 5,6공에 유착해서 언론의 정도를 포기하고 사세를 키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온 [조선일보]를 위시한 후안무치한 언론들이 나에게 '친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친북인사'라고 물고 늘어지는 [조선일보]에게 나는 우선 묻고자 한다. 63년 필자가 보낸 황태성 관련 기사는 왜 싣지 않았는가.
박정희는 총칼로 합헌 정부를 무너뜨린 후 민정 이양 약속을 휴짓조각으로 만들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엄청난 좌익전력을 철저히 숨기면서 오히려 정적과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처럼 거짓으로 쌓은 바벨탑 위에 군림한 박정희의 행태로 인해 그의 전력 문제는 박 정권 18년 내내 '확실한 유언비어'로 떠돌면서 대한민국의 가치체계를 혼란 시켰다.
97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도 선거정국의 '단골메뉴'인 색깔론 시비가 등장했다. 대통령이 되고자 국민 앞에 나서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국민 앞에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서서 지적돼야 할 것은 박정희 시대와 그 연장인 5~6공 시대에 박정희의 전력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면서 그 밑에서 영화를 누렸던 자들, 그리고 현재까지도 박정희의 망령을 미화하고 있는 자들은 색깔론 시비를 벌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63년과 64년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을 낳는 바람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내가 보낸 기사는 번번이 조선일보사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래저래 지친 나는 아이들을 좀 더 키워놓고 일을 계속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64년 귀국해 [조선일보]측에 사의를 밝혔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당시 조선일보측은 김형욱으로부터 문명자 특파원을 해임하라는 압력을 계속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자진해서 그만둔다니 회사측에서는 내심 잘됐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쉬고 나서 다시 일하려던 나의 계획은 난관에 부닥쳤다. 내가 [조선일보]에 사표 냈다는 얘기를 들은 [동아일보]의 천관우 편집국장이 대뜸 부르더니 무교동 해장국 집에서 선짓국 한 그릇을 사주며 같이 일하자고 했다. 평소부터 존경하던 분과 오랜만에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열을 올리며 의기투합하다 보니 그분의 청을 거절 못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나는 결국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서울에 왔다가 [동아일보] 특파원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다.
일본 육사 교장,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에게 "너 출세했구나"
마지막으로 박정희와 정일권의 친일 전력에 대한 이야기 한토막을 덧붙인다. 지난 72년 나는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이 도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그들을 만난 일이 있다. 만주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 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같이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 어렵사리 만난 박정희의 두 동창생은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박정희가 '벚꽃처럼 활짝 폈다가 한 순간에 떨어지겠다'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는 증언도 했다. 나는 그들로 부터 박정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렵사리 입수했다.
정일권의 친일행적 역시 박정희에 견주어 만만치 않다. 나는 지난 80년 당시 등소평 중국 부수상의 배려로 중국을 방문했다. 내가 등소평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9년 최초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였다. 등소평은 백악관에서 취재에 열중하고 있는 기자단들 중에서 유일한 동양 여성인 나를 발견하고 중국계가 아닌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 혹시 중국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일본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디서 왔습니까?"
"지도상에서 당신 나라와 동쪽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왔습니다."
-"아 초센(조선)?"
"아니오 다이한민궈(대한민국) 입니다."
-"아, 다이한민궈."
그는 중국인은 아니지만 동양계 여성이 백악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흐뭇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백악관에서 카터와 정상회담을 가진 뒤 등소평은 워싱턴에서 시애틀까지 미국 전역을 순회 방문했는데 나는 그의 모든 일정을 수행했다. 등소평은 아침에 나를 보면 꼭 "식사 했습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내 경험상 이 지구상에서 아침에 만나서 "밥 먹었어요?"라고 인사하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 인사가 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왕 선생에게 배웠던 중국어도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 순회방문 일정이 끝난 후 나는 등소평에게 단독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그는 이를 선뜻 받아 주었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다 끝냈을 때 그는 "사정이 바뀌었다"면서 "인터뷰를 기사화 하는 것을 좀 미루어 달라"고 했다. 나는 바로 취재수첩을 덮으며 아무런 이의 없이 그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사정이 허락하는 날까지 오늘의 인터뷰는 기사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조속한 시일 내에 우리 미국 기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부탁을 선선히 받아 들였고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80년 4월 나는 미국의 저명한 여기자 17명으로 구성된 취재단의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등소평 부수상의 배려로 서방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연변 지방을 취재할 기회를 얻었다.
그 때 나는 하얼빈에서 타냐 김이라는 조선족 교포 여성을 만났다. 타냐 김의 시아버지는 조선족이지만 중국에서 혁명열사로 대우받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일제 말기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도망갔다가 해방 후 중국에 돌아 왔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정일권의 만주 광명중학교 후배라고 했다. 그래서 타냐 김은 일제시대 '헌병대장 정일권'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정일권은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 관동군 헌병대에 있었는데 때때로 말 타고 긴 칼을 차고 용정 쪽에 내려와서 '우리 조선 사람들이 황군에 입대해야 한다'고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고 돌아가곤 했다. 철없는 젊은이 중에는 말 타고 칼 찬 정일권의 멋진 모습이 부러워서 관동군에 입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 남편은 끝내 입대하지 않고 소련으로 도망갔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끝내 한 마디 참회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5.16 쿠데타 후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61년 11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수상과 회담했다. 일본 측은 수상 관저에서 박의장을 위한 칵테일파티를 열어 주면서 박정희의 일본 육사 시절 교장을 불러다 놓았다. 이 일본인 교장은 반말 비슷한 어조로 박정희에게 "너 성공했구나"라고 해 박정희가 숙소로 돌아와 몹시 투덜댔다고 한다.
이 얼마나 교활한 일본인들인가. 미래의 한국 대통령 박정희에게 "어차피 너는 우리가 키워 낸 용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앞으로 일본 대사만큼은 민족교육을 받은 새 세대가 부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했었다.
2부 - 김대중 납치, 박정희와의 결별
박정희와의 첫 만남
박정희가 5.16 쿠데타 이후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은 61년 11월 13일의 일이다. 이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박정희는 사활을 걸고 대미 로비를 벌였다. 이것은 그가 미국을 방문하기 전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던 민주당 전 총리 장면을 석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꼭 20년 후인 80년 5.17 쿠데타(79년 12.12를 말함)로 집권한 전두환이 김대중을 석방하기로 약속하고 미국에 온 것도 그 전철을 되밟은 것이라 하겠다.
박정희가 도착한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영접사절로 나간 것은 부통령 존슨이었다. 존슨이 공항에 나가게 되기까지 과정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박정희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이 바로 그 때였다. 박정희는 바지선도 세우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울 온 촌놈처럼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
박정희가 백악관에서 케네디를 만난 후 주미 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박정희와 악수를 나눴다. 나는 말했다.
"박의장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정일권 주미대사의 눈이 둥그레졌다. 문명자 입에서 무슨 독설이 나오는가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했다.
"색안경을 쓰고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난 것은 큰 실례인데요.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정일권 대사가 아연실색해서 도중에 내 말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박정희가 되물었다.
-"문명자 기자님이라고 그러셨죠? 고맙습니다. 제가 깜빡 했습니다. 그렇게 실례가 됩니까?"
"미국에서는 그렇습니다. 내일부터는 벗으십시오."
박정희는 정일권 대사에게 물었다.
-"문 기자는 경상도 분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네 대굽니다."
내가 박정희를 두 번째 만난 것은 63년 케네디가 암살된 후 박정희가 대통령 당선자로서 장례식 참석차 미국에 왔을
때였다.
외국 원수로의 제일 먼저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것은 프랑스의 드골이었다. 그 무렵은 미.불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여서 공항에 나와 있던 기자들은 드골에게 미.불 관계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드골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무게가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사람에게 미.불 관계가 다 뭐냐? 노코멘트"
이것이 선례가 돼서 이후 속속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들은 애도의 표시로 아무도 코멘트 없이 조용히 미국 땅을 밟았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서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은 물론 교민들까지 공항에 동원해 태극기를 흔들며 자기 나라 국가원수를 열렬히 환영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다. 이 추태를 보며 나는 박정희의 미국 도착 기사를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오늘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가 댈러스 공항에 도착했다. 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이 곳 미국에 와서 정권을 민정으로 이양하고 자신은 군의 본분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약속을 받은 케네디는 저격으로 서거했고, 그런 약속을 한 사람은 대통령 당선자로서 그의 장례식에 참석차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무릎까지 쌓인 눈 속에서 진행되었던 케네디의 취임식. 세계가 열광했던 그의 취임식에 참석해 나는 그의 말대로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찬란하게 꽃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미국의 본질을 제대로 몰랐던 나의 순진함 때문이었겠지만 당시 케네디의 죽음을 비통해 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케네디의 장례식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군홧발로 짓밟은 조그만 사나이를 지켜보는 심정이란 대체 어떠했을 것인가.
65년 5월 박정희가 존슨의 초청으로 세 번째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육영수 여사를 동반했다. 그 때 주미 대사관저에서 부페 형식으로 점심 식사가 있었다. 당시 존슨이 박정희에게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과 한일 국교 정상화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한일 회담은 이미 일단락된 상태이긴 했지만 한일협정 반대데모로 64년 6월3일 계엄령까지 선포된 상황이었던 만큼 굴욕 협상에 대한 국민적 반대 분위기는 여전했다. 게다가 의무부대나 태권도 교관 등 비전투부대라면 몰라도 남의 나라 전쟁에 피를 흘려야 하는 전투부대까지 파견하는 것에 대해 야당과 많은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상회담에서 오고간 얘기들은 비공개에 붙여졌다. 그래서 우리 기자들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박정희. 존슨 회담 내용 취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때 육 여사의 통역관이자 비서인 나은실이란 여성이 나를 찾아왔다.
-"육 여사님께서 문 기자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잠시 같이 가실까요?"
그것이 육 여사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육 여사는 듣던 대로 아주 조신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상냥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말씀 듣던 거와는 다르네요."
"어떻게 다릅니까?"
-"여성이 기자직에 있는데다 더구나 정치 기사를 쓰신다고 해서 저는 문명자 기자 하면 아주 험상궂고 무서운 분이라고
상상했었어요."
쿠데타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자기 남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내 기사를 봤다면 그렇게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육여사가 또 물었다.
-"결혼 하셨어요?"
"네."
-"아이 그러세요? 저는 독신인줄 알았어요. 아이도 있으세요?"
"연년생으로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습니다."
그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육 여사의 방을 나왔다. 그런데 나은실이 뒤쫓아 와 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열어보니 2백 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 때 우리 특파원들의 체재비를 포함한 한 달 월급이 2백 달러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나는 다시 육 여사에게 갔다.
"저 이 돈 못 받습니다."
-"이러시면 안 되는데... 2백 불 밖에 안 되는 걸요. 아이들 선물이라도 사주라고요."
"안 되는
건 바로 접니다."
나는 육 여사에게 돈 봉투를 돌려주고 방을 나왔다. 이 작은 사건이 나에 대한 강한 인상을 육 여사에게 남긴 듯했다.
나중에 한국에서 실크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 했을 때 육 여사는 실크 한 감을 상자에 넣어 내게 보내왔다. "촌지를 안 받으시는 문 기자님의 원칙은 존경합니다만, 이것은 전세계에 한국 실크를 선전하고자 하는 의미이니 받으셔야 합니다." 하는 말을 전해 왔기에 나도 감사하게 받았다. 실제로 나는 69년 닉슨. 박정희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후의 만찬장에 그 실크로 지은 옷을 입고 나갔다. 그걸 본 육여사는 크게 기뻐했다. 미국 장관 부인들도 내 옷이 좋아 보였던지 내가 한국에 갈 일이 있으면 실크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한. 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박정희가 뉴욕으로 떠난 후였다. 백악관 기자실에 있는데 존슨 행정부의 백악관 대변인 빌 모이아스가 "헤이 쥬리"하며 손짓을 했다. 따라가 보니 AP 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 로이터 통신의 해리 등 몇몇 기자들이 있었다. 빌 모이아스는 나를 포함한 기자들을 백악관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2층은 '리빙쿼터'라고 해서 대통령 일가의 살림집으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올라가 보니 시크릿 서비스(비밀경찰) 요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대변인이 "나 빌 모이아스다"라고 해도 "신분증을 내라"고 했다.
까다로운 확인을 거쳐 거실로 들어가니 존슨이 앉아 있었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박정희와의 회담이 뜻대로 잘 돼 신바람이 난 것 같았다. 그는 한국군의 월남 파병 문제에 대해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했다.
AP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가 먼저 물었다.
"월남에 한국군 전투부대가 가게 됩니까?"
존슨이 신이나서
답했다.
-"그렇소."
내가 물었다.
"간다면 병력 규모는? 그리고 한국군을 누가 지휘합니까?"
존슨이 답했다.
-"우리는 1개 사단을 원합니다.
한국군은 웨스트 모어렌드 장군(월남전 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갈 것이오."
내가 다시 물었다.
"박 대통령이 사단 병력 파병에 동의 했습니까?"
-"그렇소."
"그러면 기사 내보내도
됩니까?"
빌모아스 대변인이 막아섰다.
-"피피(PP - 박정희의 약칭)가 아직 미국에 있습니다. 그 기간 중에 이 건이 터지면
곤란합니다."
존슨이 모이아스에게 물었다.
-"그가 언제 떠나지요?"
빌이 답했다.
-"뉴욕에서 LA로 해서 하와이를 들러 가면 3일은
걸릴 겁니다."
존슨이 말했다.
-"쥬리, PP가 떠난 후에 내 이름 인용하지 말고 써주시오."
나는 물었다.
"백악관 고위 소식통을 인용하면 되겠습니까?"
존슨이 대답했다.
-"아니, 백악관도 빼 줘요."
나는 다시 물었다.
"지극히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고 하면?"
존슨이 찬성했다.
-"좋은 생각이오"
박정희가 미국을 떠난 후 나는 존슨과의 대화 내용을 기사로 썼다. 대부분의 미국 기자들은 국방성에서 브리핑 받은 대로 "한국의 의료부대, 태권도 교관, 공병대 등 비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될 것" 이라고 썼음은 물론이다. 백악관을 출입하는 미국 기자들의 코가 납작해진 사건이었다.
빌 모이아스가 특별히 나를 그 자리에 불러 준 것은 존슨의 지시때문 이었다. 존슨이 나를 배려해 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61년 4월 한국 기자로서 백악관을 출입하게 되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미국 기자들에게 뒤지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정.관계 인사들과 성실하게 교류하면서 인맥을 넓혔다.
처음 나에게 많은 미국 친구들을 소개해 준 사람은 오드리 코헨 뉴욕대 총장이었다.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을 수석 졸업한 재원으로 컬럼비아대 교수로 있던 50년대에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 때 나는 그녀의 통역을 맡았다. 그 인연으로 그녀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해졌다. 내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에 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미국 친구중 주요 정.관계 인사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케네디 행정부의 백악관 대변인 P.L 세런자는 그녀로부터 소개 받은 사람이다. 세런자는 내가 미국 민주당 내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주었다.
내가 미국 국회의원 중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은 미시가 출신의 매코믹 의원이었다. 61년 1월 케네디 취임식이 끝나고 열린 무도회에서 처음 알게 됐는데 그는 나중에 하원의장을 거쳐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직을 역임한다.
미국인들과 교우 관계를 갖는다고 해도 생일 파티에 초대될 정도가 아니면 친구라고 하기 힘들다. 매코믹 의원은 자기 집에 우리 가족들을 초대해 놓고는 자기가 만든 아이스크림을 들고 와 먼저 한 숟가락 떠먹고 그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내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숟가락 씻지도 않고 그냥 주나" 하면 "씻어야 하나?" 하며 웃곤 했다.
미국인들은 이를 '바디 바디(body body)라고 하는데 친밀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서 나는 많은 국회의원들을 알게
되었다. 먼저 소탈하면서 리버럴해 좋은 할아버지 같은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험프리 부부를 우리 집에 초대 했을 때 험프리 부인이 우리나라 전통 자수를 수놓은 쿠션을 보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쿠션의 스펀지를 빼 버리고 그녀에게 선물했다. 내 집에 있는 것보다 험프리 의원 집에 있는 편이 한국을 알리는 데 훨씬 효과적일 것 아닌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미네소타 출신의 돈 프레이저 의원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프레이저 의원의 아버지는 미네소타 대학 법학과 학장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텍사스촌 출신이었는데 그 부인인 레이디 버드는 텍사스 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했고, 기자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만 오스틴 텍사스 방송국을 가지고 있는 등 경제적 기반이 상당한 여성 사업가였다. 그래서 그녀는 기자들을 항상 잘 이해해 주었다. 존슨 부인을 우리 집에 초대해 불고기를 대접한 일이 있는데 그가 벽에 걸려 있던 청전 이상범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이것은 코리아의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다. 서양화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우리 동양의 깊이가 있다. 당신이 그걸 아는 것 같아 기쁘다. 당신에게 선물하겠다."
한번은 레이디 버드가 백악관 2층 거실에 진열되어 있는 골동품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쥬리, 이건 타이완의 장개석이 준 것인데 진짜일까요?"
"중국 사람들은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게 특기예요. 중국놈들 주는 것 치고 진짜는 없어요."
존슨 부인은 나중에 "감정해 보니 정말 가짜라고 해요" 해서 함께 웃은 일도 있었다.
내가 존슨 부부를 좋아한 것은 단지
취재원으로서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존슨은 미국 국내적으로 본다면 나름대로 평가해 줄 만한 사람이었다. 케네디는 프론티어 정신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나 미완성의 상황에서 죽었고, 그가 못 다한 흑인들의 인권 문제등을 제도적으로 마무리한 사람이 바로 존슨이었다.
또한, 존슨 부인은 대통령 부인이 되면서 "일하는 퍼스트 레이디"가 되겠다고 역설한 대로 5년 백악관 생활 동안 '가난 퇴치운동'과 '도시미화 운동'을 열심히 전개했다.
워싱턴에는 '미국을 아름답게'라는 슬로건 아래 '도시 미화 위원회가 조직 됐고, 레이디 버드를 비롯한 미화위원들은 총 20만 마일에 걸쳐 미국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직접 나무 심기도 하고 시민들이 이 운동에 참가하도록 격려하기도 했다. 레이디 버드는 워싱턴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전 미국을 순회하면서 국립공원의 숲가꾸기는 물론 고속도로 주변에 심는 나무에서부터 가정집 울타리로 심는 수종에 이르기까지 나무와 숲을 가꾸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여행을 떠날 때면 존슨 부인은 나에게 함께 가기를 권하곤 했다. 미국 기자들 역시 힘 있을 때는 아부하고 권좌를 떠나고 나면 냉정하게 돌아서는 속성은 마찬가지다. 예술가 같은 기질의 재클린 케네디와는 달리 대통령 부인이 되기 전에 상당한 규모의 기업을 끌어 온 기업가였던 그녀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 이해관계 없는 외국인이면서 솔직한 충고를 잘 하는 내가 편했을지 모른다.
존슨이 월남 파병 문제를 발표하면서 빌 모이아스를 시켜 나를 부르게 한 것은 한국 신문에 이 사실을 발표해 파병을 기정사실화 할 상황적 필요도 작용 했겠지만 이 같은 인간적 신뢰의 영향도 컸던 것이라 생각한다.
66년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수행기자로 서울에 들어왔다. 나는 그 때 다시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있었다. 그 때 나는 돈암동 언니 집에 묵었는데 육영수 여사의 비서 나은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기자님, 우리 사모님이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청와대로 좀 들어오실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점심 먹다가 잠시
인사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육여사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까지 찾아 들어가는 일은 영 내키지 않았다. 상대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독재자의 부인이고, 나는 태초부터 그 정권을 맹렬히 비판해 온 정치부 기자가 아닌가. 육 여사가 나를 부르는 데는 같은 여성인 그가 나서서 남편에 대한 비판을 완화해 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었다.
나는 나은실에게 대답했다.
"취재 일정이 너무 바빠서 못 가겠습니다."
사실 상당히 바쁘기도 했다. 그래도 나은실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모님께서 꼭 문 기자님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싶어 하시니 좀 들어오시지요."
그녀가 계속 강권하기에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내가 그 분 보좌관이오?"
안되겠다 싶었던지 나은실이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육 여사가 직접 전화기에 나왔다.
-"문 기자님, 좋아 하시는 조개
된장국 끓여 놓을테니 오세요. 우리 같이 점심 먹어요."
하는 수 없이 나는 취재 일정을 마친 날 청와대로 갔다. 가보니 육여사의 접견실은 온통 핑크색이었다.
"이 방이 원래 이렇게 온통 핑크색입니까?"
-"아니에요. 미시즈 존슨이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번에 핑크룸으로
바꾸었어요."
대통령들이 정상회담을 갖는 동안 퍼스트 레이디끼리는 티모임을 갖는다. 그 때 이 방에서 차를 마실 존슨 대통령 부인을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핑크색 벽지를 새로 발랐다는 얘기였다. '참 세심한 여성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찔러 보았다.
"청와대에 오래 계실랍니까?"
육 여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게 어디 우리 집입니까?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만 거처하는
곳이지 이곳은 영원한 우리 집이 아닙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육여사는 얘기 중에 존슨 대통령 부부의 숙소인 워커힐 호텔 에메럴드 하우스 앞에서 있었던 소동에 대해 묻기도 했다.
"김현철 주미대사 부인이 장총리(장기영)에게 여러 사람들 앞에서 '팬티를 벗으라'고 고함을 쳤다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육여사는 어찌 그런 상스러운 언행을 했을까' 하는 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말했다.
"누가 그렇게 보고를 했습니까? 김 대사 부인이 언성을 좀 높이긴 했지만 팬티 벗으라는 소리는 한 적이 없어요."
-"나는 그렇게
들었어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 의전상 주미대사가 따라다니며 영접을 해야 하는데 환영위원장을 맡은 장기영 부총리가 행사 때마다 매번 김현철 대사를 따돌리고 대통령을 따라나섰던 모양입니다. 그래가지고야 현지 대사가 면목이 서질 않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업무에 지장이 많지요. 김 대사는 원래 점잖은 분이라 그런 처사에도 묵묵히 말이 없는데 부인이 원래 괄괄한 분이거든요. 참다못한 미시즈 김이 에머럴드 하우스 앞에서 장기영 씨에게 '주미 대사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대사가 현지에 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엿을 먹이는 거요? 이런 식으로 하려면 부총리로서 차라리 웃통을 벗으세요!' 하고 소리친 겁니다."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장기영씨가 좀 심했어요. 장기영 씨가 하도 존슨 대통령 옆에 붙으니까 대통령 부인 비서실장 엘리자베스 카펜터가 존대도 안 하고 '헤이 유, 나가, 저쪽으로' 하고 소리친 일도 있어요. 그 여성은 존슨도 두 손 번쩍 들 정도로 괄괄한 사람입니다."
사실 장기영은 능히 그럴 만한 인물이었다. 한국일보 사옥에 불이 났을 때 갑자기 소방수 손에서 소방호스를 뺏어 쥐고는 "야, 사진 찍어! 사진 기자 없어?" 하고 소리 쳤다는 인물이니 말이다.
육여사는 내가 일어서려고만 하면 버튼을 눌러 "차 좀 가져오세요" "수박 좀 가져 오세요" 해가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보니 이날 저녁 나는 박정희 가족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박정희 부부와 근혜, 지만이 참석했다. 둘째 딸 근영은 외부 손님이 오면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박정희는 식사하는 모습도 특징적이었다. 육여사는 현모양처답게 식사시간 내내 "여보, 이것 좀 드셔 보세요. 건강에 좋대요. 저것도 드셔 보세요. 맛이 괜찮아요" 하며 그저 남편을 챙기느라 자신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한 번은 청와대에서 식사하는데 스파게티가 나온 일이 있었다. 나는 육여사에게 말했다.
"요리사들이 스파게티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데 뭣 때문에 이런 음식을 합니까?"
-"그 분이 워낙 고기를 잘 안
드셔서요. 미트 소스로 해서 섞어드리면 좀 드실까 해서 해 봤어요."
그러나 현모양처의 이 같은 권유에도 박정희는 아무 소리 없이 큰 대접에다 밥과 반찬을 붓고 쓱쓱 비비더니 밥을 떠먹는데 그것도 숟가락을 이빨로 긁어서 먹는 것이었다. 아마 그가 어린애 였다면 "복없게도 먹는다"고 어른들에게 야단깨나 맞았을 것이다. 아들 지만은 저녁 식사가 그저 우유 한 잔으로 끝이었다.
안주인의 성품 때문인지 식탁은 진수성찬은 아니었으나 건강식이었다. 나는 식탁에서 듬뿍장을 발견하고 매우 반가웠다.
"어머, 딩기장이 있네요."
육여사가 내게 물었다.
-"딩기장이라니요?"
"햇보리로 만든 듬뿍장을 우리 고향에서는 딩기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박정희가 불쑥 말했다.
-"경상도 사람 아니면 그 맛을 모르지."
육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통하시네요."
밥을 먹으면서 나는 그들 부부에게 말했다.
"이 나라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촌지만 주면 없는 사실도 있는 사실로 만들어 조우찡(촌지를 받고 사실과 다르게 우호적으로 써 주는 기사)이나 써대니...
[경향신문]도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어요."
사실 나는 그 때 [경향신문]이 박정희의 것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육여사가 말했다.
-"조우찡 기사도 경우에
따라서는 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경향신문]도 [서울신문] 같이 되면 저는 특파원 그만 둘랍니다."
그 때까지 식탁에 앉아 있던 근혜가 자기 어머니에게 물었다.
-"조우찡이 뭐예요, 엄마?"
나는 "근혜야. 너도
그 정도는 알아둬야지" 하며 근혜에게 조우찡과 촌지의 뜻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육여사가 말했다.
-"근혜야, 이제 그만 올라가서 자거라."
근혜가 올라가고 난 후 박정희가 나에게
말했다.
-"문기자님 조국에 돌아와서 일하실 생각 없습니까? 여성 외무장관 한번 하시면 어떻습니까?"
"장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시키시지요."
그러자, 박정희는 '주일 대사는 어떠냐, 유엔 대사는 어떠냐' 하더니 심지어 '경북 도지사 해볼 생각이 없는가' 하는
소리까지 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취재수첩을 식탁위에 꺼내놓고 말했다.
"저는 평생 기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박정희는 신탄진 담배 한 가치를 뽑아 입에 물더니 불을 당겨 길게 한 모금 내뿜었다. 한 인간으로서 박정희에게는 분명 소박한 데가 있었다. 그는 그 날 잠바 차림으로 나타났다. 대화중에도 자기를 과시하며 으스대는 법이 없었고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을 들으면 면구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었다.
약간 어색해 하면서 씩 웃는 수줍은 웃음은 그의 최대 매력이라 할 것이다. 그처럼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순진한 미소를 띄울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나는 이 날 식사 초대에서 박정희에게 '대통령 각하'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를 부를 때는 주로 '보이소'
또는 '으요, 으요' 했다. 그랬더니 박정희가 말했다.
-"거 수십 년 만에 으요, 으요, 소리 듣네."
육여사가 남편에게 물었다.
-"으요, 으요가 뭐예요?"
-"경상도 사람 아니면 이해를 못해."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면서도 대중 앞에 서면 박정희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 내성적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독종. 이것이 내가 관찰한 인간 박정희의 면모였다.
66년 존슨 방한 때 참으로 웃지 못 할 소동이 하나 있었다. 당시 백악관 수행 기자 중에는 UPI 통신의 메리멈 스미스라는 기자가 있었다. 스미스는 달라스 텍사스에서 케네디가 암살 됐을 때 세계적인 특종기사를 날렸던 기자다.
당시, 대통령 차 바로 뒤에는 미국의 양대 통신사인 AP와 UPI의 차가 따라가고 있었다. AP 기자는 더글러스라는 영감이었다. 원래 AP와 UPI는 기사 쓰는 스타일이 다르다. AP가 사건의 배경에서부터 주변 스케치까지를 상세하게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으면서 점차 파고를 높여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적인 사실을 전하는 스타일이라면 UPI는 제목으로 뽑힐만한 핵심적인 사실부터 말해 놓고 이후 중요한 순서대로 뉴스를 전하는 스타일이다.
암살 현장 부근에는 공중전화가 단 한 대 밖에 없었다고 한다. 더글라스 영감이 먼저 수화기를 집어 들고 미주알고주알 기사를 부르기 시작하자 뒤에서 기다리던 메리멈이 코카콜라 병으로 영감의 머리를 쾅 때렸다고 한다. 깜짝 놀란 더글라스 영감이 수화기를 놓치자 그 수화기를 낚아 챈 메리멈은 UPI에다 다음과 같이 외쳤다.
-"케네디 대통령이 피격됐다. 재클린 여사는 '안 돼' 라고 소리쳤다."
(President Kennedy shot, Jakey
said 'Oh, no!')
이 때 'Oh, no!'는 미국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문장이다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재클린이 외치는 외마디 비명은 아무리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라도 타민족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것이다. 이 문장이야 말로 메리멈 스미스 기자의 세계적이 특종이었다.
존슨 방문 때 대통령 일행과 수행 기자들은 워커힐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내 방에 매리멈 스미스가 전화를 걸어 외쳐대는 것이었다.
-"헤이 쥬리, 헬프 헬프, 네 도움이 필요해!"
"왜 그래? 어느 놈이 널 잡으로 왔니?"
-"아니,
여자가 들어와서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간다. 제발 도와줘!"
나는 매리멈의 방으로 갔다. 세상에 맙소사. 웬 콜걸이 메리멈의 방에 들어와 앉아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이 사람이 필요 없다는데 왜 안 나가고 괴롭혀요?"
-"이분들 즐겁게 해드리라고 돈을 벌써
받았거든요."
"뭐요? 누가 아가씨한테 그런 일을 시켰어요?"
알고 보니 홍종철 공보부 장관의 짓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이 방해 된다고 나가 달라니 가면 될 거 아니에요?"
-"복도에서 사람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금방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양말이라도 빨아드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복도를 내다보니 과연 중앙정보부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슬렁대고 있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다음 날 홍종철 공보부 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홍장관 ,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 여자를 붙여요?"
홍정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 이라며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 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또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모르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바로 나의 조국이라니.
65년 박정희 . 존슨 회담 이후 한국 국회에서는 전투부대 월남파병 동의안이 여당 단독으로 통과 됐다. 그 후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가 줄줄이 월남으로 떠나면서 박 정권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로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미국은 미국대로 미군의 3분의1 수준의 급료로 월남전에 투입할 수 있는 용병인 한국군의 존재가 반갑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남 특수'는 우리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피 묻은 돈이었다. 국내에 반대 여론이 없을 수 없었다. 이래저래 한미 간에는 월남 추가 파병 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었다.
67년경으로 기억된다. 나는 국무성 차관보 윌리엄 반디의 방에 갔다. 비서에게 물었다.
"있어?"
-"예"
나는 반디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들어가 보니 반디는 팔짱을 끼고 칵테일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고 있었고, 김현철 주미 대사는 그 발바닥을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월남전에 부대를 더 파병할 용의가 있다."
-"그게 당신 개인 의견이냐, 정부
의견이냐?"
한마디로 주미대사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었다. 대사가 만나봐야 차관보급이다. 서울의 주한 미 대사는 청와대를 제집처럼 드나들지 않는가. 월리엄 반디는 나를 보더니 "아임 소리" 하면서 다리를 내렸다. 나는 화가 솟구쳤다.
"대사님은 구두 밑바닥을 쳐다보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 나서 반디에게 쏘아 붙였다.
"룩(Look)!"
원래는 '미스터 세크러터리' 해야 하지만 나는 구두 밑바닥 때문에 흥분해 있었다.
"동양에서는 칵테일 테이블에다 다리
올리고 사람 만나는 법은 없어!"
대사관에 와서 김현철 대사는 '문기자가 그렇게 말해서 속이 시원했다' 고 했다. 그러나 내 속은 시원하지 않았다. 김현철 대사는 내성적인 성격에다 무슨 말을 해놓고는 "이건 정말입니다" 하고 덧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종종 "그럼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까?" 하고 그를 놀리곤 했다.
그러나 반디가 주미 대사를 업신여기는 현장을 본 그 날 만큼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대사님, 외교관이신데 담뱃진이 그렇게 이에 시커멓게 눌어붙어서야 되겠습니까? 스케일링 좀 하세요."
김현철 대사의 답이 걸작이었다.
-"거 꼭 해야 됩니까? 시간이 없어서... 이건 정말입니다."
월남전이 한창 악화일로를 치닫던 68년 4월 1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박정희.존슨 회담이 개최 되었다. 그 당시 미국에선 월남 전쟁 반대의 소리가 날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이 정상회담은 존슨의 요청으로 열렸다. 월남에 추가 병력을 파병해 달라는 것이 존슨의 의도인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나는 당시 [경향신문] 주미 특파원으로 존슨 대통령을 수행해 정상회담 전날인 4월 17일 하와이에 도착해 존슨 대통령의 일정을 취재한 다음 미국 측 일행들과 함께 공항에 가서 박 대통령의 일행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청와대 출입기자 등 40여 명이 온다고 했다. 이 정보를 듣고 미국의 양대 전신회사 RCA와 ITT사 측에서는 제각기 한국 기자들이 자기네 시설을 사용하도록 손님을 유치하기 위한 준비에 분주했다. 양사는 기자들이 묵을 호텔 프레스룸에 텔렉스 시설과 수십 대의 타이프라이터를 마련해 놓고 한국 기자들을 위해 하와이 한인교포 여성이 내게 물었다.
-"한국 기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저는 한국 기자들을 위해 ITT사에서 채용한 통역자 입니다. 이번에 한국 수행기자들이 40명이 넘는다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제 임무는 한국 기자 분들이 될 수 있으면 ITT 텔렉스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기자 분들의 편의를 위해 리무진을 10대나 마련해 놓고 무료로 이용하시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나는 당시까지 미국에서 18년간 기자 생활을 했지만 전신 회사 측에서 기자들을 이렇게 극진하게 대접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우리 교포시니 도와 드리겠습니다. 워싱턴에서도 보면 RCA와 ITT 두 회사의 텔렉스가 항상 프레스룸에 같이 설치되어 있는데 기자들은 언제나 기사를 빨리 송신해 주는 텔렉스를 사용합니다."
그 중년 여성의 우리말은 마치 이승만이 8.15 직후 환국했을 때의 발음을 연상하게 했다. 그래도 40대에 접어든 한국인 2세가 우리말을 잊지 않고 그만큼 한다는 것이 기특하다는 생각에 나는 한국 수행 기자들의 생리를 좀 더 설명하면서 너무 기대하지는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이야기 하는 동안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모두들 공항 건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중년 교포여성은 "하와이 기후는 이맘때면 청천벽력처럼 소나기가 확 퍼붓다가 곧 언제 비 왔냐는 듯이 활짝 개인다"면서 '이런 일이 하루에 몇 번씩 있다' 고 했다. 곧 그녀가 말한 대로 해가 나기 시작했다. 이 때 박정희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환영 영접식이 간단히 끝난 다음 존슨 대통령은 회담장소 겸 숙소인 록펠러 일가의 별장으로 갔고, 박정희 일행은 카하라 힐튼 호텔로, 한국 기자들은 프레스 센터가 있는 '이리가이 호텔'에 가서 각각 짐을 풀었다. 존슨 수행원들과 미국 측 기자들도 이 호텔에 묵었다. 박정희 일행이 묵은 카하라 힐튼은 와이키키 해변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은 하와이 최고의 호텔이었다.
특히, 이곳은 일류 불란서 요리사들을 두고 식도락을 즐기는 손님들을 즐겁게 했기 때문에 항상 세계 갑부 손님들로
초만원이었다.
이리가이 호텔 프레스룸에 들어가니 한국 수행기자들은 하나도 없고 미국 기자들은 '도착.전망' 기사 쓰기에 바빴다. 나 역시 기사를 쓰고 있는데 조선일보의 선우연 기자가 와서 말을 걸었다.
-"문 선배, 한국서 수행온 우리 기자들은 대표를 선정해서 그를 통해 일괄해서 보내기로 되었습니다만, 이것만은 내가 별도로 특종기사를 보내야 겠는데 영역하는 걸 좀 도와주십시오."
"무슨 특종 기사인데요?"
그가 내미는 기사 내용을 보니 기가 막혔다.
-"하늘도 박대통령을 알아보는지 박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착륙 하자마자 소나기가 멈추고 햇빛이 비치면서 그를 환영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 봐요. 요즘 하와이 날씨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비가 왔다 해가 났다 한대요."
선우 기자의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한국 독자들이 하와이 일기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는 '이 기사는 저 혼자 보내는 것이나 딴 기자들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 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렇게나마 기사를 보낸 사람은 40여 명의 수행기자 가운데 선우 기자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한국에 발송된 기사는 청와대 수행 기자단 중에서 당번을 맡은 기자가 국제 전화로 청와대 기자실에 대기 중인 서울 당번에게 불러주면 그가 그것을 받아써서 각 사에 배부하고, 각 사에서는 그 기사를 각 사 스타일로 다시 써서 수행기자의 이름을 달아 싣는 식이었다.
박정희가 65년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각 신문사 기자들은 제각기 기사를 보냈었다. 이런 전례가 있었고, 또 세계 어느 나라 언론이라도 기자라면 각자 자기가 취재한 기사를 보내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에 RCA와 ITT 두 회사에서는 그런 거창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68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두 전신회사는 내내 허탕만 치고 말았다.
4월 18일 미국 대재벌의 하나인 로렌스 록펠러 씨의 하와이 별장에서 박정희. 존슨 회담이 열렸다. 회담장 주변에는 존슨
대통령 경호원들과 1백여 명의 주정부 경찰관들이 동원되어 철저한 보안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백악관 측은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별장 입구에 특별 전화를 가설했다.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에 파견 근무 중이던 한 KBS 아나운서가 이 전화에 대고 방송하는 보도 내용을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4월 18일 오전 10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앞선 4월17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하와이에 도착 했을 때 30만 시민이 손에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을 환영했습니다..."
하도 기가 차서 그에게 쏘아 붙였다.
"이거 봐요. 어쩌면 그렇게 거짓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그는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떡합니까? 그렇게라도 해야지. 기사 보낼 것이 뭐 있어야지요."
이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KBS 중계 전파를 타고 한국 국내 청취자들에게 전달되었음은 물론이다.
4월 18일 회담에서 존슨은
비공개리에 박정희에게 월남전에 추가 병력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우리 기자들은 그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이 부분은 비공개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확증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회담이 끝난 후 이 사실이 한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정보를 한국 언론에 흘린 주범은 미국 공화당측 인사로서 타이완의 로비스트인 엔나 셰놀트였다. 그녀는 당시 미국 내의 반전 무드에 편승해 존슨에게 타격을 주어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과 친한 정일권에게 존슨의 추가병력 요청 사실을 흘렸던 것이다.
그 날 저녁 필자가 이리가이 호텔 프레스 룸에 있는데 박정희의 경호실장 박종규가 쪽지를 보내 왔다.
-"PP(박정희)가
꼭 만나고 싶어 하니 오늘밤 8시까지 카하라 힐튼 호텔로 와 주시기 바람."
이참에 월남 추가 파병 여부를 확실히 캐야겠다 싶었다. 그 시간에 힐튼에 갔더니 박종규가 마중 나왔다.
-"아, 문
기자님, 이리 오십시오."
박종규는 나를 박정희에게 데리고 갔다. 나는 돌아나가는 박종규를 불러 세웠다.
"이거 보세요. 기념이니 사진 하나 찍어 주세요."
박정희와 함께 찍은 그 사진을 나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
박박 찢어 버렸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문 기자는 존슨이 진짜 추가 병력을
원하고 있다고 봅니까. 우리가 병력을 보내 주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나는 답했다.
"존슨이 추가 병력 파견을 원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와 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전망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나는 이야기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회담 마치시고 하와이 교포들을 만날 때 닥터 윌바 최를 꼭 만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이 곳 유지인데 4.19이후 승만 리가 하와이로 도망 올 때 전용기를 보내 데리고 와서 끝까지 돌봐 준 사람입니다."
나는 특파원 생활 초기인 60년대 초반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교포 곽 노인으로부터 구한말 영국인 노예 상인들에 의해 하와이로 팔려왔던 교포들의 애환에 대해 들은 일이 있었다. 영국인들은 교포들을 사탕수수 농장에 팔았고, 그들은 한 달에 여자는 10달러, 남자는 15달러 정도의 월급을 받고 일했다. 그러다 총각 귀신이 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제하에서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며 하와이에서 활동했을 때 사탕수수밭에서 고생해서 번 돈으로 그를 지원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승만은 그들에게 공채를 팔기도 했다. 100달러짜리와 10달러짜리가 있었다. 곽노인은 나에게 문제의 공채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조선이 독립되면 이 국채를 금화로 바꾸어 준다. 이승만, 김규식" 이라고 한글과 영어, 한자로 씌어 있었다. 나는 물었다.
"그래서 해방 후에 승만 리가 이 공채를 바꾸어 줬나요?"
곽 노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사람 봐서 바꾸어 주었어요. 이승만을 지지한 국민회 사람들에게는 하와이 총영사가 공채를 모두 달러로 바꿔 줬는데 나 같은 안창호 선생 계열 사람들은 달러는커녕 FBI에다 공산당이라고 찌르는 바람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곽 노인은 금고를 열더니 100달러짜리 공채들은 자손에게 줘야 한다며 10달러짜리 공채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존슨 부인, "전 세계 퍼스트레이디 중 육 여사가 최고"
68년 말 존슨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퇴임을 며칠 앞두고 미시즈 존슨의 비서실장 엘리자베스 카펜터가 나를 불렀다.
-"미시즈 존슨이 이것을 쥬리에게 주라고 했어."
그것은 자개로 대통령 휘장을 꾸민 나전칠기 상자에 들어 있는 사진첩이었다. 67년 존슨 방한 때 육영수 여사는 미시즈 존슨이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들을 '사진첩'으로 꾸며 선물했던 모양이었다. 미시즈 존슨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그것을 나에게 선물하고 고향인 텍사스로 돌아갔다.
미시즈 존슨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육여사를 '가장 완벽한 퍼스트레이디'라고 극찬했다.
"나는 세계 각국을 방문해 각국 퍼스트레이디들의 접대를 받아 봤지만 한국의 미시즈 박이 최고다. 그녀는 내가 폐경이 되자 않았다는 것까지 미리 알아보고 숙소인 워커힐 호텔 에메럴드 룸 내 방 서랍에 경도대까지 준비해 놓았다."
나중에 청와대에서 육여사를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미시즈 존슨이 왔을 때 경도대까지 준비해 놓으셨다던데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어요? 미시즈 존슨은 나이도 많은데."
육여사는 말했다.
-"나이 50이 넘어도 나오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미시즈 존슨이 그렇게
썼어요."
69년 박정희는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3선 개헌과 장기 집권은 야당만 반대한 게 아니었다. 공화당 안에서도 박정희의 후계를 노리던 김종필계는 3선 개헌에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박정희는 김종필 후계구도 준비를 위해 김종필 계가 결성한 '국민복지회'를 빌미로 삼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김종필계 엄단을 지시했다. 이로써 김종필계는 중정으로 연행돼 혹독한 대접을 받은 끝에 모두 공화당에서 제명 됐고, 김종필 자신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공화당 내의 반대파는 평정됐지만 6월부터는 학생들의 3선 개헌반대 데모가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내적으로는 김형욱이 돌격대장이 되어 학생 데모를 물리력으로 진압하고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등 3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를 준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이후락 비서실장이 주동이 되어 박정희. 닉슨 간의 한. 미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국민들의 3선 개헌 반대 여론을 '미국의 지지'를 빌어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69년 6월 김동조 주미대사는 한. 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백방으로 외교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측도 박정희의 의도를 이미 환히 알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 학생들이 치열하게 전개하는 3선개헌 반대 데모가 전 국민적 공감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급해진 박정희는 3선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국회와 국민을 협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회담은 닉슨 행정부가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전폭 지지한다는 인상을 줄 것이 틀림없었다. 닉슨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우방국이며 특히 월남 참전국인 한국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표면적인 의제로 내세워 만나자는데 닉슨으로서는 그를 만나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닉슨은 자신의 선거 공약에 따라 아시아에서 미군을 철수 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밝히고 있었다. 그의 유명한 '닉슨 독트린'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2만 명의 미군이 철수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으면 북한이 오판할 우려도 있었다. 닉슨으로서는 박정희를 설득해 자신의 공약대로 미군을 무리 없이 철수해야 한다는 과제도 떠안고 있었다.
결국, 워싱턴 당국은 한.미 정상 회담을 열 되 서울측이 요청한 워싱턴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 회담을 갖기로 결정했다. 서울측은 백악관에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데만 고무되어 준비에 바빴다. 회담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의 '샌클라멘테 백악관'이라 불리는 닉슨의 저택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회담 장소는 샌클라멘테 백악관도 아닌 세인트 프랜시스라는 호텔이었다. 정상회담이 호텔에서 열린 것은 사상 유례 없는 일이었다.
미국 측은 한.미 정상회담 장소를 '백악관' 이란 지명이 전혀 붙지 않은 일반 호텔로 격하시킴으로써 미국이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전폭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한.미 양국 국민에게 애써 남겨 놓으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측은 일단 한.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만 하면 언론을 이용해 미국이 3선개헌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식으로 전 국민에게 선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호텔 정상회담'을 이의 없이 수용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69년 8월 21일~23일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이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열렸다. 필자를 비롯한 워싱턴 주재 각사 특파원 5명은 회담 시작 전날 현지에 도착, 서울서 수행한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 합류해 취재하게 되었다.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에서도 "수십만 시민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박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거짓 보도는 KBS 기자에 의해 재연되었다. 회담 기간 중 샌프란시스코 하늘에 나부낀 태극기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 건물 정문 입구에 하나, 거기서 좀 떨어진 한 호텔 국기 게양대에 하나 해서 총 두개였을 뿐이었다.
이 호텔에는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 측에서 전세버스로 동원한 30여 명의 교포들이 묵고 있었다.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 앞 공원은 수백 명의 월남전 반대 데모 군중들의 고함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들은 '미국 고용병의 왕초 박정희는 물러가라' 는 플래카드를 들고 북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장면 정권 때 유엔 대사를 지낸 임창영 박사와 그의 부인,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한복을 입고 나와서 북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원 코리아 예스! 투 코리아 노!"
2백여 명의 재미 교포들은 박정희에게 "삼선 개헌을 반대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그 사실은 [뉴욕타임스]에 보도 되었다. 나는 정상회담 기사에 곁들여 이 사실도 스케치해 보냈지만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보니 데모 대목은 실종되고 없었다.
한국 기자들이 기사를 보내는 방법은 하와이 박정희.존슨 회담 때와 똑같았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 거의 전원이 따라왔는데도 기사를 보내는 것은 당번 기자 한사람뿐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있었던 만찬회장에서도 백악관 공보실측은 한국 기자들로 인해 한바탕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당초 백악관 측에서 발표한 만찬회 참석 풀(Pool) 기자 명단에는 5명의 미국 기자와 1명의 한국기자(필자)만이 들어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청와대 기자단과 다른 주미 특파원들이 한숙 한국 공보관장에게 자신들도 만찬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한숙 관장은 백악관 측에 간청해서 어렵게 5명의 한국 기자들의 좌석을 마련했다. 한숙 공보관장은 만찬에 참석하게 된 한국 기자들이 턱시도를 빌리는 것까지 주선해 주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만찬회장에 가보니 한국 기자단 중에서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신아일보] 기자 한 사람뿐이었다. 신아일보 기자에게 "왜 혼자 왔는가"라고 물었더니 "내가 만찬회 담당 풀 기자로 선정되어 혼자 나왔다" 면서 "다른 기자들은 시내로 쇼핑 나갔다"고 했다. 추가 좌석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썩였던 백악관 공보실 관계자들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상상에 맡긴다.
만찬회에서는 먼저 초청국측 대통령이 인사말과 토스트(축배의 말)를 한다. 그 후 초청된 나라 대통령이 답사를 겸한 인사말을 한다. 식사가 끝나면 다른 방으로 이동해 '애프터 디너 드링크' 혹은 커피잔을 들고 담소한다. 이야말로 기자들이 양측 대통령 부처 및 각료들과 어울려 담소할 수 있는 시간이므로 특별 취재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 날 밤 만찬회에서는 육여사가 기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육여사는 패트리셔 닉슨 여사를 비롯해서 만찬회에 참석한 미국측 손님들 그리고 백악관 출입 미국 기자들의 질문에 재치 있게 답변했다. 육여사가 자신의 의상에 대해 설명한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곳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오렌지 산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장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바탕에다 오렌지 무늬를 수놓은 옷을 지어 입고 왔습니다."
과연 육여사가 입은 한복은 연한 오렌지색 바탕에 오렌지 무늬를 수놓은 것이었다. 닉슨 여사는 "당신의 훌륭한 아이디어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감탄했다. 다음 날 아침 필자는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는 것 같아 호텔 지하의 드럭스토어 (약과 화장품 등을 파는 상점)로 내려갔다. 그런데 여점원이 나를 보자마자 손을 저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팬티호스(여자용 스타킹)와 두바리 콜드크림은 이제 없습니다.(노 모어 팬티호스, 노 모어 두바리 콜드크림)"
"무슨 소리 하는 거요? 팬티 호스는 뭐고, 콜드크림은 또 뭐예요?"
-"당신은 한국서 온 손님 아닌가요? 어제 한국 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우리 상점에 있는 팬티호스와 콜드크림들을 모두 사 갔는데 그 후에도 다른 분들이 와서 계속 달라고 해서요. 손님도 그걸 구하러 온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기자단이 와서 모두 쓸어 간 것이었다. 그들은 호텔 상점만이 아니라 그 주변 상점까지 싹 쓸어 버렸다고 했다. 나중에 팬암 항공 직원에게 들으니 이후락 비서실장이 팬암 항공에 몇 만 달러를 주고 빌린 박 대통령 전세기가 중량 초과로 예정보다 3시간이 지나도록 뜨지 못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수행기자, 경호원 할 것 없이 텔레비젼.냉장고까지 사서 전세기에다 실었기 때문이었다.
이틀간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이 끝난 후, 박정희 일행은 미국 서부의 유명한 휴양지 요세미티(Yosemite) 국립공원에서 2일간 휴식한다고 했다. 숙소는 요세미티 아와이 호텔이었다. 나와 동화통신 한창섭 특파원은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자동차를 빌려 타고 지도 한 장에 의지해 꼬불꼬불한 산길을 8시간 동안이나 번갈아 운전해서 요세미티란 곳으로 찾아갔다. 자동차 안에서 한창섭은 갑자기 말했다.
-"제가 이번에 보지 말아야 할 남의 비밀 수첩을 봤습니다."
남의 비밀 수첩이라는 바람에 궁금해진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수첩을 봤는데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우리 회사 기자가 책상 위에 놔 둔 수첩을 우연히 봤는데,
각처에서 받은 촌지 명단과 금액이 적혀 있지 뭡니까? 이번에 청와대 출입 기자들 엄청나게 받았더군요."
"어느 놈들이 그렇게 엄청나게 줬는데?"
-"김성곤 2천 불, 이후락 1천 불, 강상욱 대변인 5백 불, 공화당 모
국회의원 3백 불, 모 기업 사장 5백 불 이런 식으로 적혀 있는데 심지어 모 야당 의원 이름까지 있더란 말입니다. 모두 합쳐보니 8천 불에서 1만 불은 되겠던데요? 이번에 따라온 기자들이 모두 그럴 테니 기사를 제대로 쓸 수가 있겠습니까?"
1만 불이라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상점을 싹쓸이한 돈이 여기서 나왔구나 싶었다. 한국 언론계가 이렇게 썩고 있었다. 약삭빠른 야당 국회의원들이 박정희와 자주 접촉할 수 있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구나 싶기도 했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촌지 문제로 한창섭 기자와 열을 내서 떠들면서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다가 나는 그만 경찰에 걸리고 말았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 워싱턴에 돌아가 법정에 출두하기로 하고 그에게 아와이 호텔 위치를 자세히 물어 달려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훨씬 넘었다.
가보니 한국서 수행한 수십 명의 기자중 서울신문 이양 기자 단 한사람만이 풀 기자로 선정되어 아와이 호텔에 와 있었다. 사실 풀 기자 한 명으로 충분했던 서울측의 심정도 모르고(?) 우리 두 사람이 들이 닥친 것이었다. 우선 숙소부터 문제였다. 아와이 호텔은 방이 너무나 부족해서 김용식 주유엔 대사나 백선엽 주캐나다 대사도 근방 야영장에 유숙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육여사의 비서인 나은실의 방 번호를 알아 가지고 문을 두들겼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반겨 주었다. 그 방은 나은실과 육여사의 미용사로 따라온 여성 두 사람이 묵는 방이었는데, 침대 두 개를 붙여서 셋이 함께 자기로 했다. 한창섭은 이양 기자 방에 얹혀 자기로 해서 숙소 문제는 해결 되었다.
가지고 간 타이프라이터와 손가방을 놓고 방을 나섰다. 정도순 LA 총영사 부인이 호텔 주방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도록 교섭해서 현지의 한국 요리사들을 동원해 박정희가 좋아하는 비빔밥을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노발대발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때는 푹푹 찌는 삼복인데 호텔에 에어컨이 없어서 박정희는 펄펄 뛰고 이후락은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비행기 타고 다른 호텔로 옮겨 가자" 고 했던 모양인데,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었다. 전세기라 해도 스케줄에 따른 이동 시간에만 제공되는 것이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행기는 다른 비행에 투입 됐다가 전세 승객이 움직일 때 돌아온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박정희로서는 타고 옮길 비행기가 없다니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궁금해서 호텔 매니저에게 물었다.
"이런 일류 호텔에 왜 에어컨이 없습니까?"
-"우리 호텔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자연을 즐기러 오시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저희 호텔은 일체의 인공적이 시설은 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한여름이라 해도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합니다. 손님들은 낮에는 모두 등산이나 삼림욕을 즐기시고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시기 때문에 에어컨의 필요성을 거의 못느끼십니다."
그러고 보니 호텔 뒤쪽은 산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고, 손님들도 대부분 등산객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산에서 다치는 사람도 많은지 호텔 주위에는 접골원도 여러 곳 눈에 띄었다. 그런 중에도 박종규 경호실장은 김동조 주미대사와 포커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동조가 박종규에게 일부러 잃어주고 있는 눈치였다. 그 때 나은실이 와서 육여사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육여사 방에 갔더니 박정희도 앉아 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오다가 고속도로에서 경찰에 걸려 늦었다"고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박정희가 말했다.
-"순사도 문 기자에게 걸렸으니 혼났겠구먼."
나는 세이트 프랜시스 호텔 드럭 스토아에 팬티호스와 콜드크림 동난 얘기를 하고 나서 따졌다.
"왜 출입기자들에게 돈을 줘서 나라 망신을 시키십니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박정희가 말했다.
-"문 기자, 내일 모레
전세기 타고 같이 서울 갑시다. 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너무 모르는데 이번에 가서 좀 둘러보시오."
뜻밖의 얘기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저는 공짜는 싫습니다."
-"그러면 비행기 반값만 받을까?"
나는 내심 '비행기 같이 타고 가면서 특종 한 번 해보자' 싶어 동행하기로 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에 대해 무엇이라고든 얘기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변인 좀 만나야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왔다.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의 방을 노크했다. 그는 잠옷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옆에 앉은 서울신문 이양 기자에게 기사를 불러주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가니 급히 옷을 걸쳐 입고 기사를 계속 부르는데 내용이 완전히 소설이었다.
-"휴식차 요세미티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은 휴식할 새도 없이 오늘 오후 한.미 고위경제각료회담을 가졌다. 미측에서는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도 참석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강 대변인에게 물었다.
"강 대변인, 지금 미국 경제 각료들이 회담하러 여기 와 있습니까?"
-"문 기자, 원래 이렇게 하는 것 아뇨? 잘
아시면서.."
나는 당장 밖으로 나와 서울의 [경향신문] 편집국 정재호 정치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요세미티에서 이양 기자가 풀로 보내는 기사에서 내 이름은 몽당 빼 주세요. 강 대변인인 있지도 않은 일을 이양에게 불러주고 있어요. 앞으로 여기서 날아가는 기사는 대부분 소설일 겁니다. 출발하는 날이 8월 25일 아침, 박정희는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아침 먹을 시간도 없는 것 같았다.
전세기가 뜨는 미 공군 기지 캐슬 에어베스로 가기 위해 각료들과 수행기자들이 모두 버스 한 대에 탔다. 나는 기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앞쪽에 앉아 있던 김동조 주미대사가 내 옆에 와서 앉으며 "우리 얘기 좀 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하던 나는 일부러 비꼬아 말했다.
"아니, 저 앞에 부인도 앉아 계신데 왜 이러세요?"
'얘기'를 듣고 보니 그는 내가 대통령 전세기에 함께 타고 서울로 간다는 것을 알고 대통령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좀 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참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무슨 얘긴데요?"
-"대통령께서 만일 이 실장과 나의 관계에 대해 물으면 내가 절대로 이 실장 측근이 아니라는 것만 전달해
주시오."
내심 나는 '아니 이 사람이?' 싶었다. 김동조는 이후락의 꼬붕이 아닌 게 아닌 사람이었다. 이후락 맏아들의 결혼식을 자신의 대사관저에서 치러 주었고, 자신의 딸을 이후락의 둘째 아들에게 시집보내려고 온갖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이후락과 관계없다고 말해 달라니, 이제 이후락의 권세가 끝난 모양이다 싶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목 달아납니까?"
그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자기 부탁만 되풀이 했다. 그의 다급한 표정으로 봐서 아와이 호텔에서 같이 포커치던 박종규에게서 뭔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이후락의 실각은 나중에 사실로 나타났다. 3선개헌을 마친 후 김성곤을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의 압력으로 이후락과 김형욱은 각기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는 말했다.
"나는 김대사께 들은 얘기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아이고 그러면 안되고..."
김동조는 원래 일제 때 일본 규슈제국 대학을 나와 내무성에서 일했다. 내무성의 주 임무라는 게 독립운동 사찰하는 일이다 보니 그는 해방 후 반민 특위에 걸려들었다. 그런 그가 별 탈 없이 출셋길을 달린 것은 부인 송두만 덕분이었다. 송씨 집안은 경남 통영의 천석꾼 부자인데 이승만이 감옥에 있을 때 찾아다니며 차입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이승만이 송씨 집안에 은혜를 갚는다고 사위인 김동조를 밀어 주었던 것이다.
일본 총독부에서 이승만에게, 이승만에서 박정희에게, 거기서 다시 이후락에게 이어진 김동조의 줄서기는 이제 누구에게 이어질 것인가. 제 자리로 돌아가는 김동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약속을 지키마"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군기지에 도착한 후 모두들 비행기에 올랐다. 전세기의 구조를 보니 조정석 바로 뒤가 대통령 부부의 침실이고 그 다음이 대통령 부부의 식당 겸 접견실 , 그 뒤에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방이 있고, 그 다음이 수행 각료들 좌석, 마지막으로 비행기 꼬리 부분에 수행 기자실이 있었다. 기자실에 앉아 있는데 나은실이 나를 찾으러 왔다.
-"각하께서 문 기자님은 접견실에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래서 나는 박정희 부부와 몇 시간 동안 마주보고 앉아서
날아가게 되었다. 식탁에는 박정희 부부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나와 나은실이 앉았다.
곧 식사가 나왔다. 포크와 나이프를 갖다 놓는데 보니 물론 도금한 것이겠지만, 온통 황금색으로 번쩍번쩍한데 대통령 휘장이 박혀 있었다. 내가 말했다.
"이거 하나 쌔빌까요(슬쩍 집어 넣는다는 뜻의 속어?) 이런 걸로 밥 먹기는 제 일생에 처음인데.."
육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다 세어 놓았을 거예요."
메뉴판을 갖다 놓는데 보니 대통령 휘장을 금색으로 박아 멋지게
만든 것이었다.
"그럼 여행 기념으로 이거 하나 주십시오."
박정희가 메뉴판에다 '문명자 여사를 위하여, 박정희' 라고 쓰더니 나에게 주었다. 박정희는 식사를 하며 일제 때 가 본 금강산 구룡폭포에 대한 기억등 여러 가지 한가로운 얘기들을 했다. 대구 사범 시절얘기도 나왔다. 내가 물었다.
"그 때 수학여행을 만주로 가셨지요?"
-"아, 그랬지요. 어떻게 압니까?"
"우리 친척 오빠가 대구 사범에
다녔는데 만주로 수학여행 갔다가 선물을 사다 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 그 오빠 이름이 뭐냐, 나이가 몇 살이냐 하다 보니 오빠와 박정희가 동기 동창이었다. 박정희도 그 오빠를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좁은 것이다.
여러 가지 얘기 중에 주미대사 김동조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나는 "세상에 별 웃기는 일도 많습니다." 하고는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육 여사는 한숨 섞인 소리로 "아휴"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박정희가 담배를 피워 무는데 역시 신탄진이었다. 칠이 벗겨진 지포 라이터를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 지포 라이터는 주로 GI(미군 병사나 하사관)들이나 쓰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왜 하필 사병들이나 쓰는 지포 라이터를 쓰십니까?"
-"옛날에 미국놈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바람이 불어도 불도 안꺼지고 참
좋아요."
박정희는 꼭 '미국놈'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박정희가 갑자기 물었다.
-"문 기자는 3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안됩니다.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안됩니다. 이승만 박사를 보십시오."
그러자 육여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박정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더니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모른다는 말이오. 이번에 가서 한국 실정을 잘 좀 둘러보시오."
"한국 실정이 어떻든 저는 3선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서울 간의 14시간 비행 동안 박정희는 비서실장 이후락을 단 한 번 불렀다. 박정희가 물었다.
-"이실장 이번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보고 있소?"
나는 이후락이 박정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 유심히 보았다.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그러나 급한 성질은 어쩔 수가 없는지 이후락은 말을 더듬으며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가, 가, 각하,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모두들 대, 대성공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성공이라니, 박정희는 주한 미군 철수
정책을 변경시키러 닉슨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닉슨은 전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군 철수 정책에 변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 뿐 아니라 닉슨은 박정희를 지지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기 위해 극히 말조심을 했다.
결국, 박정희가 얻어낸 것은 정상회담 공동 성명속의 "박 대통령의 영도 하에 한국이 거둔 주목할 만한 발전" 이라는 한 문장뿐이었다. 그것은 어떤 공동성명에든 으레 끼어들어가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도대체 누가 그렇게 평가 합디까?" 하고 소리를 칠 뻔 했다. 그러나 박정희를 힐끗 보니 그 역시 이후락의 보고가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김포에 내리자마자 나는 불문곡직 KBS 스튜디오로 끌려갔다. 이번 정상회담에 관한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 하라는 것이었다. 가보니 김성은 국방장관과 정재호 경향신문 정치 부장이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담당 PD가 달려와 말했다.
-"문 기자님께서는 주미 특파원으로서 정상회담 시작 전부터 샌프란시스코에 가 계셨으니까 대통령 각하 부처가 도착하기 전 교민들의 환영 분위기라든지 태극기 물결 등의 광경을 이야기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싶었다. 프로그램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이번 미국 방문에서 교민들에게 열렬히 환영받고 미국 대통령 닉슨에게도 강력한 지지를 받은 대통령 박정희를 다시 한 번 대통령으로! 나는 짐짓 말했다.
"내가 가 보니까 샌프란시스코에 태극기는 두 개 밖에 없었는데 물결은 무슨 물결입니까? 또, 대통령 숙소 앞 공원에서는 민주당 때 유엔대사를 지낸 임창영씨 등의 교포들의 꽹과리를 치면서 '박정희 물러가라' 하고 구호를 외치던데 그런 것도 합니까?"
PD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이고 문 기자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지 마시고 대통령 부처를 맞이하는 우리 교민들의 열광적인 환영 분위기를 소개해 주십시오."
"아 글쎄, 열광적인 환영 같은 것은 없었어요.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거짓말은 못합니다. 나는 가겠습니다."
정재호가 옆에서 거들었다.
-"문 기자, 사람 죽일라 카나, 살릴라 카나, 거짓말 한 번 하면 어때?"
"당신이나 실컷 해.
나는 국민을 속일 수 없어. 태극기가 두 개밖에 없었는데 태극기의 물결이라니?"
내가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니까 다급해진 PD가 사정을 했다.
-"시간도 없는데 가시면 어떡합니까. 정 그러시면 있는 그대로만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샌프란시스코 회담 때 국민들에게 소개할 만한 광경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열광적인 환영' , '태극기의 물결' 등 입에 발린 거짓말로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자들이 괘씸해 골탕을 먹인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닉슨이 박정희를 위해 마련한 환영 만찬에서 육여사가 입었던 한복에 대해 얘기했던 것 같다.
결국, 69년 수천 명의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고,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 농성하는 가운데 9월 14일 새벽 2시 3선개헌안이 날치기 통과 되었다.
당시 공화당 중진 의원이었던 김정렬 전 주미대사는 지난 70년 필자에게 이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비록 내가 공화당에 몸담고 있지만 '세상에 이런 날도둑질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소. 그 때 야당 의원들은 의사당 안에서 곰탕 한 그릇씩을 시켜 먹고 아예 이부자리를 가지고 들어와 잠을 잔다고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공화당 총무 단원들이 우리에게 귀띔하기를 모두 지정해 주는 호텔로 가라고 했어요. 밤이 깊었기에 잠이나 잘까 하고 누웠는데 갑자기 지시가 내리기를 한 사람씩 나와서 국회 앞 별관 쪽으로 가라는 거였어요. 야당 의원들에게 정보가 누설되면 안 된다고. 그 때 이미 그 일대 전기를 끊어버려 우리는 모두 소경이 다 되었지요. 3인조에서 5인조로 나뉘어 별관 안으로 들어가라는데 젊은 의원이 선두에서 걸어가고 뒷사람은 앞사람 허리띠를 잡고 따라가라는 것이었어요. 나도 앞사람 허리띠를 잡고 내 허리띠를 딴 사람이 잡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따라갔었소. 그 곳이 별관이더란 말입니다. 가 보니 촛불 몇 개 켜 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의장이 시간을 끈다고 장경순(당시 부의장)이가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 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 하면서 땅땅 때리는데, 개헌안 통과 시키는 데 1분이나 걸렸을까. 정말 기가 딱 찹디다. 대체 이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공화당에 몸담고 있는 내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이것 모두가 부정부패의 총수 이후락의 잔재주에다 김형욱 같은 안하무인격의 무식쟁이의 소산이란 말입니다. 한국은 무법천지로 변했어요. 나는 그 때 의원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했지요. 그런데 3선 개헌 후 박정희는 그렇게 과잉 충성하던 자들의 목을 쳐버리더군요. 나는 '이것은 잠시 동안의 속임수다. 이 자들은 가까운 장래에 다시 데뷔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후락이가 주일대사로 임명되어 지금 도쿄에 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내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김형욱이한테도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 하나는 안겨 줄 겁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정치에는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면서 "문 기자를 믿고 이야기 한 것이니 내가 죽고 나면 반드시 3선개헌의 진상을 역사에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차례 만나는 가운데 나는 육여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내게서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육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이 나라의 진짜 민심이 어떻다는 것을 대통령께 전달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주위에서 좋은 분이라고 추천 하는 분들을 초대해 대화를 나누곤 해요. 그런데 처음 만날 때는 바른 말 해 주시던 분들도 두 번째 만날 때부터 저 듣기 싫은 얘기는 안 하시려 해요. 제가 아무리 '왜 이러십니까? 저를 소경. 귀머거리로 만드시려고 그러십니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사실대로 좀 얘기해 주십시오'라고 아무리 간곡히 부탁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문 기자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만남이 거듭 되면서 육여사는 내 이야기를 들을 뿐 아니라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난봉꾼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배다른 형제가 11명이나 되었다는 얘기, 박정희와 결혼하게 된 사연, 결혼에 반대했다고 남편이 장인을 쳐다보지도 않는 데서 오는 괴로움 그리고 남편의 끝없는 외도로 인한 가정적 고민 등등.
한번은 육여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였지요. 그이가 선거운동차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저에게는 서울에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 참 어려운 선거였어요. 국민들에게 '이게 마지막입니다' 하고 호소까지 했었잖아요. 청와대에 앉아 들으니 김대중 씨 부인 이희호 여사가 선거운동에 그렇게 열심이라고 해요. '저이가 그렇게 애쓰는데 나는 왜 내 남편을 못 돕나' 싶어서 바로 대통령께서 묵고 계신 유성온천으로 내려갔지요. 도착해서 대통령 계신 방문을 탁 열고 들어갔는데 웬 여자가 옆에 앉아 있다가 혼비백산을 해서 도망을 쳐요. 나도 깜짝 놀라 멈칫하는데 그이가 글쎄 '서울에 있으라면 있을 것이지 뭐하러 왔어? 하고 고함을 치면서 재떨이를 집어 던지는 거예요."
육여사가 그 재떨이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가련한 여인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얼마나 다쳤느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박정희를 싸고도는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도덕적 타락상에 대해서도 잘 알 뿐 아니라 그 때문에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청와대로 육여사를 방문하고 돌아가려 할 때 여사가 내게 말했다.
-"2층 비서실장 방에 들러 이 실장에게 인사하시지요. 그이한테 잘 못보이면 안되잖아요."
"안 합니다. 언젠가는 이후락이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할 겁니다."
육여사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나의 말을 부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결국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해 3선에 성공했던 71년 나는 경향신문사를 사직하고 MBC 워싱턴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된 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워싱턴에 다니러 와 있던 최치환(전 경무대 비서)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데 그가 뜻밖의 얘기를 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나더러 [경향신문]사장으로 오라고 해서 한국에 나가게 됐습니다."
"어째서 이후락이가
[경향신문]사장을 임명합니까?"
-"모르셨소? [경향신문]은 실질적으로 PP(박정희)건데 지금은 이후락이가 대신 핸들하고 있는거요."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최치환은 자기 말대로 서울로 가 경향신문 사장에 취임했다.
71년 10월
나는 서울을 방문했는데, 이환의(당시 MBC 사장)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경향신문] 정치 부장을 지낸 사람이라 만났더니 "MBC 특파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신문기자지 방송기자가 아닌데 마이크 잡고 잘 할 수 있을까요?"
-"문 선배는 잘 해낼
겁니다."
"그나저나 MBC는 누구 겁니까? 그것도 정부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 MBC는 주식이 모두 개인 주주들에게
분산되어 있어요."
그 말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경향신문]이 박정희 것이라는 통에 계속 [경향신문]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이환의 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최치환 [경향신문] 사장과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그 길로 [경향신문] 사장실로 갔다. 최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거기다 불문곡직 사직서를 내놓고 "점심 약속 지키지 못한다"라는 메모를 적어 놓고는 다시 MBC로 갔다. 거기서 나는 MBC 워싱턴 특파원 발령장을 받았다. 모두가 10월 7일 하루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환의 사장은 큰 실수를 한것이었다. 나를 특파원으로 쓰는 바람에 73년 11월 내가 망명하는 날까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3선에 성공했지만 국내는 결코 평온치 않았다. 대학생들의 대규모 교련 반대 시위는 서울에 위수령까지 발동해야 할 정도로 거세게 전개됐다. 또 광주 대단지 폭동 사건이 보여주듯 고도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노동자.빈민들의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른바 10.2 항명 파동을 빌미로 3선개헌의 돌격부대였던 김성곤 등 공화당 4인방을 쓸어버리고 친정체제를 구축하더니 12월 6일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유신체제의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전처소생인 박재옥의 남편 한병기(당시 공화당 국회의원)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는 황호을 주미대사관 공사를 통해 미국 국회의장을 위시하여 상.하 양원 의원들을 만나려 했던 모양이었다.
한 의원이 칼 앨버트 하원의장실을 방문하기 전날 그의 비서실장 에머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박 대통령의 사위
한병기라는 사람이 앨버트 의장 면담 신청을 해 와서 조사 중입니다. 그가 진짜 박 대통령의 사위입니까?"
이런 경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그에게 "한병기는 박정희가 숨겨 놓은 딸의 남편" 이라고 구구히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사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 인명 카드에는 결혼한 딸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입장이 곤란해진 나는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복잡한 사정이 좀 있는데, 어쨌든 박 대통령의 사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동조 주미대사의 부인 송두만 씨에게 물어보세요."
잠시 후 송두만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앨버트 의장실에서 전화가 와서 한병기 대사 문제를 묻기에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고 했다. 이 무슨 나라 망신인가. 당사자인 박재옥은 한번은 내게 "차라리 저는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한탄한 일도 있다.
박재옥은 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과시한다든가 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선량하고 진지한 여성이다. 대통령의 숨겨진 딸로서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말 못할 고생도 많이 했던 인물이다.
이런 곡절을 거쳐 한병기 의원은 황호을 공사와 함께 앨버트 하원의장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화통신 한창섭 기자가 그 자리에 나타나 "나는 박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의원의 친척" 이라면서 한 의원과 함께 들어가겠다고 주장해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에머진 여사는 "두 사람이 같은 미스터 한이라 친척이라고 하는데 진짜 친척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하여간 앨버트 하원의장 방에서 한 의원은 5분 정도 인사 겸 면담을 가지고 박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는데 앨버트 의장은 "만약 그런 심각한 사태가 사실이라면 내가 박 대통령 입장에 있었어도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가지고 한창섭 기자는 "미 하원의장 앨버트가 한병기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를 적극 지지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그 기사는 한창섭 기자 1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의 중앙지들 특히 주미 특파원이 있는 신문. 방송들은 모두 자사 특파원 이름으로 그 기사를 내보냈던 것이다. MBC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이름으로 "앨버트가 박정희의 비상사태를 지지했다"고 보도 했다. 나는 즉시 박근숙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보내지도 않은 엉터리 기사를 왜 내 이름으로 내보냅니까? 계속 그런식으로 하실 거면 나는 언제든지 그만둘 테니 다른 유능한 기자를 보내세요."
이 기사로 인해 앨버트 의장은 몹시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에 그런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말한 의례적인 발언이 '전폭적인 지지'로 둔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무성으로부터 발어 사실 여부를 문의 받는 등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도대체 그 코리안 리포터는 어떤 사람이오?"
인사 방문 자리에서 사담으로, 그것도 단서를 붙여 한 발언을 정치적 입장이 분명한 말로 둔갑시켜 보도하는 자가 어떻게 기자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느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김대중 의원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우리 특파원들을 그의 처남 이성호 씨 집에 초청받아 김대중 씨와 환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 씨의 특별보좌관 이었던 유기홍 박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신문을 보니 앨버트 의장이 비상사태를 지지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 자리에는 한창섭도 참석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쏘아 붙였다.
"미스터 한, 그런 허위날조 기사를 보내서 특파원들뿐 아니라 앨버트 의장까지 망신시키지 마시오. 그거 국민을 속이는 짓
아니오?"
"...."
"그리고 당신이 언제부터 한병기의 친척이야?"
-"같은 한가니까.."
"앨버트 의장실에서 그게 사실이냐고 조회해 왔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되겠어? 제발 이런 일 좀 없었으면 좋겠어."
얼마 후 나는 MBC 박근숙 보도국장으로부터 사신을 한 통 받았다.
-"문 특파원, 수고 많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알려 드립니다. 동화통신 한창섭 기자가 중앙정보부의 김모 국장에게 '문명자가 김대중이라는 자 앞에서 나를 모욕했다 위험한 인물이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김모 국장은 이환의 사장에게 문 특파원을 채용한 경위를 따지면서 '당장 목을 자르라'고 강력히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기자는 또 한병기 의원에게도 편지를 썼는지, 며칠 전에 한 의원이 이환의 사장실에 찾아와서 '문명자 특파원을 당장 파면해라. 박 대통령도 지금 매우 화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태가 이처럼 복잡하니 약간의 거짓 보도가 있다 해도 김대중 씨 같은 사람 앞에서 그 기자를 마구 쏴붙이는 발언은 삼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김대중 씨 같은 사람' 앞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가.
해가 바뀐 72년 봄, 대사관 파우치(외교행낭) 편으로 이번에는 이환의 사장의 사신이 날아왔다. "문 선배, 제발 사람 좀 잘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내가 간직하고 있다.
사실 한창섭 기자에게 내가 싫은 소리를 한 것은 앨버트 사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기자가 미국에 초기에 나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즈음 통신사 간의 극심한 경쟁 때문인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앨버트 의장 발언 기사 같은 허위날조 기사를 쓰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7대 대통령 선거 전날, 워싱턴발 한창섭 기자의 기사가 미 국무성을 놀라게
했다.
"폴 스카트란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쓴 보도에 의하면, 닉슨 행정부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다."
한국 대통령 선거날 아침에 미 국무성에 들렀더니 국무성 관리들이 번갈아 나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폴 스카트라는
미국기자를 아는가?"
"들어보지 못했다."
-"어떤 기자인지 찾게 되면 좀 알려달라."
나는 폴 스카트가 누군지 궁금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조그마한 지방지에 칼럼을 쓰고 있는 노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로 물었다.
"한창섭 기자 기사를 보고 전화 드립니다. 당신은 어떤 정보에 의해서 닉슨 행정부가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다는 칼럼을 쓰셨습니까?"
-"아, 사실은 내 기사는 아직 신문에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기자가 쓴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한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일 뿐인데... 필요하다면 내 기사의 복사본을 당장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노인이 어떤 경위로 "박정희의 당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의 당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의 당선이 필요하다"는 한 무명 칼럼니스트의 생각을 닉슨 행정부의 생각으로 둔갑시켜 선거 바로 전날 한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행위는 명백히 '선거 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창섭의 폴 스카트 인용 기사가 나간 며칠 후 최규하 외무장관이 워싱턴에 왔다. 그는 국무성 관리와 만난 후 특파원들을
앰프레스라는 중국집에 초대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최규하 장관, 김동조 대사, 황호을 공사, 권오기 동아일보 특파원, 조세형 특파원 등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뒤늦게 한창섭 기자가 나타나 우리 테이블에 끼어 앉았다. 우리 옆자리에는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사, 최응태, 신동원, 김동희 참사관 등과 다른 기자들이 앉았다.
나는 한창섭을 보자 다짜고짜 몰아 붙였다.
"미스터 한은 언제부터 공화당 대변인이 되었어요? 대통령 선거 전날 어떻게 그 따위 허위 기사를 보도할 수가 있어요?"
동석한 기자들 중 몇몇도 이구동성으로 한창섭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한창섭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최규하 장관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여사, 한 번쯤 봐주시지 그래요."
김동조 대사도 거들었다.
-"문 여사가 화가 나니 대단하네요? 자, 최 장관도 모셨으니 우리 밥이나 먹읍시다."
순간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사와 눈이 마주쳤다. 못마땅한 안색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도 질세라 쳐다보는데 이상호 공사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동희 참사관이 눈짓을 하면서 "참으세요" 했다.
그 후 한창섭 기자는 동화통신이 자진 폐간하자 김용식 외무장관의 주선으로 합동통신 뉴욕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76년 코리아게이트가 한창일 때 한창섭은 박스 기사로 '문명자는 친북' 이라고 써 갈겼다. 나에게 공개망신을 당한 보복을 그렇게 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한다.
제 3장 - 육영수와 함께 확인한 박정희의 평창동 주색잡기 안가
내성적인 독종, 인간 박정희
내가 육여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유신 헌법에 따라 박정희가 제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72년 12월 27일 취임식을 가질 무렵이었다. 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선포하여 국회 해산, 정당 정치활동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 시켰다. 그리고 11월 21일 '유신헌법' 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이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해 장충체육관에서 임기 6년의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나는 서울에 와 있었다. 바로 나흘 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개회식에서 박정희가 개회사를 읽던 중 대회장에 높이 솟아 있던 태극기 깃대가 부러져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태극기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건이 있었다. 그 얼마 전에는 육여사가 다니던 절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절이 온통 불타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박정희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아닐까 해서 유신정권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 취임식장인 장충체육관에 도착한 후 이번에는 태극기를 어떻게 꽂아 놓았나 유심히 보았다. 아예 두 사람의 국군 병사가 손으로 태극기 깃대를 들고 있었다. 박정희와 육여사는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가슴에 훈장을 줄줄이 달고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 쪽으로 휘황한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전에 못 보던 모습이었다.
취임식이 끝난 후 나는 육여사에게 말했다.
"두 분은 드디어 덴노헤이까(천황폐하), 고구헤이까(황후폐하)가
되셨군요."
그것은 물론 죽을 때까지 계속 대통령을 하게 된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육여사는 나의 진의를 못 알아듣고 단지 휘황한 휘장을 두른 자기 부부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후, 나는 서울 정동에 있는 MBC 사옥에 갔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는 층이 있었다. 나는 함께 탔던 한 기자에게 물었다.
"왜 그 층에선 안 섭니까?"
-"내려서 말씀 드리죠."
편집국이 있는 층에 내려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거기는 5.16 장학재단 사무실이 있는 층입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습니다."
"5.16 장학 재단이 왜 MBC 사옥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왜 서지 않구요?"
-"사실 이 MBC는
박통 겁니다. 그리고 그 사무실은 박통 은퇴 후의 사무실로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요? 한 번 가 봅시다"
나는 그 기자와 함께 계단으로 해서 '5.16장학재단 사무실'로 갔다. 유리창으로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니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넓은 사무실에는 가구와 집기들이 규모 있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경향신문]이 박정희 것이라는 바람에 MBC로 왔는데 MBC는 아예 박정희가 사무실까지 차려 놓은 사유물이었다니, 나는 또 한 번 속은 셈이었다.
그 즈음 나는 육여사에게 박정희가 이후락의 주선으로 주색잡기를 즐기는 안가를 제보한 일이 있다.
내가 그 안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신진자동차 사장 김창원의 부인 OOO씨(늘 미시즈 김이라고 부르다 보니 그녀의 이름을 안타깝게도 기억하지 못한다) 덕분이었다. 60년대 말부터 신진은 이후락이 밀어주는 몇 개 기업 중의 하나로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신진자동차는 69년 4월 [경향신문]의 경영권까지 장악했는데, 그때 나는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창원의 부인이 워싱턴에 오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해서 나중에는 미국에 왔다 하면 우리 집에 와서 자곤 했다. 한 번은 그 녀를 워싱턴 한국대사관 파티에 데려갔는데, 그녀를 본 경제담당 이 아무 공사 부인이 나를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부산 출신이었다.
한구석으로 나를 데려간 이 공사 부인이 나에게 물었다.
-"문 기자님. 저 여자 어떻게 알아요?"
"왜요? 우리 회사 사장
부인인데."
-"이상하네,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술장사하던 여자가 틀림없는데요."
나는 그 날 저녁 김창원의 부인에게 '자갈치시장'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전혀 스스럼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맞아요. 그 때 나 술장사 했어요."
나는 이 시원시원한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해
주었다.
"전남편이 허구한 날 야당으로 국회의원 출마해 낙선했거든요. 살길이 막막해 자갈치 시장에 나섰지요. 그런데 우리 김 사장이 그 때 부산에서 드럼통으로 시발차를 만들어 자동차 사업 한다고 다녔는데, 우리 집 단골이었어요. 사업하다 돈이 궁하면 나한테 빌려 가고 또 갚기도 잘 갚고, 그래서 친해졌는데 나중에는 어찌나 끈질기게 결혼하자고 하는지, 결국 내가 두 손 들고 전남편과 이혼하고 김 사장하고 재혼했어요."
듣고 보니 기가 막힌 로맨스였다. 그러나 그토록 열렬한 구혼 끝에 결혼했지만 결혼 후 김창원은 사업이 번창하면서 외도가 심해져 그녀의 속을 무척 썩이고 있었다. 김창원의 집은 세검정에 있었다. 72년 서울에 갔을 때 김창원 부인의 점심 초대로 나는 그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집 규모가 더 어마어마했다. 정문 쪽에 사랑채 격인 영빈관 같은 건물이 있고 정원 건너 안쪽에 가족들이 거처하는 안채가 있었는데, 이 두 건물은 정원 밑의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지하통로로 왕래하므로 밖에서는 도무지 이 집 사람들의 동정을 알 수가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지하에는 골프 연습장까지 있었다. 당시 후암동에 있던 이후락의 집을 본따서 지은 집인 듯했다. 후암동 이후락의 집은 호화로움이야 말할 것도 없고, 주위 집들을 계속 사들여 용산의 미8군부대까지 지하통로를 만들어 놓았다는 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김창원 부인은 점심 식사를 하며 여러 가지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후락이는 정말 나쁜 놈이에요."
"아니 이후락이가 봐줘서 신진이 그만큼 큰 것 아닙니까? 김 사장은 나이도 아래인
이후락이를 '형님' '형님' 하면서 깍듯이 모신다던데..."
김창원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저기 담장이 둘러쳐진 저 집이 뭐하는 집인 줄
아세요?"
"뭔데요?"
-"저 담벼락 안에 이후락이가 주말이면 기생. 탤런트들을 불러놓고 대통령을 모시고 노는 안가가 있답니다.
저 집은 대문부터 안방까지 자동장치로만 열리게 되어 있는데, 문 손잡이나 수도꼭지까지 금으로 돼 있답니다. 이후락이가 자기가 봐주는 기업주들하고 노상 즐기는 데도 저기고..."
"저 집을 대체 언제 지었답니까?"
-"이후락이 비서실장 때 지었답니다."
"대체 어떤 여자들이 드나드는데요?"
-"죽은 정인숙이도 왔었고, 영화배우 Y도 드나들고 스튜디어스도 있고, 심지어
육여사 단골 미용사까지 불러다 즐긴답니다."
그녀는 그 얘기를 남편에게 들었다고 했다. 손가락에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3만 불짜리 파텍 손목시계까지 차고 있었지만 김창원 부인은 시름에 차 보였다. "이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하긴 남편이 이 나라 최고 권력자들과 어울려 외도를 하고 다니니 막을 방법도 없고 답답하기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배다른 자식들도 만만찮게 그녀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뉴욕의 한국 음식점 우리하우스에서 나는 신진 김창원의 아들을 위시해 당시 잘 나가던 재벌 2세들이 모여 플로리다로 도박하러 가자며 떠드는 광경을 목격한 일도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육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육여사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안 되니 다른 데로
나오시지요"
육여사는 나에게 어린이 회관으로 오라고 했다. 당시 어린이회관에는 육여사의 방이 있었다. 현관에서 육여사를 만나 방으로 따라 올라갔다.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서 우동을 배달시켜 먹으면서 김창원의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 저하고 세검정에 가 보십시다."
그래서 나는 육여사와 같이 세검정으로 갔다. 문제의 안가가 있는 언덕배기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육여사가 내리자 그 앞 구멍가게 주인여자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육여사가 내게 물었다.
-"그 집이 어디예요?"
"저 담벼락 보이시죠? 그 안이 안가랍니다. 이후락이가 온통 금으로 도배를 해놓고 재벌들하고
대통령 모시고 밤마다 여자들하고 노는데 랍니다."
그 때 그 담장을 바라보던 육여사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럴 수가' 하는 비애에 찬 표정이었다. 나도 못된 일을 많이 한 셈이다.
10.26 후 김재규가 사형당한 뒤에 김창원 부인이 미국 우리 집에 온 일이 있다. 그 때는 신진자동차가 깡그리 망한 뒤였다. 그녀는 전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딸이 미국 메릴래드에 사는 교포 의사와 결혼 했는데 미국에 정착할 때까지 좀 돌봐 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 때 그녀는 진심으로 김재규의 죽음을 가슴아파했다.
-"그 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고... 날씨가 이상했어요. 그 양반이 그렇게 죽으려고 그랬는지."
따지고 보면 박정희. 이후락으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린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가정을 파괴한 것도 그들이었으니, 그들을 그토록 싫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73년 1월 초 하와이에서는 한국인 이민 7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MBC 본사에서는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이 행사를 취재하라고 했다. 육여사 대신 당시 대학생이던 딸 근혜가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하와이에 도착해서 보니 KBS측에서는 최 방송과장을 취재 단장으로 해서 카메라 스탭들이 대거 와 있었다. TBC에서도 도쿄 특파원이 카메라 스탭들을 데리고 먼저 도착해서 하와이 총영사관을 중심으로 사진 찍기에 바쁜 상황이었다.
나는 MBC의 계약사인 미국CBS 하와이 지국을 찾아가서 지국장과 만나 사전에 협조 요청 못한 것을 사과하고 카메라 스탭들을 보내 달라고 사정사정한 끝에, 다음날 새벽 6시 박근혜양 도착 시간부터 카메라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겨우 받아냈다.
다음날 새벽 일찍 하와이 공항에 나가니 벌써 이규성 총영사 부처, 김진홍 외무부 영사국장, 그리고 하와이 교포 남녀 노인들과 교포 아가씨들 수십 명이 나와 태극기를 들고 근혜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라요시 하와이 부지사 부처의 얼굴도 보였다.
CBS 카메라 스텝들을 데리고 근혜 양이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 장면을 찍기 위해 도착 지점 가까이로 들어가려는데 공항 보안관이 사진을 못 찍게 되어 있다고 제지했다.
"그게 누구 지시입니까?"
-"한국 총영사관측의 요청입니다."
나는 다시 돌아 나와 이규성 총영사에게 항의한 후 카메라맨들을 데리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마침내 새벽 6시경 태극 마크가 달린 보잉 707 KAL기가 하와이 공항 활주로에 착륙했다. 아직 어두컴컴해서 사진 찍기가 힘이 들었다. 비행기는 일등석 좌석 창문 쪽에만 전깃불이 환했다. 나는 '보안 문제도 있고 해서 대통령 딸 일행이 다 내릴 때까지 일반 손님들 좌석에는 불도 켜 주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근혜 양이 내려온 후 미용사 한명과 경호원 몇 명이 뒤따르고, 제일 마지막에 조중훈 KAL 사장이 내리고는 상황 끝이었다. 불과 10여 명도 안되는 근혜 양 일행을 위해 비행기 한 대가 대절된 것이다. 국가 원수가 정상회담을 위해 국빈 방문을 한다면 몰라도 정말 너무하는구나 싶었다. 도착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한 이유를 그제서야 알 만 했다.
근혜 양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이규성 총영사 부처는 그녀의 양쪽에 딱 붙어 노인을 부축하듯 귀빈실로 데리고 갔다. 귀빈실에서 아라요시 하와이 부지사가 근혜 양의 목에 하와이 꽃으로 된 레이(목걸이)를 걸어 줄 때도 이들 부부가 옆에 바짝 붙어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CBS 카메라 기자는 "저 두 사람 때문에 사진을 못 찍겠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보다 못해 내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사진 기자가 사진을 못 찍겠다고 하니 두 분은 제발 근혜 옆에서 좀 떨어져 있으세요."
그리고 근혜 양에게 말했다.
"근혜야, 저쪽에 있는 분들은 새벽부터 나와 몇 시간 동안 너를 기다린 교포들이다. 가서 인사해라."
근혜 양은 한복 차림의 교포들에게 다가가서 일일이 깍듯이 인사하며 악수를 나눴다. 그제서야 교포들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근혜가 유숙할 호텔은 카하라 힐튼 호텔이었다. 그 날 오후 3시에 주미대사관 이재현 공보관장이 주선한 미국 신문.TV 기자들과의 회견이 있었다. CBS, NBC, ABC TV 카메라들이 동원되었다. 회견이 시작될 무렵 근혜를 따라온 청와대 의전실 비서가 갑자기 카메라맨들에게 자동 녹음을 하지 말라고 했다. 카메라맨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왜 녹음을 못 하게 하는가. 무성이라면 기자회견 하나마나다. 사전에 얘기라도 해 주었으면 TV 카메라는 동원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재현 공보관장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논리도 잘 닿지 않는 이유를 들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자 무거운 TV 카메라를 메고 와서 설치해 놓았던 카메라맨들은 화를 벌컥 내며 '갓 뎀' 하면서 카메라에 붙어 있던 마이크 선을 떼어 버리고 몇 사람은 방을 나가 버렸다.
갑작스럽게 녹음을 못 하게 한 이유를 나중에 듣고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근혜의 영어 실력이 드러날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그 날 근혜는 기자회견에서 유창하지는 못 해도 재치 있게 답변했다. 과잉 충성파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근혜가 기자회견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담소를 시작할 무렵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워싱턴과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했다가 하와이 이민 70주년 행사에 정부 대표로 참석하기로 되어 하와이에 왔는데 여장도 풀지 않고 바로 근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민 장관을 보자 앉아 있던 근혜가 일어서서 반가이 인사를 했다. 민 장관이 말했다.
-"근혜야, 고단하지?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 많이 했다."
근혜가 답했다.
-"아니예요. 장관님께서 더 피곤하시겠어요."
민 장관은 "나중에 만나자"면서 방을 나갔다.
나는 도착 기사를
보내러 호텔로 돌아왔다. 국제전화로 기사를 불러 준 후 나는 MBC 보도국 기자에게 물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서는 민 장관이 참석했고 근혜는 육여사를 대신해서 여기 와 있는데, 근혜의 공식 호칭은 뭐라고 해야
하나요?"
보도국측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문 특파원, 별다른 정답은 없습니다만, 앞으로 기사 보낼 때 근혜양의 호칭은 반드시 '대통령 영애 근혜 양'으로 해 주십시오."
"아니, 박근혜 양 하면 됐지, 한국에서 근혜가 대통령 딸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대통령 영애 근혜 양'은 너무 길어서 내가 말하다가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이문제로 나는 한동안 옥신각신 했다. 하와이 이민 70주년 취재는 짜증의 연속이었다. 기사를 보낸 후 근혜의 숙소인 카하라 힐튼 호텔로 갔다. 이재현 공보관장, 조성옥 문교부 기획실장, 강경구 주미대사관 장학관 등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재현은 나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말했다.
-"당신이 없는 동안 큰 일이 하나 생겼어."
"무슨 큰일인데?"
-"당신도 알다시피 민 장관이 아까 기자들 앞에서 근혜에게 해라를 했잖아. 그게 문제가 되었단 말이야."
"아니, 그게 무슨
-"민장관은 그게 각하 귀에 들어갈까 봐 지금 고민 중이란 말이야."
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옆에서 조성옥 씨까지 "정말 큰일 났다" 고 걱정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아니 그런 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 얼빠진 사람이 대체 누구요?"
모두들 선뜻 이름을 대려 하지 않았다. 나는 어림짐작으로
말했다.
"아, 근혜를 수행해 온 이 뭐라더라, 그 자가 범인이구나?"
그제서야 모두들 그렇다고 했다.
한심한 일이었다. 당시 박근혜는 서강대 학생이었고 민관식은 문교부 장관이었으니,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이 학생에게 해라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문제 될 일이란 말인가.
나는 마시던 커피를 그냥 두고 근혜의 방으로 올라갔다. 근혜는 그 날 밤 열릴 리셉션에 간다고 한창 머리를 세팅하고 있었다. 근혜는 깜짝 놀라면서 가운 차림이라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다짜고짜 근혜에게 물었다.
"근혜야, 나도 너보고 존댓말 할까? 존댓말이 듣고 싶니?"
근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문 기자님, 무슨 말씀이세요? 존댓말이라니요?"
나는 밖에서 벌어진 일들이 과잉 충성분자들의 장난임을 직감했다. 나는 '반말'을 둘러싼 해프닝을 근혜에게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일로 말썽이 일어나는 것은 정말 문제다. 서울에 가면 네가 먼저 어머니 아버지께 있었던 사실 그대로 말씀드려라."
근혜는 울상이 되어 말하는 것이다.
-"문 기자님, 정말 왜들 이러지요? 주위 사람들이 너무들 해요. 제가 부모님께 그대로 말씀 올리겠어요."
그 날 저녁 리셉션에서
근혜는 나에게 말했다.
-"문 기자님, 제가 어머니께 전화해서 있는 그대로 말씀 드렸어요."
그 때만 해도 근혜는 순진한 대학생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후 그녀는 어머니가 하던 일을 도맡아 공식 석상에 나서서 활동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총재 무슨 총재해서 직함도 많아졌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오랜 칩거 생활을 청산하고 야당 부총재로 활동하고 있다. 그 모습을 텔레비젼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과거의 '순진한 대학생 박근혜' 가 그리워진다. 장기 집권이 배출한 아첨꾼들은 20년 세월 동안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으리라.
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피격으로 사망한 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청와대는 영원한 우리 집이 아니다"라던 그 조신한 음성이 귀에 쟁쟁했다. 그녀의 사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육여사가 맞은 총탄의 방향이었다.
문세광이 쏜 총탄이 어째서 육여사의 머리 뒤에서 옆쪽으로 관통했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유신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조작극이라는 기사를 송고한 주한 일본 특파원들이 추방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의문에도 한마디 답도 없이 박정희는 자기 아내의 죽음에 대한 국민적 애도 분위기를 이용해 그가 처해 있던 절박한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유신체제를 더욱 강화하려 획책하고 있었다. 나는 그 가엾은 여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박정희의 독재를 다시 한 번 경고하는 뜻에서 박정희에게 영문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애도 전보를 보냈다.
"육여사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육여사에 대한 나의 애도를 받아 주십시오. 생전에 육여사가 나에게 이야기한 '청와대는 영원한 우리 집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귀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을 위해 사임할 때입니다. 문."
나중에 들으니 김성진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은 내 전보에 대해 "첫 구절은 괜찮았는데...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사임할 때'라는 구절만 안 썼으면 괜찮았을 텐데"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에게 애도 전보가 왔다고만 하고 내용은 보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인숙은 70년 3월 17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 전에 미국에 와서 1년 정도 체류했다. 아들까지 낳은 정인숙이 도처를 다니며 계속 청와대를 들먹이는 등 말썽을 일으키자, 경호실장 박종규가 그들 모자를 미국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정인숙과 그의 세 살 난 아들 성일이가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주미 한국 대사관의 중앙정보부 참사관 최홍태와 워싱턴 한인회장 노진환이었다. 노진환은 그 때 모텔 홀리데이 인의 식당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자를 '안팎으로 돌본' 공로로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유신 이후 유정회의원 배지까지 달게 된다. 아마도 정인숙을 돌보면서 그녀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어 알고 있는 노진환의 입을 막으려는 목적이 더 컸으리라.
정인숙 모자는 워싱턴 16가에 있는 우드너라는 아파트 같은 호텔에서 한 달 반 동안 살다가 뉴욕으로 갔다. 그 때 뉴욕에는 미국 남자와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모임인 '한미부인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정인숙의 화류계 친구들 중에서도 한미부인회 회원이 있어 정인숙도 이 모임에 두 번쯤 나왔다. 그 때 나는 정인숙을 본 기억이 있다. 예쁜 얼굴의 젊은 여인이 모자를 쓴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가 남자 같은 음색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자신을 '미시즈 박'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물었다.
"남편은 무슨 일을 합니까?"
-"재일교포 사업가에요."
나는 그 때 남자아이가 누군가와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로 정일권이었다.
정인숙이 귀국 후
70년 3월 17일 한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되면서 박정희와의 관련 여부로 전국이 떠들썩했을 때, 나도 워싱턴에서 사건의 진상을 취재하고 있었는데, 마침 워싱턴 한국대사관 입구에서 노진환과 마주쳤다.
"이것 봐, 미스터 노, 당신 여권 좀 봅시다."
내 말은 정인숙이 죽었을 때 노진환이 미국에 있었는지 한국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권에 찍힌 출입국 도장을 좀 보자는 뜻이었다. 노진환은 황급히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펼쳐서 보여 주며
변명했다.
-"이것 보세요. 정인숙이가 죽었을 때 나는 미국에 있었어요. 나는 그 사건과 타이밍이 안 맞아요."
아마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여권을 꺼내 보이는 짓 같은 것은 않았을 것이다. 노진환은 그처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성격이었다.
얼마 후 [워싱턴 포스트]의 셀리그 해리슨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정인숙 사건을 취재중이었다. 어차피 한국 신문에는 검열 때문에 기사가 실리지도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취재원을 밝히지 말 것을 전제로 해서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주었다. 셀리그 해리슨의 이 기사는 '한국의 크리스천 킬러 스토리'라는 제목으로 [워싱턴포스트]1,2면에 대문짝하게 실렸다. '크리스천 킬러'란 영국의 한 미모의 고급 창녀가 남성 편력을 계속하다 살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71년 3월 4일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한.미 공수기동훈련) 취재차 귀국할 때 나는 이 신문을 가지고 서울에 갔다.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은 팀 스피리트의 전신이라고 할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이다.
워싱턴의 한국 특파원들은 탱크도 싣고 다니는 미 공군 수송기 C-150 편으로 서울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공군기지에 모였다. 한국 특파원들은 공짜 비행기 타고 서울 간다고 좋아서 보따리를 한 짐 씩 들고 왔다. 그런데 미군들이 우리 특파원들에게 한꺼번에 예방주사를 대여섯 대씩이나 놓는 바람에 모두들 녹다운 되고 말았다.
오산공항을 거쳐 숙소인 조선호텔에 도착 했을 때 정일권의 비서인 김종하(전[신아일보]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총리께서 문 기자님이 오신 것을 신문에서 보시고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
정일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자기 주변 사람들은 잘 챙기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주미대사 시절 데리고 있던 부하들이 워싱턴에서 돌아오면 마지막가지 보살펴서 출셋길을 열어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들을 속칭 '워싱턴 클럽'이라고 했다. 나야 워싱턴 클럽하고는 관계가 없었지만, 정일권은 61년 주미대사 시절 안면을 익혔다고 해서 내가 한국에 가면 종종 '워싱턴 클럽'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를 부르곤 했다. 한번은 워싱턴에서 오창회 목사가 왔다고 해서 정 총리 관저에서 열린 저녁 모임에 초대받아 갔더니 미국인 군사고문 하우스먼, 미국인 해군 제독 한 사람, 전 미8군 사령과 밴플리트 등이 와 있었다.
정일권이 이처럼 자기 인맥을 관리한 저변에는 '언젠가는 나도' 하는, 대통령 자리에 대한 야망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가 사석에서 "한 사람의 졸병이 권력을 잡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처럼 한국에 오면 정일권으로부터 종종 초대를 받았었지만, 71년 당시만큼은 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정인숙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워싱턴 포스트] 기사의 취재원이 나인 것을 짐작한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정일권을 만나서 진상을 추궁해 볼 생각으로 약속 장소로 갔다.
잠시 후 정일권이 측근 한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그런데 정일권의 태도가 걸작이었다.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 번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
아마 요즘 정치인들 같았으면 사실이야 어떻든 "나는 정인숙과 관계없다"고 딱 잡아뗏을 것이다. "딱 한 번밖에 안 잤다"고 변명하는 정일권의 태도를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처구니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가 군대 시절 "야" 하고 부르던 박정희에게 "각하" "각하" 하면서 끝까지 미움을 사지 않고 그 그늘 밑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유들유들한 성격 덕분인지도 모른다.
나는 문제의 [워싱턴 포스트]를 들고 그 길로 정일권의 부인을 만나러 갔다. 그녀와 나는 정일권이 주미대사를 지내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성들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조선 여인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정일권의 부인을 꼽을 것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정일권의 바람기는 잠잠할 날이 없었지만, 그의 부인은 그것을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탓으로 돌리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이야 편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심한 위장병으로 고생했는데 항상 근심에 차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들고 간 [워싱턴 포스트]를 그녀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이 사건 아세요?"
정 총리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이 집에 시집와서 아들을 못 낳은 죄로 우리 집주인이 어디서든지 아들을 낳아오면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래서 나도 우리주인에게 신문에 난 그 아이가 당신 혈육이라면 호적에 올리자고 했는데 우리 집 주인이 절대 아니라고 합니다. 장기영 씨 하고도 의논했어요. 장기영 씨가 '그 분이 공직자라 곤란해서 그렇다면 일단 내 호적에 넣어 주겠다'고 까지 했는데 본인이 한사코 아니라고 하니 난들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70년 후반 정일권의 이 현숙한 부인은 세상을 뜨고 만다. 얼마 후 정일권이 재혼을 했는데 새로 장가든 부인과의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 "불임수술 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았는가" 하고 따져보고 싶었는데 정일권 스스로 제 발이 저렸는지 "불임수술을 풀었다" 고 변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지난 90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정일권에게 자기를 아들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정일권은 비서를 시켜 4천만 원을 주고는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정성일은 결국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까지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94년 타계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5공 시절 서울 하이야트 호텔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그는 "전두환 만큼은 나쁜 놈"이라고 했다.
제 1장 71년 이희호 . 패트리셔 닉슨 백아관 회동 비화
김대중과의 첫 만남
내가 김대중 씨를 처음 만난 것은 66년 김대중 의원이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김대중 씨에 대한 필자의 감정은 이중적이었다. 애초에 나는 박정희 독재에 강단 있게 맞서 온 젋고 유능한 야당 의원에 대해 기대가 컸다. 그런데 그를 포함한 야당 의원들이 여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와 '이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인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었다.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문제부터 물어봤다.
"김 의원을 포함한 야당 의원들이 여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설이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김대중 의원은 뜻밖에도 선선히 답변했다.
"예, 사실입니다. 그 자금은 관례화되어 있는 것이고 야당측이 분배받을 권리가 있는 성격의 자금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받았습니다."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김대중과의 첫 만남이 유쾌하지 않았던 이유는 또 있었다.
그가 데리고 온 엄영달이란 인물 때문이었다.
엄영달은
4.19 당시 일본 도쿄의 주일 한국대표부 2등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조국에서 전해진 4.19혁명의 열기 속에 도쿄에서도 학생, 주재원 교포 할 것 없이 군중들이 한국대표부로 쳐들어갔다. 당시 와세다대학원에 다니면서 [여원]의 도쿄 지국장을 맡고 있던 나도 그 속에 끼여 있었다. 우리는 일제히 "유태하(주일 대표부 공사)나와라" 하고 소리쳤다. 유태하 공사는 철저한 이승만 충성파로 알려져 평판이 대단히 나빴다.
그 때 엄영달이 필자의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스터 엄, 유태하 어디 갔지?"
그러자 엄영달의 대답이 기막혔다.
"아, 그 XX?"
어제까지 직속상관으로 모시던 사람에게 대뜸 육두문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그에게 쏘았다.
"우리는
유태하에게 욕설을 할 수 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의리도 없는 놈!"
엄영달을 만난 것은 그 때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스터 엄은 어떻게 해서 김 후보를 따라왔어요?"
-"김대중 후보가 통역을 필요로 하시기에..."
당시 외교관직을 퇴직한 엄영달은 국회의원 공천을 기대하고 김대중 의원을 돕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사람을 동반하고 나타났으니 김대중 의원에 대한 인상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김대중 의원과 두 번째로 만난 것은 그가 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71년 1월 말 7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였다. 나는 그 대 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박정희의 3선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날 밤 유기홍 박사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는 아메리칸 대학 정치학 박사로, 남편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자신이 김대중 후보의 특별보좌관을 맡게 되었다면서 김 후보를 도와 달라고 누누이 부탁했다. 유쾌하지 않았던 첫 만남 때문에 내 대답은 삐닥하게 나갔다.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 데다 또 나는 한국 신문의 특파원 자격인데 특정 정치인을 어떻게 돕습니까?"
유기흥 박사는 밤 10시가 넘도록 계속 자기주장을 역설하다 돌아갔다. 그런데 별 말이 없던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나라가 민주화되고 통일되려면 남쪽에서 먼저 통일이 돼야 해요. 지금 박정희가 전라도를 차별하는 바람에 영호남 대립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 않소. 김대중 씨가 마침 전라도 사람이고 그 때문에 박정희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으니 그를 도웁시다. 그 사람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남에서 대통령을 한번 해야만 동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고, 그게 우리의 꿈을 이루는 길이오."
남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지난 유감을 털어버리고 김대중 의원을 돕기로 했다.
1971년 1월 말, 한국은 대통령 선거를 불과 두 달 여 앞두고 있었다. 전 국민적 반발에도 아랑곳 않고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박정희가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한 선거였다. 박정희의 5.16쿠데타 이후로 미국에서 조국민주화운동을 벌여왔던 워싱턴의 우리 동지들은 71년 대선에서 어떻게든 야당 후보를 당선시켜야만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막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데 뜻을 모으고 있었다. 선거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후보 부부를 미국 정.관계의 유력 인사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미 행정부와 의회의 유력 인사들이 김대중 후보를 비롯한 한국의 야당 인사들을 만나주지 말도록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미 국무성에 집요하게 압력을 넣고 있었다.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 또한 김대중 후보의 워싱턴 정계 접근을 막기 위해 부지런히 로비를 펴고 있었다.
사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월남파병 등 한국 정부와 연관되어 있는 현안문제로 인해 한국 정부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71년 1월 28일 쉐라톤 파크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던 '콩그레셔널 디너'를 주목했다. 그 행사는 해마다 언론계가 주최측이 되어 대통령을 위시한 행정부 고위인사들, 상하 양원 지도자들과 중진급 의원들, 각국 외교사절 등을 초대해 신년하례식을 여는 자리였다. 1천여 명이 참석하는 이 행사는 단순한 신년파티가 아니었다. 초선의원들은 이 자리에서 연설함으로써 미국 언론계 주요 저널리스트들로부터 첫 평가를 받으며, 행정부와 의회 지도자들도 이 행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선거전에서 상당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미국 국회의원들은 콩그레셔널 디너에 초청받기 위해 상당히 노력한다.
콩그레셔널 디너의 주최권은 전통적으로 미국 여기자협회( national women's press club)가 가지고 있다. 이 단체는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부터 역대 대통령 부인들이 명예회원으로 참여해 온 유서깊은 조직이다. 이 여기자협회는 뒤에 미국기자협회(anational press club)와 통합했다.
당시 나는 미국 여기자협회 부회장으로서 콩크레셔널 디너를 준비하는 위치이긴 했지만 갑자기 김대중 후보 일행을 위한 초청장을 마련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개최 두 달 전에 이미 참석자 명단을 확정해 그들이 앉을 테이블 위치까지 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 후보 일행의 좌석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특히 김대중 후보 부부의 자리는 닉슨 부부가 앉는 헤드테이블 바로 앞이어야 했다. 나는 텍사스의 보수 유력지 [텍사스 신문] 워싱턴 특파원 사라 메크렌든이 배정받은 좌석들이 바로 그 위치임을 알아냈다. 그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부터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하면서 기자회견 때마다 예사롭지 않은 질문만 던짐으로써 역대 대통령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미국기자협회 회장을 역임했기 대문에 좋은 자리들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사라,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면 영구집권을 꾀할거야 야당이 당선돼야 한국이 민주화 될 수 있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사라는 기꺼이 자신이 초청한 인사를 변두리 쪽으로 보내고 자기 테이블에 김대중 씨 부부를 앉혀 주었다. 나는 중간쪽에
배정받은 내 좌석을 정일형 의원에게 양보하고 뒤로 가서 앉기로 했다.
콩그레셔널 디너는 '블랙 타이 디너'였다. 즉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롱드레스로 최고의 정장을 해야 하는 자리였다. 이희호 여사는 한복을 입으면 되지만 김대중 씨에게 턱시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1월 28일 아침 나는 김대중 씨 부부를 예복 대여점으로 데려가 턱시도를 빌려 입힌 후 쉐라톤 파크 호텔로
향했다.
행사 시작 전에 행정부와 의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참석자들로 붐비는 홀을 피해 특별히 마련된 VIP룸에서 칵테일을 들며 자기네끼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메고 다짜고짜로 김대중 씨 부부를 VIP룸으로 데려갔다. 그 곳에서는 마침 포드 부통령 부부, 험프리 상원의원 부부, 로널드 지그러 백악관 대변이 부부 등 려러 인사들이 환담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김대중 후보를 소개하고 한국의 민주회복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부탁했다. 그들은 기꺼이 김대중 후보를 격려하고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VIP들과 두루 인사를 마치고 홀로 나오는데 김동조 주미대사와 마주쳤다. 김대중 후보 부부를 보더니 김동조 대사는 호되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김대중 후보가 미국 정계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는 것을 막는 총책임자가 바로 자신인데 김 후보가 콩그레셔널 디너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 VIP룸에까지 들락거리는 것을 목격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김대중 후보가 국무성을 방문해 로저스 국무장관과 면담하도록 하는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짝 긴장해 김대중 후보의 활동을 주목하고 있던 김동조 대사측의 방해로 결국 불발로 끝났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다른 차원의 작전이 필요했다. 목표는 백악관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힘들겠지만 이희호 여사의 방문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닉슨 대통령 부인 패트리셔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간곡히 부탁했다.
"미시즈 닉슨,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야당 대통령 후보를 만나 주십시오. 그녀는 미국의 스칼렛 칼리지를 졸업했고 오랫동안 YMCA 총무로 일한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패트리셔 닉슨과 내가 친분을 갖게 된 것은 67년 마이애미 컨벤션홀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취재 때부터였다. 당시 닉슨은 데이비드 록펠러와 대통령 후보 경선을 벌이고 있었다. UPI 통신의 여기자 헬렌 토마스와 나는 패트리셔 닉슨, 해피 록펠러(록페러 부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해피 록펠러는 마치 왕비 같은 자세로 테이블에 도도하게 앉아 있는 반면, 패트리셔와 두 딸 트리셔, 줄리는 계속 대회장을 돌며 음료수를 나르고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잡기 위해 열심이었다.
나는 페트리셔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한국하고 인연이 있지요?"
-"예에스, 헬렌 김(김활란)의 초청으로 이화여대를 방문했던 일이 있어요."
그녀는 반색을 하며 이화여대 방문 당시의 좋은 기억들을 열심히 얘기했다. 패트리셔는 그늘진 듯 한 표정과 바싹 마른 체구로 인해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을 풍겼지만 직접 이야기해 보니 매우 차분하고 인간미가 있는 여성이었다. 12세 이후로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손 좀 봅시다. 우리 동양에서는 손금으로 사람의 운명을 점칩니다."
그리고 그녀의 생년일시를 물어 사주를 짚어보니 태어난 해와 날, 시에 천권(天權)이 셋이나 들어 있었다. 나는 해피 록펠러가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페트리셔에게 말했다.
"미시즈 닉슨, 당신 손금과 사주를 보니 당신이 차기 퍼스트레이디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헬렌 토마스의 눈이 둥그레졌다. 패트리셔는 손을 꼭 잡으며 고마워했다. 패트리셔가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전당대회장은 "우이 원트 로키!( We want Rocky : 우리는 록페러를 원한다. 록키는 록펠러의 애칭) "록키! 록키! 록키!"를 외치는 연호 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모두가 록펠러의 승리를 점쳤다. 사실 나는 해피 록펠러가 하도 귀족같이 도도하게 굴어서 비위가 상했던 참이라 손금을 빌어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결국 닉슨은 메릴랜드 주지사 애그뉴를 러닝메이트로 받아들여 록페러를 제치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패트리셔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를 찾아와 "고맙다"면서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말했다.
"그게 당신의 운명입니다."
-"그래도 해피 록펠러 앞에서 그녀의 기를 죽여 준 것이 고마웠어요."
닉슨이 당선된 후 패트리셔 닉슨이 대통령 특사로서 중남미 등을 다닐 때 나는 수행기자로 여러 차례 동행했다. 그 때마다 패트리셔는 내가 자기 손금 봐 준 얘기를 미국 기자들에게 하는 바람에 미국 기자들은 틈만 나면 손금 좀 봐 달라고 했다. 보통 미국 사람들은 아무리 일관계로 친하게 지내도 자기 생년월일도 잘 안 가르쳐주는 사람들이다. 나는 손금 봐 주는 비지니스로 미국 기자들과 사적인 얘기들을 나누며 인간적으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이희호 여사를 만나 달라는 나의 부탁을 패트리셔는 선선히 들어 주었다. 그렇게 된 데는 나에 대한 배려도 있었겠지만 패트리셔 자신이 정의감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 시절 내내 자기 시간의 대부분을 흑인 빈민가의 아이들을 돌보고 노인들에게 양로원을 지어 주는 '헤드 스타트' 계획에 바쳤던 사람이다.
패트리셔의 동의를 받아낸 뒤에도 문제는 또 있었다. '미시즈 김대중' 이라는 이름으로 백악관에 들어올 경우 한국 대사관의 로비를 받은 국무성측 인사들에 의해 출입이 차단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미시즈 이희호'라는 이름으로 '쥬리 문 기자의 손님'으로 해서 백악관 기자실까지 내가 데려가면 패트리셔의 비서실장이 이희호 여사를 맞이하기로 계획을 정했다.
드디어 디데이인 71년 2월 3일. 내 손을 잡고 백악관 정문에서 기자실까지 걸어가는 이희호 여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문마다 총을 든 경찰이 지키고 있는 삼엄한 분위기였다. 실제로 백악관 경호팀은 다람쥐 소리 정도만 나도 발사할 태세였다.
드디어 이희호 여사와 패트리셔 닉슨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손을 맞잡았다. 패트리셔 닉슨은 이희호 여사의 손을 감싸 쥐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후에 패트리셔는 나에게 "쉬이 이즈 원더풀" (She is wonderful)이라고 했다.
사실 닉슨도 내심으로는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 세 번이나 나와 장기집권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3선 개헌을 눈앞에 두고 열렸던 69년 8월의 한미 정상회담을 워싱턴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그것도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연 것이다. 정상회담을 호텔에서 연 것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월남파병 등 미국의 국익이 걸린 문제가 있어 한미 정상회담을 열긴 했지만 박정희가 이를 3선개헌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닉슨측이 그만큼 신경을 쓴 것이었다.
나는 김대중 후보 일행이 워싱턴을 떠나는 날, 공항에서 이희호. 패트리셔 회동 사진을 전달하며 "닉슨측 입장도 있으니 공개하지 말고 반독재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데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사진이 며칠 후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당황한 민주공화당측은 주한 미 대사관에 격렬히 항의했다. 주한 미대사관측은 미 국무성에 이희호 여사가 백악관을 방문했었는지를 문의했다. 당시 국무성 한국과장은 도널드 레이너드. 그는 백악관의 방문객 명부를 확인하고 주한 미 대사관에 통보했다.
"미시즈 김대중은 백악관을 방문한 사실이 없다."
민주공화당측은 쾌재를 부르며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비난했다. 백남억 의장은 "[동아일보]에 보도된 사진은 두 사람의 사진을 각각 뜯어 붙인 가짜 사진"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패트리셔 닉슨이 두 손으로 이희호 여사의 오른손을 감싸 쥐고 있는 모습을 대체 어떻게 뜯어 붙인단 말인가. 도널드 레이너드 한국과장은 퇴임할 때 이 일을 회상하면서 "쥬리 문이라는 여성을 막지 못한 것이 재직 중 단 하나의 실수"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71년 3월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 이라는 한미 공수기동훈련이 한국에서 실시되었다. 워싱턴 특파원들은 이 군사훈련 취재차 미군 수송기 편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 가면 이희호 여사 백악관 방문 건으로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레야드 국방장관의 대변인 제리 프리러하임이 "군 수송기로 장관도 같이 간다"며 권하는 바람에 당시 이슈로 떠오르던 대한 군사원조 문제에 대해 레야드 장관과 회견할 욕심에 따라 나섰다. 예상대로 수송기 안에서 레야드 장관과 회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숙소인 조선호텔에 도착한 후 레야드 인터뷰 기사 송고차 [경향신문] 기자를 불렀다. 그런데 뜻밖에 경향신문사에 출입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이희호 여사와 패트리셔 닉슨이 만나는 사진이 게재된 [동아일보]를 펼쳐 놓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문 기자님, 이 사실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오 미국 대사관에 물어 봤어요?"
-"미 국무성에서는 이런 사실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이 없다면 없는 거겠지요."
중앙정보부 요원은 '틀림없이 문명자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심증을 가지고 나를 떠보기 위해 온 듯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모르겠다고 하니까 의아해 하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얼마 후 육영수 여사의 비서 나은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 마가렛트예요."
나은실은 플로리다에 유학했었는데 미국 이름이 마가렛트였다.
"잘 있어?"
-"우리 사모님께서 문 기자님을 꼭 점심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은실은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육여사를 바꾸었다.
-"문 기자님,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얼굴 좀 보고 싶어요. 문 기자님 좋아하는 조개된장국 아욱 넣고 끓여 놓을 테니 점심 잡수러 오세요."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정신이 없습니다. 취재 중에는 나가기 힘드니 미국 사람들 가고 나서 찾아뵙지요."
나는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이 끝나고 나서 출국하기 전날 청와대로 갔다. 나은실이 나와 맞으며 부탁했다.
-"쥬리, 우리 사모님께 세상 돌아가는 얘기, 쥬리가 아는 것 전부 좀 말씀 드려 줘."
"네가 하지 그래?"
-"나는 그런 용기도 없고.."
"알았어."
육여사는 약속대로 아욱된장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성품처럼 맛깔스러운 점심 식사였다. 나는 지은 죄(?)가 있는지라 되도록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는데 그 때마다 육 여사는 여러 가지 음식을 내오게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대만에서 가져왔다는 수박까지 잘 먹고 난 후 드디어 육 여사가 은근히 물어왔다.
-"이희호 여사가 닉슨 부인하고 만난게 사실인가요?"
"나는 모르지요. 그거야 이희호 씨에게 물어보세요."
-"김동조 대사가 '이 일은 문명자 기자가 주선한 걸로 안다'고 보고해 왔어요."
"그런 보고라면 나도 합니다."
나는 화제를 짐짓 딴 데로 돌리느라 정인숙 얘기를 꺼냈다.
"제가 미국에서 죽은 정인숙을 만나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세요?"
"한미부인회라고 미국 남자들하고 결혼한 한국 여성들 모임에 초청돼서 왔더군요.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길래 아이 아버지는 뭐 하냐고 물었더니 재일동포 사업가라고 합디다."
-"네에, 그래요."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는 그 아이 아버지가 정일권 총리라고 나왔던데요?"
얘기 중에 육여사는 못내 다시 궁금한지 또다시 닉슨 부인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문 기자님, 이희호 여사와 닉슨 부인이 만난 게 진짜 사실인가요?"
"글쎄 저야 알 수 없지요. 그러나 이번에 워싱턴에
돌아가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알아봐서 다음에 오면 알려 드릴께요."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귀국했을 때 육여사는 나를 다시 청와대로 불렀다. 물론 이희호.닉슨 부인 회동의 진상을 알고 싶어서였다. 나는 말했다.
"제가 가서 알아봤더니 만났다고 합니다."
-"국무성에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합성사진 아니예요?"
"우리나라에서도
외무부에서 영부인께 '이런 일 있었습니까. 저런 일 있었습니까' 하고 물을 수 있나요? 로저스 국무장관도 못합니다."
-"김동조 대사 말대로 문 기자님께서 혹시 주선하신 것 아닙니까?"
"아아니요."
나는 딱 잡아뗐다. 육여사는 "그래요?" 하면서 말을 마쳤는데 의구심이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육여사가 죽고 난 후 69년 박정희.닉슨 샌프란시스코 회담 때 요세미티에서 육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육여사님, 생전에 내가 거짓말한 것, 진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편히 잠드세요."
그리하여 이희호 여사와 패트리셔 닉슨의 면담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었는가 하는 문제의 진상은 그 부부와 나만이 아는 일로 땅에 묻혔다.
71년 김대중 후보는 사실상 승리했지만 박정희의 부정선거로 낙선했고, 그 후 고난의 세월이 시작됐다. 73년의 납치사건, 80년의 사형선고, 82년의 미국망명등 가파른 세월 동안 이희호 여사와 나는 '김대중 구출'을 위해 꾸준히 협력했다. 그것은 김대중 개인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98년 12월 20일 김대중 후보가 마침내 대통령 당선자가 된 다음날 나는 일산의 김대중 씨 자택을 방문해 그들 부부를 만났다. 남편보다 더 고생했고, 죽음을 앞둔 남편 앞에서도 결코 평정을 잃지 않으며 남편을 격려해 마침내 온 국민의 염원인 정권교체를 이루게 한 여성, 바싹 말랐으나 강인한 그 여성을 부둥켜안으며 나는 감격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 2장 김대중 납치 보도, 주미 중앙정보부 이상호 공사와의 악연
"김대중 취재가자" 하니 "나도 살아야겠다"던 주미 특파원
71년 4월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1백만 표도 안 되는 차이로 박정희 후보에게 패했다. 사실상 김대중의 승리였다. 이로써 그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김대중이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71년 5월 25일 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군산-광주간 고속도로(바로잡음: 광주-목포간 국도)에서 김대중의 차가 트럭과 충돌한 교통사고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교통사고를 위장한 김대중 살해 기도였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김대중은 일본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유신이 선포되던 72년 10월 17일 마침 그는 치료차 일본에 가 있었다.
다음 날 그는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실상 정치 망명을 선언한다.
11월 13일 김대중 씨는 도쿄를 떠나 미국으로 왔다. 해외에서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이고 박 정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일본보다 미국이 적격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씨가 워싱턴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다른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공항에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살아야겠다"던 한 특파원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대중 씨 곁에서 중책을 맡고 있으니 이런 현실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어쨌든 그 때 공항에 나간 것은 나와 동아일보의 권오기, KBS의 박성범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MBC 박근숙 보도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특파원, 거기 김대중 씨가 있죠?"
"네 어제 왔어요."
-"김대중 씨하고 점심 같이 먹었어요?"
"김대중 씨가 저녁에 왔는데 무슨 점심을 같이
먹어요?"
-"여기서 그렇게 보고가 됐는데..."
"누가 말도 안 되는 보고를 했군요."
-"앞으로 김대중이나 김형욱 같은 사람들은 좀 만나지 말도록 하세요."
"아니 기자더라 이 사람 만나지 마라, 저 사람 만나지 마라 하면 취재를 어떻게 합니까?"
다음 날 MBC 이환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짜고짜로 "문 선배, 나 좀 살려 줘" 했다.
"왜 그래요?"
-"중정(중앙정보부) 때문에 살 수가 있어야지."
"난 언제든지 특파원 안 해도 되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
이환의 사장은 나를 MBC에 끌어다 놓은 후 "왜 문명자를
자르지 않는가"라는 중앙정보부의 등쌀에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그 후 김대중 씨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교포들을 상대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국내외 민주화 운동가들을 규합해 유신반대 투쟁조직을 꾸리는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국땅에서 벌이는 이 같은 활동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순탄치 않았다.
73년 5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인터내셔널 홀에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 한국영사관 부영사가 15~16명의 폭력배를 데리고 2층 방청석에 진을 치고 있다가 날계란과 토마토케첩 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결국 FBI가 출동해 그들을 연행함으로써 사건은 막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73년 7월 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 미국 본부가 결성 되었다. 당시 분위기는 반유신운동 상황을 골백번 취재해서 기사를 보낸들 단 한 줄도 보도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역사의 현장을 지켜봐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같은 행사들을 충실히 취재했다.
이 날 행사에는 민주당 정권 때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돈 선생과, 역시 민주당 정권 때 유엔 대사를 지낸 임창영 박사 등 5.16 이후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벌여 온 민주 인사들이 대거 참가했다.
한민통 결성식에서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놓고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 내에는 이른바 '선 통일 후 민주화'를 주장하는 일단의 통일운동 그룹이 존재했다. 그런데 한민통 의장 김대중은 결성식에서 "박 정권이 통일을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는데 우리가 통일을 앞세운다면 그의 책략에 걸려드는 것"이라면서 '선 민주후 통일'의 방향을 명백히 제창했다. 또 일부에서는 '망명 정부'를 수립하자는 급진론도 제기 됐는데, 김대중은 역시 이에 명백히 반대했다. 박정권에는 반대하나 엄연히 대한민국이 존재하는데 그에 반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민통 결성식을 시작하기 전 돌연 임창영 박사가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좌중에 나누어 주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이북 정부의 초청으로 곧 평양을 방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 국무성이 아직 허가를 안 내주고 검토 중에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개인 자격의 방북이라지만, 그가 한민통의 일원이므로 김대중을 비롯한 반유신운동 전체가 북한의 사주를 받는 집단인 양 조작할 수 있는 빌미를 중앙정보부에 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나는 임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이 북한을 방문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갈라진 우리 국토가 통일되고 민족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이북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서방세계로도 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북은 서방외교 문제에서는 초년병입니다. 나는 유엔 대사를 지냈으므로 통일을 위해서 이북에 서방외교를 강화할 것을 조언하고 방법을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김대중 의장의 의외의 사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도 민단 내의 민주화운동 세력만을 규합했을 뿐 재일총련 쪽과는 철저하리만큼 손을 끊고 활동해 온 사람이었다. 그 모두가 사상 문제를 가지고 자신을 옭아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박정권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런 판에 한민통의 주요 참여 인사인 임 박사가 방북길에 오른다고 했으니 그가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김대중 씨는 "중앙정보부가 박사님의 방북을 민주화운동을 음해하는 데 악용할 것이니 방문을 중단해 달라"고 누누이 부탁했다.
임창영 박사는 "외세 지배하의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민주화도 없다"는 소신을 가진 통일 운동가였다.
김대중 의장의 부탁 때문이었는지 혹은 미 국무성의 불허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방북을 3년간 연기했다. 임 박사는 평생을 통일운동가로서 활동하다 96년 별세했다.
임창영 박사는 김대중 씨가 73년 8월 8일 도쿄에서 납치되었을 때 우연히 도쿄를 방문하고 있었다. 김대중 씨 납치 사건에 접한 그는 바로 그 사실을 미 국무성의 도널드 레이너드 한국 과장에게 알려 미국 측이 한국 중앙정보부에 압력을 넣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김대중 씨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감사의 인사도 받지 못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북한을 드나드는 통일운동가 임창영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임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불만도 표한 일이 없다. 김대중이 그와 같이 처신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 민족의 또 하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7월 7일 한민통 미국 본부를 결성하고 난 뒤 김대중 씨는 8월 15일을 기해 일본 본부 결성을 위해 도쿄로 갈 계획이었다. 도쿄로 출발하기 직전 그는 우리 부부에게 항공우편 봉투에 든 편지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이런 편지가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 도쿄 신주쿠의 소인이 찍힌 그 편지 내용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김 선생, 김 선생을 납치해서 암살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절대 조심하셔야 합니다."
편지에는 김대중 납치 계획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쓴 것을 보니
이것은 틀림없이 중앙정보부 내의 양심세력이 보낸 것 같습니다.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대중 씨가 말했다.
-"미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나를 계속
미행했습니다."
7월 10일 김대중 씨는 일본으로 출발했다. 박정희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김대중 씨가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당한 73년 8월 8일 나는 멕시코의 해변도시 아카풀코에 있었다. 아카풀코는 멕시코가 자랑하는 세계적이 휴양지다. 당시 나의 딸 줄리아는 열한 살, 아들 리처드는 열 살이었다. 정신없는 특파원 생활로 아이들이 그 나이가 되도록 여름 휴가라는 것을 가 본 적이 없었다. 한 해도 여름 휴가 안 가고 배기지 못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아이들로서는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국 외무장관은 유엔 외교차 남미를 돌곤 했다. 그 해에 김용식 외무장관은 멕시코를 방문했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외무장관 수행 취재 때 아이들을 맡겨 놓고 취재를 마친 후 그들 부부와 함께 아카풀코에 들러 여름 휴가를 보내고 올 생각이었다.
계획대로 취재를 마치고 이창희 대사 부부와 함께 아카풀코 해변의 한 호텔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새벽,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 나가려던 참이었다. 워싱턴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여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시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김대중 씨가 도쿄에서 없어졌소. 틀림없이 중앙정보부의 짓이오. 김대중 씨는 평소에 수첩에다 중요한 사항들을 깨알같이 메모해서 다니는 사람인데 그 수첩도 지금 중앙정보부 수중에 들어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한민통 미국 본부 결성에서 당신이 한 역할도 이미 다 파악 되었을 것이요. 당신 신변에도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이창희 대사 부부에게는 아무 얘기 하지 말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당장 미국으로 돌아오시오. 아무리 친구라 하지만 그들 부부는 국가 공무원 아니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그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오."
"알았어요."
충격 때문에 나는 잠시 휘청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설마 했는데 남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대낮에 야당 지도자를 납치해 가다니. 이게 내 조국이 하는 짓인가.
발리 해변으로 나가자며 내 손을 잡아끄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정말 급한 일이 생겼어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해. 미안하다."
울상을 지으며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이창희 대사 부부에게 갔다.
"대사님. 본사에서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네요. 무슨 비상사태가 터졌나 봐요."
그런데 이창희 대사는 이미 소식을 들은 듯 했다.
-"소식 들으셨군요. 빨리 가 보십시오."
급히 짐을 챙겨 들고 아이들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휴가철 세계적인 휴양지에 미국행 비행기 표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급한 김에 공항 카운터 직원을 붙들고 사정했다.
"여보세요. 나는 MBC 특파원인데 본사에 급한 일이 있어 빨리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비상용으로 남겨 놓은 표 좀 풀어주세요."
그러자 공항 카운터에 앉은 여성의 표정이 달라졌다.
-"NBC 리포터라구요?"
그러더니 그녀는 없다던 표를 선선히 끊어 주었다.
MBC를 미국 NBC로 잘못 들었던 것이다.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못들은 것을 어찌하랴. 어쨌든 그녀 덕분에 바로 워싱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돌아오니 남편은 사색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놓고 바로 국무성으로 나갔다. 기자실에 가서 AP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에게 물었다. 그는 과거에 도쿄 지국장을 지냈기 때문에 한국 문제를 많이 다룬 기자다.
"국무성 기자회견 때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질문했나?"
-"중동 문제 때문에 유태계 기자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질문을
퍼붓는 통에 물어 볼 시간이 없었다."
"다른 코리안 기자들은 질문 안하던가?"
-"아니, 그런 질문 없었다."
나는 분통이 터졌다. 당시 워싱턴에는 10명이나 되는 한국 특파원이 주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가 없었다니.
이 날 12시 정례 기자회견 때 바로 국무성 대변인에게 질문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가서 현재까지도 그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대변인은 바로 답했다.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실종된 것은 사실인데 우리는 현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중이다."
나중에 들으니 국무성에서는 기자회견 때 쥬리 문이나 스펜서 데이비스가 반드시 질문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답을 준비했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한 시간쯤 지난 후 주미 한국대사관 이상옥 정무참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기자님, 오늘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하신 질문 내용은 무엇이며 대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가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를 납치해 갔다"고 질문했다는 얘기를 벌써 전해 듣고 그가 전화로 문의해 온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혔다.
"기자가 기자회견에서 질문한 내용까지 대사관에서 조사합니까? 정 알고 싶으시면 국무성에 오늘 기자회견 질의응답에 관한 풀 텍스트 나와 있을 테니 그것을 베끼세요."
-"복사는 안 됩니까?"
"네 안돼요."
전화를 끊고 났더니 연신 전화벨이 울려댔다. 일본 각 신문사와 통신사 기자들의 질문 전화였다. 71년 김대중 씨가 워싱턴에 왔을 때 내가 그를 도왔던 사실을 알고 있던 그들은, 그의 행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 가지였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 암살하려는 것이 분명한데 어디로 끌고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날 이후 날마다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질문했다. 미국의 정부기관은 기자회견에서 나온 질문에 대해서 반드시 답변을 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답변하기 어려운 내용이면 사후에 서면으로라도 답변해야 한다. 그 때문에 기자회견에서 문제화하면 관계부처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내가 그 같은 질문을 계속한 이유는 한국 언론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고 있는 판에 납치 사건 발생국이 일본 언론들이라도 사건을 이슈화해 주기를 기대해서였다. 다행히도 일본 언론들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들은 백주 대낮에 일본 주권을 침해하면서 김대중을 납치해 간 한국 정부의 처사에 대해 규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나 경찰도 사건에 대해 '자작극'이니 '북괴의 음모'니 하는 말을 다시 하지 못하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나오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 민단 간부이면서 민주화운동가인 배동호 씨, 김재화 씨 등이 주동이 되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는 '김대중 구출운동'을 집요하게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구출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씨가 없는 가운데서도 한민통 일본 본부 창립식을 예정대로 치러 그 단체의 명의로 운동을 진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고 최선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결성식이 73년 8월 13일 일본 각지에서 1백여 명의 대표들이 도쿄에 모여들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민통 일본 본부가 결성되어 8월 13일, 김대중 씨 가 돌연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기보다는 납치범들이 그를 동교동에다 데려다 놓고 연금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건 중에서도 어김없이 광복절이 돌아왔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광복절 기념 파티가 열렸다. 나는 당시 워싱턴 대한부인회 회장을 맡고 있던 언니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다. 김동조 대사 부인 송두만 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언니가 옆에 와서 쿡쿡 찔렀다.
"왜 그래? 언니"
-"얘 아까부터 저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너를 째려보고 있어."
힐끗 돌아보니 주미 한국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이상호(가명 양두원)였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째려보면 어때?"
-"얘, 무서운 얼굴이다."
그가 나를 째려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를 납치했는데'라고 발언한데다가 이상호 공사의 부하 몇 명이 사건 발생 시점에 도쿄로 갔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상호의 무서운 얼굴과 함께 나의 수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 선배, 김포에 도착하면 이후락이가 바로 잡아넣는답니다."
김대중 씨가 자택으로 돌아온 후 중앙정보부는 워싱턴의 교포 사회에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자작극"이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납치 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리 보내 봐야 말짱 헛일이었다. "문 특파원, 그 기사는 보도 관제가 되니 그 건은 보내지 마시오"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나는 '뉴스 시간에 한번 때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73년 10월 뉴욕에서 유엔총회가 열렸다.
총회 기간에 유엔플라자 호텔에서 한미 양국 장관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있었다. 한국측에서는 남덕우 씨를 비롯해 몇몇 장관들이 참석했고, 그 날의 연설자는 주한 미대사를 역임한 포토 국무차관이었다. 그 날 아침 국무성으로부터 연설문을 미리 입수해 읽어보니 '김대중 납치사건'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한일간의 불행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고마운 포터!
회의 시간에 맞춰 유엔 플라자 호텔로 갔다.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는 유엔 본부입니다. 오늘 회의에서 포터
국무차관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경의를 표하면서.. 한편 포터 차관은 한일 양국간의 불행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워싱턴에서 문명자였습니다."
처음부터 김대중 사건 관련 멘트가 나가면 보도국에서 잘라 버릴 것 같아 '경제성장 찬양' 발언을 먼저 보도하고 끝에다가 김대중 사건 관련 내용을 슬쩍 연결 시켰다. 짐작한대로 이 녹음은 MBC 뉴스 시간에 삭제 없이 보도 되었다.
나는 계획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흐뭇해하면서 유엔 취재를 계속 했다. 73년은 북한이 최초로 유엔대표부를 개설한 해다. 당시 사상 처음으로 북한측 유엔대표단이 유엔에 도착해 있었다. 유엔총회 제 1정치 위원회에는 한국 문제가 상정되었다. 총회에서는 북한 측이 낸 '공산측 결의안'과 미국 등이 낸 '서방측 결의안'을 놓고 일대 설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 관련 기사 녹음을 마친 후 서울 보도국 기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금 야단났어요. 문 특파원이 보낸 어제 기사 때문에 연일 중역회의가 열리고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서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벌어졌단다. 김대중 납치 사건을 보도하는 필자의 육성이 나가기 시작하자 중앙정보부가 전파 방해를 해서 한때 방송이 지지직 거렸으며 당시 뉴스를 담당했던 기자와 기사들이 중정에 끌려가 호되게 당했다는 것이다. 내가 유엔 기사를 보낸 후 통화한 보도국 기자는 전화 도청이 두려워서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얼마 후 본사로부터 귀국하라는 지시가 왔다. 나는 기자로서 본분에 하등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기사를 보내 봐야 한 줄 보도되지 않는 특파원 생활에 더 이상 미련도 없었다.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남편도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한국 동료들과 미국 동료들이 마련해 준 송별회도 많이 얻어먹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주미 한국대사관에 교육감으로 새로 부임한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 줄리아와 리처드는 늘 바쁜 부모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들을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편입신청서도 보냈다.
그러던 73년 11월 7일 새벽 3시경 난데없이 도쿄에서 콜렉트 콜 (수신자 요금부담 전화)이 걸려왔다. MBC의 가까운 후배 기자였다.
-"문 선배, 나요. 지금 미국 출장 가다가 도쿄에서 거는 겁니다. 귀국준비 중이시라면서요. 문 선배가 김포에 들어오기만 하면 바로 잡아넣는다고 이후락이가 벼르고 있답니다. 들어오지 마십시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이후락의 교활한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놈이 나를 잡아넣는단
말인가.
그 날 밤 내내 생각했다. 서울로 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 남을 것인가. 당시 나는 영주권도 없었다. 특파원 신분으로
체류비자를 1년 단위로 연장하고 있었다. 영주권을 받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국적을 바꾸는 것은 성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한국인으로 살 생각이었다. 백악관 기자실에서 밤낮으로 뛰었던 것도 한국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조국이 나를 잡아넣겠다는 것이다. 분했다. 한밤중에 앨범을 뒤졌다. 하와이에서 박정희. 존슨 회담 때 박정희와 같이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갈갈이 찢어버렸다.
이 자 때문에 내가 성을 갈게 생겼다. 도무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날 밤 나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나는 기자다. 나는 사실을 보도해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역사의 진실을 알게 하는 본분을 가진 사람이다. 유신체제 이후 한국의 언론인들은 모두 재갈이 물리거나 권력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박 정권은 김대중 납치사건 보도를 문제 삼아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까지 폐쇄해 버렸다. 이런 시대에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우리 국민의 알권리를 지켜주고 한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망명을 결심했다. 다음날 11월 8일 국무성에서 나는 정치 망명을 선언했다. UPI 통신, [뉴욕타임스] , 아틀란타[콘스티튜션] 등 미국 신문과 일본의 [아사히], [요미우리] 등이 '한국의 MBC 워싱턴 특파원, 미국에 정치 망명'이란 기사를 타전했다.
그 후, 나는 미국인 동료 세 사람과 함께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UA Asian News Service)라는 통신사를 설립했다. 망명 후 필자가 쓴 첫 기사가 [나는 KCIA를 고발한다] ([주간 요미우리] 73년 12월 1일자) 였다. 사건조사 전문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전해들은 청와대 이야기 한토막을 옮겨 본다. 비서실장이 "각하, 문명자 기자가 미국에 정치 망명을 선언했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신탄진 담배에 막 불을 당기려던 박정희의 손이 달달 떨렸다고 한다. 잠시 후 박정희가 입을 뗐다.
"이후락이 불러"
이후락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그를 몹시 질책했다고 한다.
"문 기자는 청와대에 와서도 담배에다 침 발라 빨부리에 꽂아 피우면서 영어 일본말 뒤섞어서 자기 할 말 다 하고 가는 사람이다.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이 지경이 됐나?"
망명을 선언한 후 나는 무국적자가 되었다. 한국 국적을 가질 수도 없었고,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기도 싫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의 어려운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도와주었다. 특히 닉슨 대통령 부부의 도움을 잊을 수 없다.
고생해 본 사람이 고생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는 법이다. 패트리셔 닉슨은 켄터키의 가난한 광부의 맏딸로 태어나 술고래 아버지 대신 13세 때부터 가족을 부양했던 여성이다. 그녀는 겉보기에는 바싹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겼지만 실제 인품은 정반대다. 내가 본 어떤 미국 대통령 부인보다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74년 초인 것으로 기억된다. 함병춘 주미대사가 새로 부임해 와 백악관에서 신임장 제정이 있었다. 원래 신임장 제정은 각 나라 대사를 몇 명 모아서 같이 하게 마련이다. 함 대사의 차례가 되어 비서실장이 말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다음 순서는 한국입니다"
그러자 닉슨이 갑자기 두리번거리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쥬리 문이 어디 있지?"
패트리셔 닉슨도 덩달아 찾았다.
"쥬리 문? 어디 있어요?"
필자는 그 때 현장에 없었다. 신임장을 제정하고 대사관에 돌아온 함병춘 대사가 물었다.
-"쥬리 문이 누구요?"
동아일보 이웅희 기자가 답했다.
"쥬리 문이 문명자씨 아닙니까?"
그러자 함 대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이쿠, 나 대사 하기 글러먹었구나."
닉슨이 한국대사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망명 기자 쥬리 문을 찾았던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 후에도 여러 번 닉슨 부부는 나를 한국 정부로부터 방어해 주었다.
이 기회에 바로잡을 일이 한 가지 있다. 닉슨의 큰 딸 트리셔가 결혼할 때 나는 한국의 언니로부터 선물 받은 병풍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한국의 아름다운 실크 스크린'이라며 뉴욕의 자기 집 식당에 그 병풍을 쳐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쥬리 문으로부터' 라는 글귀를 붙여 놓았다. 그런데 말이 잘못 전달되었던지 한 미국 신문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트리셔 닉슨의 집에 있는 동양의 아름다운 실크 스크린은 코리언 리포터 쥬리 문이 몇 년에 걸쳐 수를 놓아 선물한 것이다."
덕분에 자수바늘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내가 병풍을 수놓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74년 8월 9일 마침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사실 민주당 선거본부의 문서를 도둑질한 워터게이트 사건은 과잉충성파들이 저지른 악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런 짓까지 하지 않더라도 닉슨은 무난히 재선되었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하고 닉슨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나는 미국인들의 또 하나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CBS의 빌 헬드만 기자는 닉슨 부부와 특별히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사람이다. 그는 닉슨 부부의 중매로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정도였다. 그랬던 헬드만이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안면을 싹 바꿨다. 기자회견장에서 정색을 하고 "미스터 프레지던트?" 하면서 공세적인 질문을 퍼부어 닉슨을 괴롭혔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헬드만에게 말했다.
"헤이 빌, 너는 한국말로 하자면 의리란 게 없어."
-"의리가 뭐냐?"
그러자 나는 말이 막혔다. '의리'란 말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사전을 뒤졌다. 역시 사전에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표현을 동원했다. '신의' '의무' '배신하지 않는 것' 등등 그러나 부족했다. 미국인의 사전에 '의리'란 없었다.
73년 11월 8일 정치 망명을 선언한 후 내가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74년 11월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있었던 포드 대통령 방한 때였다. 당시 포드는 일본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 순방 일정 속에 한국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워싱턴 정가에서는 뜨거운 찬반양론이 벌어졌다. 대공산권 반공 교두보로서 박정희 정권이 필요하면서도 그 같은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것처럼 비치기는 싫은 게 미국의 딜레마였던 것이다.
결국, 포드 행정부는 "북한이 오판하는 일이 없도록 일본 방문 후에 한국을 방문한다. 그러나 미국은 박 정권의 독재정치와 인권침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한국 방문 사유를 발표했다. 망명 후 나는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 소속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포드의 방한이 확정된 후 나는 이 기회에 서울에 갈 것을 결심하고 백악관 기자단에 포드 수행을 신청했다. 정치 망명 당시 "박정희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독설을 퍼부었던 내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동료 미국 기자들은 무모한 행동이라며 극구 만류했으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악관측은 나의 수행신청을 이의 없이 환영해 주었으나 FBI는 크게 우려했다. 나의 신변안전을 담당하던 수사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쥬리, 당신은 박정희 정부의 지명수배 1호(Wanted No. 1)야, 극히 조심해야 돼."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아이들을 떼어놓을 때였다. 줄리아와 리처드는 내가 서울에 간다는 사실을 알자 울며 매달렸다.
-"마미, 마미, 박정희가 마미를 죽일 거야. 가지 마! 가지 마!"
나는 우리말도 못하는 어린 것들이 영어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들에게 조국이란 무엇인가. 엄마를 죽이려는 악당들이 우글거리는 곳일 뿐인가. 나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말꼬리를 돌렸다.
"헤이 줄리아, 리처드, 엄마가 한국 가서 고무신 사다 줄게."
-"노오우!"
아이들은 여전히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도 역시 아이들이라 고무신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표정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데 한민통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이건팔 씨가 찾아왔다.
"문 여사님, 진짜로 가실랍니까? 일이라도 당하시면 어떡하실라구요?"
나는 다짜고짜 말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요. 기도나 해주세요."
나의 한국행은 첫 번째 관문인 일본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1월 18일 월요일 아침 워싱턴 출발이 예정돼 있었는데 11월 15일 금요일 오후까지 일본 외무성이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나는 박정권이 일본 외무성의 부패한 관리들에게 압력을 넣어 벌인 짓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일본 입국이 안 되면 한국 입국은 자연히 좌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안면이 있던 일본 기무라 외상에게 전화를 걸어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는 이유를 밝히라고 했다. 기무라 외상은 물론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의 지시로 토요일인 16일 오전 일본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날 오후 백악관 담당자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쥬리, 이번에는 한국에서 말썽이야."
나는 한국대사관의 유종화 영사과장에게 전화를 해 따졌다.
"일본 비자도 나왔는데 한국 비자를 안 내주는 이유가 뭐요?"
옥신각신 끝에 그는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30분 후에 전화해서 "대사관으로 오라"고 했다. 한국 대사관으로서는 일본행만 막으면 내가 한국에 못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본 쪽에서 뚫리고 보니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국대사관에 미 국무성이 발행한 나의 무국적 망명객 여권을 내밀었다. 유 과장은 거기에다 1개월 여행비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는 말했다.
"무국적 망명객의 여권에 비자 도장 찍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길 빕니다."
11월 22일 포드 일행과 함께 드디어 서울로 향했다. 김포 상공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 김포 상공에서 고국산천을 내려다 본 것이 이미 수십 차례였지만 망명객이 되어 무국적 여권을 들고 조국을 찾은 감상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백악관 기자단에서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쥬리, 김포에 도착하면 옆에 있는 백악관 기자들이나 경호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도록 한국 사람에게 항상 영어로 말하도록 하시오."
백악관 공보실 담당자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30분마다 한 번씩 나에게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됐는지 그는 조선호텔에 도착하자마자 30분마다 "쥬리 문, 쥬리 문, 공보실로 연락하시오" 하고 방송을 했다.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공군 1번기)에 앞서 기자들의 전세기가 1착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비행기에서 내려 기자석으로 걸어가는데 인상이 험악한 젊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자신은 공항장이라면서 말을 걸었다. 분위기로 봐서 중앙정보부원 같았다.
-"1개월 비자를 발급 받으셨던데 서울에 잔류하실 계획입니까. 아니면 포드 대통령과 함께 떠나실 계획입니까?"
아예 묵살하려다가 "내가 온 목적을 잘 아실텐데?" 하고 말해 주고는 휙 돌아서서 취재를 시작했다. 사진을 찍고 취재수첩을 기록하는 동안에도 문제의 '공항장'과 몇몇 남자들이 내 주위를 따라다녔다. 나는 취재하는 척하면서 한국 기자석으로 들어갔다. 한국 기자들이 곧 알아보며 인사를 청해 왔다.
-"00 신문사 000기잡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문 선배께서 와 주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용기 백뱁니다."
처음 보는 젊은 후배기자들은 눈을 부라리는 중정요원들의 감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숙소인 조선호텔에 가보니 백악관 선발대가 잡아놓은 내 방이 하필이면 엘리베이터 바로 옆방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문명자 씨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도착한 것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성가신 전화는 계속 걸려 왔다. 보다 못한 UPI 통신의 백악관 출입기자 헬렌 토마스가 "내 방으로 가자" 고 하기에 짐을 옮겨놓고 프레스센터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역대 주미 특파원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이들은 백악관 수행기자단들을 옥류장 기생파티에 끌고 가려고 꼬이고 있는 중이었다. 역대 주미 특파원들이 중앙정보부의 뚜쟁이로 동원된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낯 뜨거운 노릇이었다. 다행히 수행기자단 중 한 명도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 날 오후 6시 30분부터 중앙청에서 스테이트 디너파티가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해 김대중 씨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래서 백악관 여비서 두 명을 데리고 반도조선 아케이드에 자수정 쇼핑을 나갔다가 조선호텔 미용실로 들어갔다. 중정요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그 곳에서 나는 김대중 씨 집에 전화를 걸었다. 거친 음성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김대중 씨 집에는 2명의 정보부원이 상주하면서 전화를 받는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싶었다.
"김대중 의원 계십니까?"
-"안 계십니다."
"이희호 여사는 계십니까?"
-"외국 손님이 있어 바쁩니다."
"좀 바꿔 주십시오."
-"누굽니까?"
"워싱턴의 문이라면 압니다."
그러자 없다던 김대중 씨가 직접 나왔다.
-"웬일이요? 어디서 거는 거요?"
"서울입니다. 포드 대통령 수행차 왔는데 조선호텔에 있습니다. 찾아뵈려는데 몇 시가
좋을까요?"
-"6시부터 기다리겠습니다."
말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곧바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 끊으셨어요?"
-"아니, 이러는 게 보통 있는
일이라구."
"그럼 상세한 것은 만나서 말씀 듣지요."
나는 [LA타임스] 동경지국장인 샘 제임슨 기자와 함께 김대중씨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이전에 김대중 씨 집을 수차례 방문해 인터뷰를 했던지라 지리에 밝았다. 그와 나는 중정요원들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추운 날씨임에도 외투를 걸치지 않고 호텔 아케이드에 쇼핑하러 가는 척하며 지하도로 내려와 덕수궁 앞으로 가서 얼른 택시를 잡아탔다. 동교동 김대중 씨 집 골목 입구에 내린 후 나는 샘 제임슨과 부부처럼 보이도록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김대중 씨 집 앞에 있는 약국 옆에 검은 세단이 서 있고 그 안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제임슨 기자는 "한 달 전에 왔을 때도 저들이 있었다"면서 "한국 사람이 김씨 집에 들어갔다 나오면 저 차로 실어갔다"고 말해 주었다.
김대중 씨 집 10미터 앞까지 걸어갔을 때 경찰이 개미떼처럼 담장에 붙어 있슴을 알 수 있었다. 제임슨이 말했다.
-"쥬리, 전에
왔을 때하고 상황이 다르다. 꼭 영어만 해라."
그 때 갑자기 깡패같이 보이는 가죽잠바 차림의 7명의 젊은 남자들이 전봇대 뒤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막아섰다. 그 중 한 면이 나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꽉 잡았다. 그를 뿌리치며 나도 모르게 우리말로 소리쳤다.
"이거 놔!"
나는 사실 가죽잠바 요원들을 실제로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온몸이 떨렸다.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데 격분한
제임슨 기자가 그들을 밀쳐 내며 소리쳤다.
-"너희들 뭐야? 비켜! 우리는 가야 한다."
상관인 듯 한 사내가 소리쳤다.
"야! 세 명이서 반짝 들고 가!"
그 말에 나는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켜들고
소리쳤다.
"뭐, 반짝 들고 가? 이놈들아? 어디 들어 봐? 들어 봐?"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휘둘러 젊은 남자들의 배를 차례로 호되게
때렸다.
상관인 듯 한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자동차에 집어넣어!"
"실어!"
그 말에 나머지 젊은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그들을 밀쳐 내며 악을 썼다.
"찔러! 이 새끼들아! 내
조국에서 피 흘리고 죽는 게 소원이야! 찔러 이 새끼야!"
샘 제임슨이 놀라서 소리쳤다.
-"헤이 쥬리, 레츠 고우
홈!"
숙소인 조선호텔로 돌아가자는 얘긴데 급하니까 집에 가자고 소리쳤던 것이다. 나는 그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젊은 남자들과 밀고 당기며 결사적으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김대중 씨 집 대문이 열리며 이희호 여사가 나왔다. 그 순간 너무나 격해서 달려가 이희호 여사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때 50세쯤 돼 보이는 사내가 나타나 3분만 얘기하자고 했다. 이희호 여사가 말했다.
"왜들 이러십니까? 주인께서 기다리시니 손님을 모시고 들어가야겠소."
-"안됩니다."
"지금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국가의
장래를 얼마나 해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멀리 미국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권리를 무슨 근거로 박탈하겠다는
겁니까?"
-"상부의 지시입니다. 저희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다시 40여 분간 육박전에 말싸움을 벌였지만 검은 잠바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우리는 김대중 씨 집 안으로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었다. 김대중 씨 역시 집 안에서 두 명의 정보부원에게 제지당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희호 여사에게 말했다.
"이 여사님,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가겠습니다."
이희호 여사도 곧 눈물이 쏟아질 듯한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오셨다가
들어가시지도 못하고... 안에서 기다리시는데..."
이 여사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우리의 뒤통수에다 대고 검은 잠바들이 내뱉었다.
-"굉장히 힘도 쎄구먼."
23일 새벽, 포드 일행은 출발을 서둘렀다. 나 역시 조선호텔에서 기자 전용 버스로 공항으로 떠났다. 연도에는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외투도 입지 않은 어린 중학생들이 떨면서 환송 나와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젊은 사람 하나가 내게 다가와 둘둘 만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저는 조선일보에 있습니다. 오직 우리 신문만 문 기자님이 오셨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보십시오."
다시 다른 한국 신문들은 보도 통제로 내가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일절 보도하지 못했는데 오직 [조선일보]만이 포드 방한 기사 속에 슬쩍 "이번 외신기자 중 전 문화방송국 주미 특파원이었던 문명자 씨가 끼어 있어 눈길을 끌었는데 그는 유에스 아시안 뉴스 특파원 직함으로 한국에 온 것"이라고 썼다.
내가 미국 기자단 자리에 서 있는데 하비브 국무차관보와 함께 있다가 나를 발견한 정일권 국회의장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그는 61년 주미대사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다.
-"하우 아 유, 쥬리 문! 오랜만이오."
그는 내 뺨에다 청하지도 않은 입맞춤을 한 후 말했다.
-"왜 온다는 것을 미리 알리지 않았소, 알았으면 특별초청장을
냈을 텐데..., 어제 저녁이라도 같이 하려고 김종하 비서실장([신아일보] 기자출신)을 보냈더니 아무리 찾아도 안 계시더라고
하더구먼."
나는 쏘아 붙였다.
"김대중 씨 집에 갔었지요."
-"아 그래요."
그런 경우 결코 "거긴 왜 갔어요?" 하고 따져 묻지 않는 것이 정일권이란 인물의 특성이다.
"거기서 당신네 깡패놈들에게 기막힌 해러스먼트(귀찮게 달라붙기)를 당했구요."
-"테러블! 그럴 리가 있나. 그러지
말고 문 기자, 귀국해서 함께 일합시다."
국회의원 및 각료들의 자리인 맞은편 붉은 카펫 위에 서 있던 최경록 교통부 장관이 손을 휘저으며 다가오려고 했다. 그는 5.16 직후 워싱턴 동지들과 함께 백악관 앞에서 매일 반대 시위를 벌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귀국해 박정희 밑에서 장관으로 지내고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내 주변에 오지 마세요. 출세에 지장 있으니까."
그 때 박준규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노진환 유정회 의원과 함께
헤헤 웃으며 다가왔다. 그와 나는 같은 대구 출신으로 서로 말을 놓고 지내던 사이였다.
-"유(you)는 무국적이라면서?"
"너희들 때문에 그렇다."
-"이것 봐. 그만큼 하고 싶은 얘기 다 하고 쓰고
싶은 글 다 썼으면서도 아직도 분이 안 풀렸어? 이제 그만 돌아와서 손잡고 일하자."
그 때 노진환이 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하려 했다. 나는 들고 있던 둘둘 만 [조선일보]로 그의 배를 마구 찌르면서
소리쳤다.
"나가!"
그리고 박준규에게 빈정거렸다.
"그래 저 노진환이는 워싱턴 교민회장 하면서 정인숙이를 안팎으로 돌봐준 공로로 유정회 배지 하나 얻은 모양인데, 그래 당신은 공화당 정책위 의장이라면서 저런 협잡꾼 배지 하나 못 떼나? 그러면서 나더러 손잡고
일하자고?"
그러던 차에 박정희가 나타났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그 때 나는 안경 위에 선글라스가 붙어 있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평소에는 선글라스 알을 위로 올리고 있다가 햇볕이 강해지면 내려닫아서 쓰도록 되어 있는 제품이었다.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이 즐겨 쓴다고 해서 '플브라이트 안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는 인사를 건네는 박정희를 빤히 쳐다보며 그 때까지 올리고 있던 선글라스를 탁 내리고 아무 대답 없이 휙 돌아서 버렸다. 박정희는 아마 속으로 '저런 지독한 년'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한데 그것은 나도 어쩌지 못하는 내 기질이다.
키신저 국무장관 "다나카 정도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후일담 하나. 76년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에서 키신저
국무장관과 수행기자단이 비공식 회견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당시는 록히드 스캔들에 돌연 휘말린 일본 다나카 수상의 운명에 외신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기자들은 키신저를 물고 늘어졌다.
"다나카는 오래 갈 것 같은가?"
키신저는 아주 오만한 자세로 답했다.
-"다나카 정도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순간 나는 무척 당황했다. 키신저의 말은
계속됐다.
-"그는 매우 건방지다. 미국을 뒤따라오면서 일.중 관계를 개선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미국을 앞질러 일.중 관계를 개선했다."
73년 미국은 미.중 관계를 정상화 했지만 대만과의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중국에 대한 지렛대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러나 미.중 관계 정상화 작업을 예의 주시하던 일본은 황소 머리 위에 올라탄 쥐가 천릿길을 다 가자마자 목표점에 먼저 뛰어내린다는 식으로 대만과 단교하면서 일.중 관계를 정상화해 버렸다. 다나카가 건방지다는 키신저의 말은 바로 그 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키신저에게 물었다.
"헨리, 록히드 스캔들도 당신이 벌인 것 아니야?"
나는 아직도 그 때 그의 답변하던 표정과 억양을 잊을 수가 없다.
-"오브 코오스(그거야 물론이지)."
일본 국회가 떠나갈 듯 시끄러웠던 록히드 사건 정보는 먼저 미국 의회에서 터져 나왔다. 록히드사로부터 다나카가 받은 돈은 불과 3백만 불(?) 평소 일본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규모로 보면 그리 대단한 액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수뢰가 사실로 확인되고 언론과 국회가 들고 나서면 문제가 된다. 키신저는 다나카 문제에 대해 마치 재벌그룹의 오너 회장이 월급쟁이 사장 하나 잘랐다는 투로 말했다. 결국 그 후 다나카는 사임했고 후쿠다 내각이 출범했다.
나는 1992년 일본 정가에서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사태를 목격했다 90년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인 가네마루 신이 사회당 다나베 의원과 함께 조.일 수교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그 때 다나베 의원은 먼저 귀국하고 가네마루만 하루 더 머물며 묘향산에서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그가 도쿄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와 장어집에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물었다.
"조.일 수교 문제는 잘 되어 갈 것 같습니까?"
-"그 문제는 정치생명을 걸고 내가 해결할 것입니다. 나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김 주석을 만나 보니 인상이 어떻습디까?"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우선 김 주석에게 당시 간첩선으로 나포돼
북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후지산마루 호 선장과 선원들의 송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들 선원 가족들의 정상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김 주석이 말했습니다. '가네마루 선생, 걱정 마시오. 법도 인간이 만든 겁니다. 선생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려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북조선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후지산마루 선장과 선원들이 일본으로 귀환 조치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조.일 수교 문제를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가네마루 신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은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다. 쇼크사였다. 가네마루의 정치자금 문제를 집요하게 걸고넘어진 세력, 나아가 그 집에 있던 금괴 문제까지 적나라하게 들고 나와 가네마루를 쇼크사하게 만든 배후 세력은 누구인가. 나는 그 때 20년 전 록히드 스캔들로 다나카를 실각시켰던 키신저 국무장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92년 당시 미국의 목표는 북핵 동결이었다. 이를 위해 이미 몇 년 전에 찍어 두었던 인공위성 사진을 가지고 북한을 위협하고 한.미.일 공조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가네마루의 조.일 수교 추진활동이 이 같은 스케줄에 걸림돌이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제 4장 박정희의 김대중 납치 무마 공작비 3억엔 추적기
조중훈, 다나카에 3억 엔 제공해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후 나는 다짐했다. 기자생명을 걸고 이 사건의 진상만큼은 우리 국민 앞에 명명백백히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피해자인 김대중 씨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민족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킨 박정희 정권을 민족 앞에 심판해야 한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자기 나라 야당 대통령 후보를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 땅에서 대낮에 납치해다가 바다에 수장하려는 정부가 일본인들의 눈에 대체 어떻게 비쳤을 것인가. 게다가 67년 7월 박정희 정권은 유럽에 있는 한국 지식인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해다 대규모 간첩단으로 몰아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다. 이것이 중세의 해적떼들의 소행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황민사상에 물든 일인들이 '조센징은 어쩔 수 없어'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박 정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사건 발생 후 일본 정부의 태도가 상당히 야릇했다. 처음에는 '김대중 측의 자작극', '북괴의 공작' 등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 행위를 어물쩡 넘어가려 한다는 언론의 거센 비판에 부닥치자 일본 정부는 "진상을 조사한다" , "주범을 잡는다"하며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정부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작아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돈으로 다나카의 입을 막았다"는 루머가 분분한 실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73년 10월 대한항공 서울-뉴욕 간 항로 개설 교섭차 뉴욕에 온 조중훈 사장이 한 미국 주재 한국관리에게 떠벌린 무용담이 몇 다리 건너 필자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PP(박정희)의 부탁으로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을 만나 김대중 사건을 해결했다."
여기서 오사노란 일본 국제흥업 사주 오사노 겐지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전일본항공(ANA)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조중훈은 자신이 사건을 그렇게 무마했으므로 PP의 앞날이 승승장구할 것이며 그런 공을 세운 자신의 앞날은 또 얼마나 양양할 것인가 하고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그 후 필자는 또 다른 한국의 재계인사로부터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업인들 간에도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한 조중훈의 행적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정보였으나 철저한 확인이 필요했다. 상대는 일본 수상과 대한항공 사주가 아닌가. 법정에서까지 완벽하게 상대를 이길 수 있을 증거 확보가 필요했다.
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에게 45도 각도로 머리를 숙였다. 김대중 사건을 둘러싼 한일 간의 마찰을 정치적으로 마무리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그들이 마무리했다고 해서 역사조차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한일 간의 검은 뒷거래에 대한 본격적이 추적에 들어갔다. 우선 사건 발생 후 조중훈 씨의 일본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다. 그 결과 조중훈 씨는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8월 16일부터 9월 21일 사이 수차례에 걸쳐 도쿄를 오간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일본에서 조중훈 씨의 행적이었다. 그는 어디서 누구를 만난 것인가.
나는 조중훈이 떠벌린 말 중에 등장한 오사노 겐지의 인적사항을 조사했다. 조중훈과 오사노는 의형제 사이라고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 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중훈이 다나카 수상에게 접근하려 할 때 오사노가 중개역할을 맡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73년 8월 16일 도쿄에 온 조중훈씨의 행적을 탐문한 끝에 그가 도쿄 아카사카 거리로 직행했음을 알아냈다.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의 아카사카 거리에는 요정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일본 정.재계 요인들은 각기 자신의 단골집들을 가지고 있다. 오사노 겐지의 단골집은 '가와사키' 그런데 이런 요정의 마담들은 기자들이 찾아와서 단골손님에 대해 물어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심지어 은퇴한 후에 죽을 때까지도 손님들의 비밀을 보장하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 목격자에게서 8월 16일 조중훈씨와 오사노가 가와사키에 갔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는 가와사키의 마담에게 물었다.
"오사노 사장이 작년(73년) 8월경에 여기 오셨었지요?"
그녀는 정계 거물들을 상대하는 아카사카의 마담답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능숙하게 잡아뗐다.
"48년(서기 1973년) 장부는 창고 깊숙이 박혀 있어 찾아보기가 힘들고.. 그러니 작년 8~9월 경에 누가 왔다 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사노 상은 종전 직후 한 번 왔다 갔을 뿐, 그 후에는 기억이 없는데요."
종전 직후에 한 번 왔다 갔다니! 해도 너무한 여성이었다. 나는 작전을 바꾸었다. 일본 기자들을 통해 가와사키의 한 종업원 여성과
사귀었다. 그녀와 인간적으로 친해진 후 그녀를 통해 오사노와 조중훈이 73년 8월 16일 가와사키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액수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거액의 뭉칫돈이 조중훈으로부터 다나카에게로
흘러갔음이 분명했고 나는 그 흐름을 찾아야 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생리로 볼 때 그 돈이 현금일 것만은 분명했다. 거대한 현금 뭉치의 흐름을 확인하기 위해서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돈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는 곳, 즉 한국과 거래관계에 있는 모든 회사들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필자에게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조사를 시킬 만 한 돈도 없었다. 이 때 나의 취재를 도와 준 사람들은 정의감에 불타 진실을 한번 캐보자고 나선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이 근 4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 나는 비로소 검은 뭉칫돈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외로 그 곳은 외환은행 도쿄지점이었다. 돈의 흐름을 감추기 위해 외환은행에서 돈을 빼 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예단 때문에 조사를 제일 뒤로 미루었던 곳이 바로 정답이었다. 뭉칫돈의 총액은 무려 3억 엔! 이 돈은 도쿄 지점에서 최고액권 지폐로 인출됐는데 예상과는 달리 한꺼번에 3억 엔이 아니라 1억 엔씩 세 번에 걸쳐 인출됐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인출일은 8월 16일. 이 날은 김대중 사건 이후 조중훈이 오사노와 처음 대면한 날이었다. 두 번째 인출은 이후부터 9월 중순 사이의 어떤 시점이었고, 세 번째 인출은 9월 21일이었다.
뭉칫돈의 인출 시점은 조중훈씨의 일본 출입국 기록과도 일치했다. 조씨는 8월 16일에 일본에 와서 오사노를 만난 후 8월 18일 서울로 돌아갔고, 그 후 8월 18일부터 9월 21일 까지 각각 1억 엔씩을 오사노 혹은 다나카 수상에게 건넸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음 문제는 장소였다. 조중훈과 다나카는 어디에서 만난 것일까. 조중훈이 미국에서 떠벌렸다는 얘기 중에 그 해답이 있었다. 그것은
'하코네'였다. 필자는 다시 하코네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하코네는 일본의 유명한 별장지다. 나는 하코네에 오사노 겐지 소유의 별장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일본 재계의 유력자인 오사노 겐지는 하코네에 자신의 호텔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코네 코라 호텔이었다. 나는 다시 오사노가 하코네 코라에 온 날짜를 탐문했다. 그 결과 73년 9월 21일 조중훈과 오사노, 그리고 다나카 수상까지 모두가 하코네 코라 호텔에 숙박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사노가 조중훈과 다나카 수상을 대면시킨 장소는 바로 하코네 코라였던 것이다.
76년 초 나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한 인사로부터 박정희와 조중훈의 만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73년 8월 15일 박정희는 조중훈을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 박정희는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가 당선될 것으로 보고 그 쪽을 적극 지원했는데 뜻밖에 다나카가 당선되는 바람에 다나카측에는 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조중훈을 불러 "조 사장이 그쪽에 인맥이 있으니 나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는 사실 조중훈에게 김대중 사건의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조중훈은 다음 날 부리나케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돈 1억 엔을 건넸다. 그리고 8월 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 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렇게 3억 엔을 들여 다나카 매수공작에 성공한 후 조중훈과 대한항공은 그의 말대로 승승장구했다. 경쟁사 하나 없는 독점재벌로 족벌 경영의 극을 치닫다가 결국 거듭되는 항공기 추락 사고로 조중훈씨 부자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오늘의 현실을 보니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 걸 가리켜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하는 것인가.
하여간 이것이 바로 김종필이 다나카에게 머리를 숙이고 김대중 사건을 정치적으로 마무리하기 전까지 물밑에서 오고갔던 한일 간의 검은 뒷거래의 진상이다.
발표해도 될 만큼 물증과 증인들이 확보됐다고 판단한 77년 초 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기사는 당시 발행부수가 1맥만 부에 달하던 일본 최고의 시사주간지 [주간포스트]에 실렸다.
[다나카, 오사노 겐지, 조중훈의 하코네 회담에 의혹 있다] (77년 3월 11일자)와
[김대중 사건 무마 공작자금
3억과 밀약 내용을 폭로한다] (3월 18일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가 실린 [주간 포스트]는 5백만 부가 팔렸는데 한국 내에서도 비밀리에 돌려 읽혀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기사를 쓰고 나니 마치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선 듯 한 느낌이었다. '대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3억 엔' 기사는 내 이름으로 나간 기사이지만 결코 내 개인의 기사가 아니었다. 아직도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타는 수많은 협력자들의 열성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선 취재비용부터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김대중 사건이라는 거대 사건과 씨름하는 동안 취재비용은 우리 집을 저당 잡혀 대출받은 은행빚으로 충당되었다. 내가 미국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는 통신사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의 계약사로부터 통신료가 들어오면 은행빚을 갚고 그 후 다시 은행 대출을 받아 취재비로 사용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런 속에서 남편 최동현의 고생은 극심했다.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그는 미국 망명 후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하다가 브로커 라이센스를 따서 그 당시 워싱턴에서 한국식으로 말하면 복덕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복덕방도 잘 되질 않았다. 남편이 집을 사겠다는 교포를 데리고 이곳저곳 열심히 집을 보여주고 난 후 막상 계약단계가 되면 어디서 들었는지 고객의 입에서 "부인이 문명자 기자시라면서요?" 하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민 올 때 소양교육을 통해 미국에 가면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되는 반한인사 제 1호가 문명자라는 것을 귀가 닳도록 들은 사람들이 바로 그 문명자 기자의 남편을 중개인으로 해서 집을 사려 하니 겁이 덜컥 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남편은 한국 교포 상대 영업은 포기하고 주로 베트남이나 필리핀 사람을 상대로 부동산 중개소 일을 하게 되었다.
3억 엔 기사가 나가자마자 일본 정계가 시끄러워졌다. 다나카는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나는
답했다.
"좋소, 법정에서 만납시다."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 소속의 안타구 의원은 하토야마 외상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필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측은 나에게 일본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나는 답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무마비 3억 엔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이 모두 알고 있는데 사건을 취재한 기자가 일본 국회에까지 진상을 증언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내 기사가 나간 후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당시 미국무성 한국 과정이었던 도널드 레이너드 씨는 일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간의 3억 엔 수수설에 대해 "주한 미대사관의 정보보고에 의해 우리(미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변함으로써 나의 기사를 확인해 주었다.
사실 국무성 한국 과장은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 도쿄의 주일 미 대사관 등 각지의 대사관에서 일일보고로 올리는 한국관계 정보를 총괄해서 받아보는 자리다. 더구나 당시는 미 CIA가 청와대를 도청해서 말썽이 된 시점이었으니 그가 공개한 정보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일본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국회의원들은 연일 일본 외상에게 미국측에 사태의 진상을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미 국무성이 다급해 졌다. 번스 미 국무장관은 주일 미국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훈령을 보냈다.
"미국은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기타 일본 내에서의 한국의 부정한 활동에 대해 일본 국회의원들과 의견 교환을 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일본 외무성에 분명히 밝힐 것. 레이너드 전 한국 과장의 언급은 개인 자격의 논평으로 국무성은 일체 논평하지 않겠음."
그러나 뒤에 일본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이 미국을 방문해 레이너드 한국 과장에게 진상을 확인 했을 때 그는 다시금 분명히 한일 간의 3억엔 수수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이미 76년 3월 25일 미 하원 국제 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개최한 비밀청문회에서 '3억 엔 문제'를 증언 했다고 한다. 결국 이 기사를 쓴 후 나는 박정희, 조중훈, 오사노, 다나카 등 그 누구로부터도 고소당하지 않았다.
레이너드는 국무성 한국 과장에서 물러난 후 다른 자리로 가지 못하고 관직에서 영구히 은퇴했다. 이 같은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양심을 걸고 부정을 폭로했던 레이너드와 같은 미국인이 있었음을 한국민들은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에 민간정부가 들어서기를 열망했는데 아쉽게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93년 초 세상을 떠났다.
금발 가발 쓰고 LA에 숨어든 김대중 납치 행동대원 김기완
나는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그것을 주도했던 중앙정보부 행동대원들 중 일부가 미국에 숨어 들어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내가 사건 당시 주일대사관 공사로서 납치 사건에 가담했던 김기완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접한 것은 김형욱으로부터였다.
내가 그와 처음 만난 것은 71년 그가 국회의원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런데 73년 김형욱은 박정희의 눈 밖에 난 후 보복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 왔다. 뜻밖에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마치 자신이 유신에 반대해 망명한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흰소리를 쳤다. 하지만 공작정치의 장본인답게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물론 전화번호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일방적으로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후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사건전모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라고 예의 큰소리를 쳤다. 나는 물었다.
"김부장이 미국에 앉아 어떻게 그렇게 진상을 잘 아세요?"
-"이번에 활동한 김기완(가명 김재군)이가 미국에 와
있거든. 걔를 주일 공사로 내보낸 게 바로 나요. 김기완이는 사건 후에 LA에 와 있는데 걔한테 사건 내막을 완벽하게 들었지."
귀가 번쩍 뜨였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다시 물었다.
"김대중이 납치 잘 했다고 한밑천 챙겨서 미국 보내 준 모양이구먼? 그 친구 비벌리힐스 저택에서 사는 것 아니요?"
-"그렇지 않소 논공행상이 제대로 안 돼서 상당히 궁한 처지요. 그 놈들(이후락 중앙정보부를 지칭함) 하는 일이 그렇지."
"천상 김 부장이 김기완이를 먹여 살려야겠구먼?"
-"내가 다 방법을 일러 주었지. 사건 내막을 폭로하겠다고 쎄게 나가라고
했소."
나중에 조사해 보니 김기완이 중앙정보부를 협박해 뜯어낸 돈이 2백만 달러가 넘었다.
나는 LA 근방에 살고 있는 게
분명한 김기완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여러 갈래로 수소문해 봤지만 그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철저히 신분을 위장하고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국이란 숨기로 작정하면 깜쪽같이 숨어 버릴 수도 있는 광대한 곳이다.
나는 LA의 등기소부터 탐문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가 미국땅에 와서 숨어 살기로 했다면 분명히 집을 샀을 것이고, 그 기록은 등기소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교토통신 워싱턴 히스키 상과 함께 LA로 날아갔다. 등기소가 업무를 시작한 시간부터 그와 나는 등기소 기록실에서 부동산 소유주들의 이름을 뒤지기 시작했다. 점심도 거른 채, 나중에는 아예 구두도 벗어 던지고 등기소 기록실의 붉은 카펫 위를 맨발로 걸으면서 등기 기록부를 뒤졌으나 김기완 소유의 부동산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름을 미국식으로 바꿀 수도 있기 때문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부동산도 모두 뒤졌으나 김기완이 미국에 온 시점에 구입된 부동산은 없었다. 실패였다.
피곤과 허기, 그리고 실망 속에서 우리 두 사람은 별수없이 LA비행장으로 갔다. 나는 속으로 수없이 '김기완' '김기완'을
되뇌었다.
'오늘은 그냥 가지만 나는 반드시 그자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자동차가 공항에 거의 다 왔을 때 갑자기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스포츠 중계방송을 전담하던 아나운서 임아무의 누나가 김기완의 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소리쳤다.
"히스키 상, 돌아갑시다. 김가를 찾아서는 안돼요!"
미국에서는 보통 집을 부부 공동의 명의로 구입한다. 김기완이 어떤 술수로 자신의 이름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하더라도 부인의 성과 이름까지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히스키 상과 나는 부리나케 등기소로 돌아가 기록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임씨를 찾았다. 한 시간여 기록 카드를 뒤적였을 때 드디어 김기완과 부인 임아무개가 공동으로 산 집이 나타났다. 김형욱의 말대로 LA 근방이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그 곳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김기완의 집은 미국 중산층 이상이 사는 저택이었다. 대문에는 '맹견주의'라고 써 붙여 놓았다. 근처 부동산 사무소를 찾아가 김기완이 산 집에 대해 문의했다. 부동산 중개인은 "그 집은 일본인 사업가에게 팔렸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김기완의 집 근방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도무지 사람이 나오는 기색이 없었다. 우리는 주변을 살폈다. 집 뒤쪽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니 김기완의 집은 풀장까지 딸린 저택이었다. '한국민의 세금이 이런 곳에 쓰이고 있구나' 생각하니 욕이 절로 나왔다. 히스키 상과 나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랑머리라니?
나는 노랑머리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서양인이 아니었다.
"히스키상, 저건 가발이에요!"
-"맞습니다. 동양 남자입니다."
노랑머리 가발을 쓴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나는 그 이전에 김기완이 운전면허 응시 때 제출한 서류에 붙은 사진을 확인한 바 있었다. 노랑머리의 얼굴은 사진 속에서 본 바로 그 얼굴이었다.
"김기완이에요, 히스키 상"
-"맞습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행동대원, 전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 김기완이 LA근처 저택에 숨어 살고 있다는 이 기사는 미국과 일본 언론은 물론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교포신문 [한국신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나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한국신보] 발행인 홍성원 씨를 잊을수가 없다. 그는 원래 [대한일보] 기자로 일했는데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박정희가 [대한일보]를 폐간시키자 미국으로 와서 유신철폐와 조국의 민주화를 목표로 [한국신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70년대 유신철폐운동 내내 나의 언론 동지였다.
유신체제하에서 국내 언론이 모두 침묵했던 반면 이렇듯 [한국신보]만이 유신 주체들의 온갖 부정과 비리들을 가감없이 보도해 나가자 한국 내의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비밀리에 [한국신보]에 기사를 제보해 오곤 했다.
80년 광주 학살을 직접 목격한 기자가 인편으로 보내 온 기사 [찢어진 기폭]을 연재했던 것도 바로 [한국신보] 였다. 한국신보의 이 기사는 교포사회에는 물론이고 한국 내로 다시 유입돼 광주학살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들었다. [찢어진 기폭]이 연재되는 동안 [한국신보]가 발행될 무렵이면 워싱턴 한국대사관의 안기부 요원 공 씨가 신문사 앞에 와서 항상 기다리고 서 있을 정도였다.
내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가담했던 범인들 중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기사화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주일대사관 유충국 2등서기관이었다. 나는 그를 LA에서 이틀째 걸쳐 만났다. 그는 다음과 같이 납치에 가담했던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김대중 씨를 납치해 자동차에 밀어 넣고 나는 그 옆에 앉았습니다. 나는 이북 출신으로 이남에 와서 살길이 막연해 군대에 들어갔는데 어쩌다가 해외에 나와 생사람을 납치하는 역할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 일에 가담은 했지만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납치된 김대중 씨가 너무 놀라 쇼크라도 받을까 싶어서 그의 다리에다 계속 '안심'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그것을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여간 인도 장소에서 다른 동료들에게 그를 넘겨준 뒤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갔는데 마침 아들놈이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습니다. 나를 보자 아들이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떤 놈들이 경시청도 모르게 김대중 씨를 납치해 갔대요.' 나모 모르게 가슴이 철렁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애원했다.
"문 기자님, 지금은 제 아들이 아직 어립니다. 아들이 성인이 되면 반드시 제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제발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나는 집에 돌아와서 하룻밤 내내 생각하다가 유충국에 관한 기사는 쓰지 않기로 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어린 아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 후 98년 [동아일보]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고백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1970년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세계 각국의 망명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 자신부터가 그 중 한사람이었다.
나는 73년 11월 8일
정치 망명을 선언한 후 76년 말까지 무국적 상태의 난민으로 지냈다. 61년 미국에 특파원으로 부임한 후 나는 영주권을 취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때가 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미국에서 일할 때도 반드시 한국인으로서 입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악관 기자회견에 임할 때도 항상 나의 머리를 가장 강박했던 생각은 '결코 미국 기자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곳곳에서 인종 차별과 부딪치게 된다. 백인 이외의 인종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속어까지 있을 정도다 코리언은 '국(Guk)', 중국인은 '칭키(Chinky)', 일본인은 '잽스(Japs)'다. 한번은 택시를 탔더니 백인 운전사가 물었다.
-"너 잽스냐?"
나는 그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러자 운전사놈이 혼자서 중얼중얼 "칭쿤가 보다"하는
것이었다. 목적지에 다 왔을 때 나는 물었다.
"얼마야?"
-"3불25센트."
택시를 타면 요금의 1할 정도를 팁으로 더 주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3불 25센트를 내밀었다. 화가 난 운전수는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나는 뒤통수에다 대고 말해 주었다.
"인종 차별한 댓가야"
망명 이후 나의 신변안전을 담당하던 FBI측은 76년 말 국적 문제 때문에 다시 한 번 나를 물고 늘어졌다.
-"쥬리,
당신이 무국적인 한 우리가 더 이상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 줄 수가 없다. 부디 시민권을 받기 바란다."
그 문제로 줄곧 고민하던 나는 77년 카터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시민권을 신청했다.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법정에서 "미국 시민으로서 헌법을 준수하며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하겠다"고 선서해야 한다.
나는 마침내 알레산드리아 연방 법정 강당에서 열린, 만국 이종들로 붐비는 선서식에 참여했다. 판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문제의 선서를 마쳤을 때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을 본 판사가 물었다.
"당신, 그렇게 기쁘냐?"
사실 시민권을 얻고 난 후 기뻐서 우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 판사가 그렇게 물은 것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기쁨의 눈물이겠는가.
그 무렵 미국에서 각자 자국의 독재자들에 항거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싸우고 있는 각국의 망명자들과 나는 동병상련이자, 동지애가 넘치는 친교를 맺었다. 그리스의 배우이자 가수인 멜리나 메르쿠리, 필린핀의 니노이 아키노와 그의 아내 코리 아키노, 니노이의 동생 부츠 아키노, 팔레비의 학정에 항거하는 이란 망명자들...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배우이자 가수 멜리나 메르쿠리는 67년 조국 그리스에서 발생한 군부쿠데타에 저항하다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국외로 추방됐다. 그 후 그녀는 유럽을 거쳐 뉴욕으로 와서 한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냥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곡 부르고 나면 그리스식 발음의 서툰 영어로 다음과 같이 일장연설을 하곤 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우리 그리스가 독재정권에게 유린되고 있습니다. 인류사의 고귀한 유산이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되찾는 데 깊은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도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그 악명을 국제적으로 떨쳤지만 그리스 정보부의 악명도 그에 못지않았다. 메르쿠리는 그리스 정보요원들의 끊임없는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자기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공개투쟁을 그치지 않았던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그 무렵 주미 칠레 대사가 워싱턴에서 자동차 폭파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아옌데 대통령의 측근이었는데 칠레의 반아옌데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FBI는 바짝 긴장해 워싱턴에 있는 제 3세계 망명자들의 신변 안전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나를 맡았던 FBI 요원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쥬리, 주차해 두었던 자동차에 타기 전에 먼저 엔진부터 살피시오. 엔진에 설탕을 넣어 두면 달리다가 반드시 사고가 나기 때문에 테러범들이 그런 수법을 많이 씁니다. 엔진을 살핀 뒤에 이상이 없으면 뒤 트렁크를 열고 이물질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고 나서 시동을 거시오. 워싱턴 주차장에는 코리안들이 많이 일하고 있으니까 주차할 때도 조심해야 할 겁니다. 안전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은 택시입니다."
그래서 나는 백악관으로 국무성으로 취재하러 다닐 때면 늘 택시를 타고 다녔다. 지금도 내가 미국정부에 감사하는 일은 FBI가 나의 두 어린 아들딸을 보호해 준 일이다. 두 아이의 스쿨버스가 집 앞에 오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복 차림의 FBI 남녀 요원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버스에 태웠다. 귀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스쿨버스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미리 대기했다가 아이들이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돌아가곤 했다.
이처럼 미국 땅에서 자기 조국의 비밀경찰에 쫓기며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던 제 3세계 망명자들은 서로 용기를 북동우고 힘을 합치기 위해 망명자들이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 때 함께 모였던 사람들 중 필리핀의 니노이 아키노 의원과 코리 아키노 그리고 니노이의 동생 부츠 아키노가 있다.
아키노 일가는 보스턴에서 활동했다. 니노이 부부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나는 워싱턴 반마르크스 운동의 선봉장인 라우렐로부터 그를 소개 받았다. 니노이는 후덕하게 생긴 인상에 유순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항상 차분한 논리로 미국인들에게 마르코스 정권의 문제점들을 조리있게 설명하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유순하던 그도 마르코스 정권을 비호하는 미국의 우익 인사들과 논쟁이 붙으면 흥분을 참지 못해 '붓다기나마'라는 타갈로그어 쌍소리가 튀어나오곤 했다.
나는 니노이에게 물었다.
"니노이, '붓다기나마'가 무슨 뜻입니까?"
니노이는 씩 웃으면서 답했다.
-"레이디에게는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호기심 많은 나는 그 후 기어이 그 뜻을 알아냈는데 영어로 하면 '뻐킹 가이' 정도 되는 욕이었다. 이 지면에 옮겨놓을 만한 말은 못 된다.
아키노와 김대중은 곧잘 비교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아키노는 결국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는 했지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김대중 씨 만큼 고생한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코리 아키노 또한 필리핀 최대 지주의 딸로서 학생 시절 뉴욕에서 유학할 때는 필리핀에서 가정부까지 데려와서 생활했을 정도로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코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의 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의 영정 앞에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원래 차분한 성격 탓인지 민족성의 차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코리는 한국 여성들처럼 통고하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다수 일본 여성들도 출산할 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문화연구가들이 연구해 볼 만한 문제다.
그리고 다소 이해하기 힘든 얘기자만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는 니노이 아키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멜다가 미국을 방문할때면 여러모로 니노이를 도와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니노이 아키노의 최후를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와 슬픔을 금할 수 없다. 83년 8월에 마침내 니노이가 귀국을 결행했을 때 나는 그 비행기에 함께 탑승해 그의 귀국일정을 동행취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중국의 이선념 주석과의 회견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필리핀에 같이 가지 못했다. 그러나 니노이의 신변 안전을 위해 다니아나 상원의원(하버드대 출신 변호사)등 미국측에서도 여러 사람이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코스 정권의 악랄함은 우리의 상식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한 후 니노이가 트랩을 내려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수발의 총탄이 날아왔고, 그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니노이와 동행해 역사의 증인이 된 사람들 중에는 와카바야시라는 일본인 반마르코스 운동가도 있었다. 그는 85년 김대중 씨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도 도쿄에서 그 비행기에 올라 일행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는 김포에 도착한 후 공항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도쿄로 돌아가야 했다.
86년 2월 필리핀 시민혁명으로 마침내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진 후 니노이 아키노를 대신해 코리 아키노가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필리핀 시민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던 나는 코리 아키노와 함께 제 1착으로 마르코스 부부가 탈출 직전까지 살았던 필리핀의 대통령 관저 말라카낭 궁에 들어갔다.
관저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값나가는 물건들을 급히 챙겨 탈출하느라고 그랬는지 호화로운 말라카낭 궁 안 여기저기에 급히 뜯어낸 포장지, 상자 등등의 쓰레기들이 산더미 같이 널려 있었다.
한 방에는 알맹이를 미처 꺼내지 못한 보석상자들도 한켠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또 이멜다의 욕실 옆 화장대에는 온갖 종류의 향수들이 진열돼 있었는데 세계 최고급 향수 중 하나인 짐바투 향수가 축구공만한 용기에 세통이나 담겨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은 아예 향수 진열만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듯한 '향수방' 이었다.
이멜다의 코트들이 진열돼 있는 방에서는 놀라다 못해 욕설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밍크코트 중에서도 최고급품에 '세이블' 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72년 닉슨의 소련 방문을 수행했을 때 세이블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보통의 밍크코트보다 대단히 가벼워 입어도 전혀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고 미관상으로도 뛰어난 세이블은 보통 밍크코트 가격의 열 배가 넘는다. 이멜다의 코트방에는 세이블이 무려 세 벌이나 걸려 있었다. 이 더운 나라에서 세이블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친 X"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말라카낭 궁에서 이멜다는 여왕처럼 생활했음이 분명했다. 침대위 천장에는 나비 날개 같은 흰 천들이 침대 옆으로 흘러내리도록 꾸며저 있었다. 환상적인 모기장을 쳐 놓은 셈이었다. 또한 놀랍게도 말라카낭 궁의 한 방에는 순금으로 만든 음반이 쌓여 있었다. 이멜다가 자신이 부른 노래를 순금 음반으로 만들어 내키는 대로 사람들에게 하나씩 선물했다는 얘기였다.
말라카낭 궁 안에는 아예 성당까지 있었다. 그 곳에서는 순금으로 된 십자가가 번쩍이고 있었다. 이멜다는 필리핀의 추기경 카디날신을 그 곳으로 불러 미사를 집전하게 했다고 한다. 그 곳에 과연 천주님이 임했을지는 의문이다.
그 후 나는 코리 아키노의 농장에 초대받아 갔다.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까무러칠 뻔했다. 자동차로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코리의 농장. 코리 아키노 집안은 그 곳에서 명실상부한 왕족이었고, 그 집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중세의 농노나 다를 바 없었다. 그 곳에는 16홀의 골프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니노이 아키노 역시 지주 집안 출신이었지만 코리에 비하면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니노이는 처가의 막강한 재력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었다. 마르코스와 이멜다가 필리핀 민중의 생존권을 탄압한 독재자라면 시민혁명을 통해 집권하는 아키노는 민주주의의 수호자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검고 주름진 얼굴에 바짝 마른 팔다리, 신발조차 없는 아키노 농장 노동자들에게 코리 아키노 집안은 필리핀 민중의 고혈을 빠는 또 하나의 적이었다. 아키노 집안의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발이 땅에 닿을 사이도 없는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아키노 농장 방문을 마치고 마닐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마닐라 만 근방에 위치한 빈민굴 스모키 마운틴으로 취재를 갔다. 미국 NBC, 일본의 후지 TV와 함께였다. 말라카낭 궁, 코리 아키노의 저택이 천국이라면 그 곳은 바로 지옥이었다. 취재 전에 안내원은 장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가보니 이해가 되었다. 그 더운 날씨에 거리는 장화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었다. 변소가 따로 없어 길거리가 바로 용변장소였다. 진흙과 오물, 쓰레기로 뒤범벅이 된 진창은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진동하는 악취에 구토가 치밀었다. 이를 참느라 혈압이 치솟아 아무 생각도 하기 어려웠다. 장화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그 곳을 사람들은 맨발로 오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진흙탕 속에 뒤섞여 있는 소뼈다귀 같은 것을 주워 비닐봉지에 담고 있었다. 소뼈다귀가 왜 그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그것을 물에 씻어 되판다고 했다. 걸레조각 같은 것을 걸친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곧 쓰러질 것 같은 판자 움막 속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한 움막에서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푸실푸실한 안남미 밥과 시퍼런 망고를 새우젖 같은 것에 찍어먹고 있었다. 나도 한 번 먹어 봤는데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나마 그들은 그것조차 없어서 못 먹는다고 했다.
일 년 내내 연기가 난다고 해서 스모키 마운틴이라는 그 곳에는 세계 각국의 빈민굴에 빠짐없이 모습을 보이게 마련인 미국인 신부조차 없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흔치 않은 일본인 신부 한 사람이 그 곳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만나보지는 못했다.
이처럼 가난에 찌든 필리핀의 딸들을 일본 야쿠자들이 일본 땅에 데려가 매춘부로 팔아먹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에도 세계 각국의 여러 빈민굴을 취재했지만 아직도 그 이상의 참상은 보지 못했다.
필리핀을 떠나기 전 나는 니노이의 동생 부츠 아키노에게 말했다.
"부츠, 필리핀 시민 혁명을 승리로 이끈 민중의 뜻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토지개혁을 해야 합니다. 당신 집안이 코리의 농장과 같은 광활한 토지를 그대로 손아귀에 쥐고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토지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못사는 사람들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츠 아키노는 민주적 사고, 지도력, 도덕성, 반마르코스 투쟁경력 등 어느 모로 봐도 흠잡을 데 없는 필리핀의 대통령감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사실, 니노이 아키노를 대신해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어야 할 인물은 부츠 아키노였다. 그러나 코리가 대통령직에 올랐고 그 이후 필리핀의 정정은 다시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3천 켤레의 구두를 남기고 도망갔던 이멜다가 당당하게 필리핀으로 돌아왔고, 코리의 딸과 이멜다의 아들이 결혼하는 일이 생겨 두 집안은 사돈이 되었다. 이멜다는 정치적으로도 재기해 필리핀의 국회의원으로 의사당을 누볐다. 아키노 집안의 필리핀 민주화 운동은 결국 마르코스에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기 위한 권력 투쟁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러나 시종일관 민주화의 길을 곧게 걸어간 망명자들도 있다. 그리스의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의 경우, 74년 그리스에 민주정권이 들어선 후 귀국해 사회당의 재건에 힘써 문화과학부 장관직에 올랐고, 94년 운명할 때까지 민주화의 한 길을 걸었다. 나는 내셔널 프레스 클럽(미국 기자협회) 이사직에 있을 때 메르쿠리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팔레비 정권에 저항하는 이란 망명자들도 이스라엘의 비밀경찰 사바크만큼이나 악독한 이란 비밀경찰들의 탄압을 받으면서 눈물겹게 투쟁했다. 그들은 모두 인텔리 출신들로서 반정부 출판물을 발간하기도 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워싱턴의 이란 대사관 파티에 초청되기만 하면 팔레비 왕정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웬만하면 참석하곤 했다. 여간 해서 먹기 힘든 캐비어알(상어알)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캐비어알 로비'라고나 할까.
그러나 세월이 바뀌어 팔레비 왕조가 곧 넘어갈 지경이 되자 캐비어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란 대사관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모두 발길을 끊었다. 나는 필레비 왕조를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간 이란 대사와의 우정을 하루아침에 져버릴 수 없어 초청에 응하곤 했다. 그 때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 미국인들의 자리를 보며 '동.서양인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후 이란의 인텔리 망명자들은 모두 귀국해 이란 혁명정권에 일조하고 있다고 했다.
제 1장. 박정희의 비자금 조달선 외자기업 (프레이져위원회 조사보고서)
박정희는 청렴했다?
97년 [중앙일보]는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씨의 회고담을 연재했다. 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비서실장의 증언을 사실 확인도 없이 객관적 진실인 양 보도하는 언론사의 양식도 문제려니와, '청렴결백했던 박 대통령 이야기'에 열화 같은 성원을 보냈다는 많은 독자들의 때 이른 건망증에도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정렴 씨의 말대로 대통령 박정희가 집무실에서 선풍기도 틀지 않고 구멍난 러닝셔츠를 그대로 입었다고 치자. 그것이 그의 진면목인가. 그의 18년 통치는 과연 간디와 같은 철학에 입각한 것이었는가.
박정희는 취약한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워싱턴 정가에 거액의 달러를 뿌렸다. 김동조 주미대사는 의회를 돌면서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막대한 현금을 주려다 말썽을 일으켰고, 박동선 역시 대미 로비를 한다며 의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주었다가 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한국으로 도피했다. 김한조 사건 역시 이 로비의 일환이었다.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씨도 중앙정보부에서 돈을 받아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 미국 하계와 언론계에 친 박정희 여론을 조성하려고 활동하다가 FBI측의 소환이 있자 가족을 놔두고 자기 혼자 손가방 하나만 들고 한국으로 도망갔다.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한국의 권익보다는 박정희 개인 찬양과 정권 연장에 더 힘썼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국 정부로부터 60만 달러를 받아먹고 미국 국회의원을 매수해 미국 국회의사록에 박정희를 찬양하는 글을 올리게 하고는 그것을 가져다가 박정희에게 보이고 자신의 공을 과시한 자까지 있었다.
청와대 침실 변기에 벽돌을 집어넣어 한 방울의 물까지도 아끼려 했다는 박정희가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를 만들어 거액의 외화를 예치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 돈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가.
유신체제하에서 아무도 그 비밀에 칼을 대지 못하고 있던 77년에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세칭 프레이져위원회)는 '코리아게이트' (박동선이 벌이 미 의회 의원 뇌물 로비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나선다.
프레이저위원회를 비롯한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의 조사활동에 의해 박정희의 비자금 전모는 낱낱이 드러났다. 한국 현대상에서 미국이란 나라가 차지하는 지위는 별개로 하더라도, 적어도 70년대 후반 미 의회의 코리아게이트 조사위원회들은 한국 국민을 위한 중앙정보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할 만하다.
수많은 증인들이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그 중에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아들 이동훈, 사위 정화섭,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참사관 김상근, 박정희가 기용한 로비스트 박동선. 김한조, 국제 석유재벌 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사 대표 등 박정희의 비자금 조성과 집행 과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나는 미 의회의 2년에 걸친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 내내 그것을 취재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주무른 4천억 원에 달하는 정치자금에 이미 혼이 빠진 한국 국민들에게는 박정희의 '몇 억 불' 규모의 정치자금쯤이야 푼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라 우리가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통치의 대가로 받은 청산금이 불과 3억 불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당시 박정희가 주무른 몇 억 불 정치자금의 가치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쌀 한 말을 들여놓을 목돈이 없어 한 되 두 되씩 봉지쌀을 사다 먹던 시절이 아닌가.
"박정희는 청렴했다"고 외치는 90년대의 박정희 신화 제조자들 앞에 나는 그 때의 취재수첩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미 의회가 수상스러운 한국인들의 활동에 주목하게 된 것은 75년 하원에서 여러 차례 열렸던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한 청문회' 때였다. 75년 6월 10일 이 청문회에 대단히 흥미로운 증인이 출석했다. 그는 바로 73년까지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다가 미국에 망명한 이재현 씨였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미국 내에 있는 반한파 한국인들을 탄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 내에서 반(反) 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공작을 벌일 모종의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분명히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와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금품 제공 등의 수단으로 로비를 벌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법무성은 이 증언을 적극적으로 조사하려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하면서 박정희의 미국 의회에 대한 로비 부정의 진상을 끝까지 캐 보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하원의 프레이저 의원이었다. 그는 미네소타 출신으로, 미네소타 대학 법대 학장이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대단히 강직하고 정의감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제야 밝히는 일이지만 그가 박동선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된 데에는 필자도 나름대로 기여한 바가 있었다. 장기집권을 위해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뿌려 가면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박정희의 행각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정의와 불의를 가릴 줄 모르고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그의 사고방식에 경악하면서 내 나름대로 결심했다. 좋다. 힘이 정의고 돈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박정희에게 돈과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프레이저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던 미 하원의 국제기구소위원회는 76년부터 이재현 씨의 증언에 대한 소규모의 자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한국정부가 불법 행위들을 자행하고 있다는 여러가지 증거들이 드러났다. 프레이저 의원은 이를 근거로 77년 2월 3일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한.미 관계를 조사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로써 이른바 프레이저위원회로 불리는 미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가 시작됐다.
프레이저위원회가 박정희의 비자금에 대한 첫 번째 단서를 잡은 때는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가 진행되던 75년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조사 과정에서 상당수의 미국 대기업들이 미국 정부와 외국 정부에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그러자 미국 전역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고, 상원의 다국적소위원회는 이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5월 16일 열린 이 청문회에서 석유재벌 걸프는 "우리가 전 세계의 외국 정부에 제공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 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불 되었다" 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프레이저위원회는 3년에 걸쳐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조성과 사용처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다. 이 조사는 미국 내 28개 주와 전 세계 11개 국가에서 이루어졌다. 정부기관과 민관기구 그리고 개인들에 의해서 수천 종의 문서가 검토 되었고, 37명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청문회만도 20회나 개최되었다. 그 결과를 정리해 프레이저위원회가 발표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조성과 대미 로비에 관한 내용들을 우선 서술형으로 소개해 본다.
5.16쿠데타 세력들은 쿠데타 직후 '부패 추방'을 첫 번째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집권 과정에서 그 공약은 그야말로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62년 워커힐 건설 프로젝트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고, 63년 봄에는 은밀히 증권시장 조작에 개입해 4천만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거두는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켰다.
더욱이 비밀리에 진행된 한.일 국교정상화 예비회담에서 김종필이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문제를 합의(이른바 '김-오히라 의정서') 해 주는 대가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사용될 선수금 조로 1억 3천만 달러, 63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공화당의 정치자금 조로 2천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기정사실화하면서 한국 내에서는 비난 여론이 빗발쳤다.
결국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63년 2월 25일 김종필이 이른바 '자의 반 타의 반'의 외유길에 오르고, 박정희 의장은 중앙정보부의 부패 혐의를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다.
63년 야당이 들고 나온 '삼백사건'은 공화당이 정치자금 상납을 조건으로 이병철 등 소수의 기업인들에게 설탕과 밀가루, 시멘트 산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축적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의혹의 표적이 된 것은 단연 공화당 의원 김성곤이었다. 그가 당시에 한국 시멘트 산업을 주도하던 기업인이었기 때문이다.
63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김종필을 비롯하여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국회의원 김성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 등으로 자신의 주위에 부패의 그물을 더욱 촘촘히 둘러쳤다.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했다. 이로 인해 한.일 회담 반대 데모가 전국을 휩쓸고 박정희 정권은 급기야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당시 학생.민주 인사들은 일본과의 수교를 무조건 반대한 게 아니라, 일본 자금을 들여와서 군사정권 유지에 악용하려던 박정희 정권의 정략적 매국 행위에 반대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이 수립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행할 자금 및 공화당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에 급속히 감소하던 미국의 원조를 대체할 자금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65년 1~2월 김종필의 형 김종락(한일은행 상무)은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 조달을 기도한다. 5.16 이후 김종필이 혁명실세로 등장하자, 그 전까지 은행원으로 있던 형 김종락까지 원님 덕에 나발 부는 격으로 군사정권의 자금 대리인으로 데뷔했던 것이다. 그런데 외국에서 들여오는 정치자금을 그럴듯하게 세탁하려면 상당수의 합작회사가 필요했다. 65년 이후 외국과의 합작회사 설립은 증가 일로를 걸었고 박 정권이 외국에서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체계도 점점 세련되어 갔다.
김성곤. 이후락. 김형욱 3인이 나눠 맡은 정치자금 조달체계
한편, 그 무렵에 의심 많던 박정희는 이 쿠데타 이후 독보적으로 정치자금 조성 역할을 담당해 온 김종필에게서 그 역할을 거두어들이고 김성곤. 이후락에게 더 많은 역할을 맡기기 시작했다. 이 점은 65년 김종필 계열의 기업인과 이후락 계열의 기업인들이 맞붙은 '자동차 전쟁'에서 박정희가 이후락을 지지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화당 의장 김종필을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가 기용한 김성곤. 이후락. 김형욱 3인은 정치자금 조달체계에서 각기 다른 책임을 맡았다.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은 수표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접수하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성곤으로부터 그 수표들을 건네받아 현금화하는 동시에 현금으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접수하며, 비서실장 이후락은 그 자금들을 스위스은행의 비밀구좌에 예치하고 관리하였다. 이런 '역할분담' 체계에서 66년 공화당 재정위원장에 임명된 김성곤이 헌납의 주요 창구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이었다.
박 정권의 이와 같은 정치자금 비밀 조달 체계는 67년 대선에서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67년 대통령 선거는 당시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선거로 평가되었다. 67년 선거에서 미국의 일부 대기업들이 박 정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은 76년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에서 상.하원 윤리위원회와 프레이져소위원회에 의해 낱낱이 밝혀진다.
이 같은 정치자금 수수와 부패 문제는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71년 선거에 박정희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공화당은 새 후보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극심한 분열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것은 야당의 승리를 의미했다. 정권을 잃는다면 공화당 지도부는 정치자금과 부정부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위험이었다.
67년 선거 직후, 3선개헌 문제를 놓고 김종필과 박 정권의 다른 중간 보스들 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김종필과 김성곤은 3선개헌을 반대했고, 김형욱과 이후락은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들의 찬반입장은 각자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 퇴임이후 대통령직을 계승할 사람은 자기라는 개인적 야심에 차 있었다. 그러니 박정희의 3선 기도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김성곤은 자신의 기업 활동과 축재를 방해하는 김형욱과 이후락을 밀어내기 위해 3선개헌에 반대했다.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했다.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과 공화당 의장을 지낸 김종필 양인은 모두 국회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형욱과 이후락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박정희는 김종필과 김성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김형욱과 이후락을 3선 개헌 후 사임시킨다. 당시만 해도 박정희는 유신체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이와 같은 번거로움이 유신이라는 절대권력을 꿈꾸게 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69년 사임한 후에도 이후락은 정치자금 모금책으로 계속 활동 하다가 70년 12월에는 중앙정보부장으로 다시 기용 되었다. 그러나 김형욱의 정치적 위상과 자금모금책으로서의 역할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불안을 느낀 김형욱은 미국으로 탈출한 73년까지 부정축재한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리는 한국을 방문한 한 프레이저위원회 조사 위원과의 인터뷰에서 "70년 이후락, 김성곤, 김형욱이 각각 1억 불 이상을 축재했다"고 증언했다. 훗날 김형욱은 프레이저위원회에서의 증언에서 "김성곤이 모금한 정치자금 중에서 75만 불을 내가 개인 용도로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김성곤이 박 대통령, 육여사, 정일권, 이후락, 박종규에게도 그런 자금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이후락이 모금한 자금은 대통령 개인 용도로 스위스은행 비밀구좌에 예치되었다. 이후락 외에 다른 측근들도 대통령에게 돈을 제공했다. 박정희는 그 돈의 일부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책상 뒤의 금고에 보관했다. 박정희의 스위스은행 비밀구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프레이저위원회가 찾아낸 은행 기록과 이동훈(이후락의 아들)의 청문회 증언, 청와대 고위 측근의 증언들에 의해 명백히 확인되었다.
이동훈은 프레이저청문회 증언에서 "스위스은행에 있는 돈을 비록 아버지(이후락)가 관리했지만, 그 돈은 아버지의 돈이 아니고 박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 자금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동훈은 "나도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일본 은행에 2백만 불을 예치했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박정희는 이 같은 비밀구좌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동훈은 "박 대통령은 여당 인사들뿐 아니라 야당 인사들에게도 돈을 주었다"고 했다. 코리아케이트에 대한 미국 행정부 보고서에는 "한국의 한 유력 기업가에 따르면 70년 당시, 거의 모든 야당 의원들이 박정희의 돈을 받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동훈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그는 또한 "70년대 초반 박 대통령은 군부의 불복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요 군 지휘관들에게도 상당한 자금과 혜택을 주었다"고 했다.
박정희가 3선을 위해 출마한 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은 더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70년 6월 박정희는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에게 공화당에 10만 불씩을 기부할 수 있는 기업체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김성곤이 작성한 명단에는 럭키그룹, 현대건설, 삼성그룹과 김성곤의 쌍용그룹 등 한국 유수의 기업들이 포함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업 대표들 중 다수가 5.16 직후 부정축재자로 기소되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외국 기업들 역시 71년 선거를 위한 정치자금 조달에 이용되었다. 예컨대 걸프 사는 공화당에 1천만 불을 제공하도록 요청받았는데, 결과적으로는 3백만 불을 제공했다. 같은 석유재벌 칼텍스 사도 최소한 1백만 불을 제공했다. 미 행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다른 한국 대리인을 통해 청와대에 커미션으로 수백만 불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 중 1백만 불은 71년 선거 이전에 대리인의 이름으로 해외 계좌에 지불되었다.
71년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외국 기업은 미국 기업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71년 4월 지하철 전동차를 한국에 판매했던 4개 일본인 무역회사 즉 미츠비시 , 니쇼이와이, 미츠이, 마루베니사가 미국의 한 은행구좌에 1백 20 만 불을 이체한 사실이 일본 국회 청문회가 결과 밝혀졌다. "프레이저 소위원회가 이 자금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77년에는 은행 측의 5년 기록 보유 규칙에 따라 은행 거래 기록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소위원회는 이 자금이 결국 어디로 갔는지를 명백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금이체 시점이 71년71년 4월이라는 점과, 1백 20만불 이체 이후에 지불된 1백 30만 불의 커미션이 김성곤의 이름으로 된 미국은행 구좌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일본 기업들이 제공한 총 2백 50만 불의 정치자금이 71년 선거에서 공화당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 정권의 이와 같은 거액의 정치자금 조달은 71년 선거로 끝나지 않았다. 프레이저소위원회와 상.하원 윤리위원회, 법무부의 조사 결과로 잘 알려진 바대로 69년부터 75년까지 '박 정권의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은 여타 대외무역에서 흘러나온 1천만 불 외에 미국쌀 수입 커미션으로 9백만 불을 거둬들였다. 이 자금으로 박동선은 한국과 미국 관리들에게 선금, 차관, 기부금 및 현금을 제공했다.
코리아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박동선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미국쌀 수입에서 떨어지는 커미션이 미국의회에 대한 로비자금의 출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미국 의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박동선을 내세워 특정 미국 기업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국 정부가 지지를 얻고자 하는 의원들의 선거구에 있는 기업을 지원함으로써 해당 의원을 친한파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미 외교 정책의 필요성]과 [한국의 대미 외교정책 계획]이란 두 개의 문서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이 문서들의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Ⅱ상.하원 의원의 이익증대를 통한 외교활동
A. 상.하원 선거구에 대한 지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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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투자 기업 원조
(a) 만일 하원 의원의 선거구에 있는 기업이 한국 투자에 대한 이해관계를 암시하면
우리는 그 기업을 지원한다.
(b) 우리는 이미 한국에 투자하고 있는 대기업(걸프, 칼텍스, 아메리칸 에어라인,, 페어차일드)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 기업의 본부가 있는 지역 출신 하원 의원의 지지를 획득한다.
B. 선거구 지원의 두가지 이점
1.선거구민을 도움으로써
a)상.하원 의원들이 인기를 얻게 된다.
b)그렇게 되면 그들은 한국을 지지할 것이다.
2.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
a)그들 지역의 생산품을 구매함으로써, 우리는 선거인뿐만 아니라 선출된 관리들의 영향력도 우리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할 수 있다.
b)그들의 생산품 구매와 다른 거래로부터 발생하는 커미션을 우리의 활동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일거양득이다.
박동선의 집에서 발견된 이 문서들의 작성자가 누구인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앙정보부 의전국장 스티브 김(한국명 김상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70년 12월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후 중정이 벌인 부정거래행위는 박동선의 활동을 능가했다. 73년 3월 국내 유수의 한 기업인은 "이후락은 여전히 대통령 집무실을 통해 이권을 따내고자 기업인들의 활동을 부추기는 동시에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에 이후락은 비서실장 시절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락의 중앙정보부 또한 수백만 불의 불법 대출을 포함한 대규모 은행 대출 공작에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떨어진 자금과 커미션은 중앙정보부 예산과 중앙정보부 고위 관리들의 부정축재에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면직된 후 6개월 동안 한국 금융계의 전격적이 개편이 단행되기까지 했다.
이후락의 중앙정보부는 또 수출.입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는데 신진자동차, 대한농산, 선경 등이 이후락의 통제 범위에 들었던 기업이었다. 이후락은 연간 섬유수출 쿼터 배당을 조작해 자기 영향권 하에 있는 회사들에 특혜를 주는 수법으로 대규모의 수입을 올렸다.
이후락 재임 이전에 시작된 중정의 공작으로서 그의 재임 기간 중 더욱 가속화한 것이 주한미군 군수품 조달에 대한 개입이다. 73년의 미 행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군수물자 조달을 감독하고 청부업자들을 관리하여 중앙정보부에 대한 상납을 독려할 목적으로 상공부 내에 분실을 설치했다고 한다.
또한 이후락 중앙정보부는 '블랙 백(black bag) 공작'에 개입했다. 이것은 중앙정보부가 국제적 환전상인 딕 사(Deak & Co)를 통해 거액의 달러를 검은 가방에 넣어 청와대로 수송한 작전이다. 73년 9월 한 미국 기업이 하와이의 딕 사 구좌에 2만 불을 예치했는데, 그 자금은 한국대리인(한국기계제작회사)의 요구에 따라 미국 기업이 지불한 커미션의 일부였다. 한국 대리인은 문제의 미국 기업에 정일권에게 5천 불, 당시 미국에 상주하던 한국 관리 이상격에게 1만 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딕 사는 자사 명의 구좌의 돈을 찾아 검은 가방에 담아 지정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락의 중정부장 재직시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보았다. 박동선과 슐 아이젠버그가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아이젠버그는 자유당 때부터 한국 재계에 깊숙이 침투해 온 이스라엘 출신 유태계 무기상이다. 그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 때 일본 가마쿠라 지방으로 피신했는데, 그 때 그를 구해 준 일본 여인과 결혼해 동양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당시절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차린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접근해 충주비료공장 건설권을 따내는 등 한국의 정.재계에 깊숙이 침투했고, 나아가 자유당에 3.15 부정선거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5.16 이후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컨소시엄을 형성할 때 한.일 간에 문제가 생기자 아이젠버그는 장기영을 통해 유럽 투자가들을 알선해 유럽 금융시장의 자금을 한국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미 대사인 필립 하비브는 미국 기업들과 뇌물 거래를 했던 아이젠버그의 전력을 들어 그와의 거래를 피하라고 경고했으나, 박정희는 73년 초, 한국 기업의 사업자금 조달처인 아이젠버그의 편의를 봐 주라고 한국 정부에 지시했다. 60년대 초 미국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이 실현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을 때 아이젠버그가 필요한 자금을 대주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박정희의 지시로 한국 정부는 아이젠버그가 대리인으로 있던 캐나다의 캔두(CANDU) 핵원자로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덕분에 아이젠버그는 캔두 판매 커미션으로 2백만 불을 챙겼다. 김종필과 전 대통령 비서실장 민충식은 아이젠버그의 커미션에서 일부를 뇌물로 받았다. 그 후 캔두 판매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자체조사로 이 사실이 드러나 75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과 한국전력 사장이었던 민충식이 해임 되었다.
한편,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된 직후 박정희의 이른바 '가지치기'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후락은 73년 12월 3일 영국을 거쳐 바하마로 피신했다. 그 후 이후락은 형사처벌이나 기타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박정희의 친필서신을 받은 후인 74년 2월에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들 이동훈은 청문회 증언에서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해임된 것은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중앙정보부의 부정부패 때문이 아니라, 커 가는 이후락 세력에 대한 박 대통령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락의 측근 중 한 사람이 모 요정에서 벌어진 기생파티에서 '이제 그만 박 대통령이 물러나고 이후락이 그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에 의해 녹음되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고 말했다.
이동훈은 또한 "73년 이후락이 해임된 후 권력의 중심은 이동했지만 부패 관행은 계속되었다. 신임 신직수 부장에 의해 중앙정보부의 활동이 가차 없이 축소된 반면, 경호실의 비호 하에 부패는 지속되었다. 미 행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74년 5월까지 청와대측은 기업 활동에 개입한 박종규의 미심쩍은 행적에 대해 두 번이나 경고한 것으로 되어있다.
74년 8월 육여사가 피살된 후 박종규는 사임했다. 71년 오치성 항명 파동 이후 박정희로부터 버림받고 술로 날을 보내던 김성곤이 75년 말 사망했고, 비슷한 시기에 국무총리 김종필이 해임되었다. 이로써 이전 15년간 주요 정치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한 박 정권의 중간보스들은 모두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김종필은 여전히 막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캐두 원자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와 박정희 사이는 불화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후락의 경우는 달랐다. 78년 이동훈은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에서 "아버지는 74년 2월 귀국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박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시기는 청와대가 '권력과 부패의 구심점이 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정보와 자료가 결국에는 청와대로 향했고, 이를 바탕으로 청와대가 모든 돈을 거두어들였다. 기업가들이 사업을 하려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미 행정부 보고서는 "이 시기에 한국 정부는 하급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가혹하게 처벌했지만, 경제정책 결정과 그에 다른 정치자금의 청와대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78년에는 오직 박정희만이 한국 정부 내의 유일한 정책 결정자였다"고 평가했다.
프레이저소위원회는 미국 기업의 한국 정부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과 거래하는 1백 35개 미국 기업에 질의서를 보냈다. 그 중 1백10개의 기업들이 조사에 응했는데, 그 가운데 48개 기업이 한국과의 거래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문제가 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미국 기업들은 소위원회에 대한 답변에서 "한국 정부인사 혹은 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미국 기업을 정치자금원으로 간주하고 접근했다"고 밝혔다. 그들 한국인들은 공화당에 대한 직접적인 기부(야당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은 보고된 바 없었다)나 한국 정부의 관리. 대리인. 정치자금 모금책에 대한 자금제공이나 뇌물 공여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 기업이 한국 정부로부터 정치자금을 요구받을 때 한국 정부의 핵심인사로부터 직접 요구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이후락만은 직접 두 미국 기업에 정치자금을 요구했고, 그 기업들은 모두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정치자금 모금책의 측근이 미국 기업에 접근했다. 상당수 기업들이 이후락, 정일권, 김성곤, 김종필의 측근으로부터 자금을 요구받았다. 콜트(Colt)사는 71년 대통령 선거시, 박종규의 수석보좌관이었던 미키 김(Mickkey Kim, 김운용 IOC위원)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요청받았다. 김용운은 콜트 사 대표에게 "박종규가 나에게 자금을 요구하라고 지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 고문의 조언에 따라 콜트 사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 또 다른 기업은 김동조 주미대사로부터 한 미국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에 자금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받았다. 그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위원회가 미국 선거법에 따라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자금 제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글라스 항공사(Douglas Aircraft)는 한국 정부로부터 항공기의 대한 판매를 보장받기 위해 부총리 장기영을 통해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이 회사는 또 6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두 명의 한국 정부관리에게 7만 불 이상을 제공했는데, 이 돈은 공화당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프레이저소위원회와 행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71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미국 기업들은 공화당의 대리인이나 자신들의 사업 파트를 통해 총 8백 50만 불을 공화당에 제공했다. 8백 50만 불 중 걸프사가 3백만 불, 칼텍스가 4백만 불(1백만 불은 차관 조로 3백만 불은 선불 조로)을 한국 파트너를 통해 지불했으며, 세 개의 다른 미국 기업 한국 대리인들이 선거 3주 전쯤 총 1백 50만 불의 커미션을 받았는데 이 자금의 최종 수령자는 공화당인 것으로 보인다.
신민당 후보 김대중이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8% 미만의 표차로 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대규모 정치자금 제공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 기업이 제공한 정치자금이 71년 대통령 선거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8백 50만 불이 다른 자금원에서 나온 정치자금과 함께 대중에 살포되는 상황은 김대중과 박정희의 득표차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8백 50만 불이란 수치는 단지 프레이저소위원회가 확인할 수 있었던 액수일 따름이다. 예컨대 한미 합작회사의 한국 측이 공화당에 제공한 정치자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프레이저위원회나 미 행정부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사항이다.
프레이저위원회가 조사한 두 미국 기업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사례는 69년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 발생한 것이고, 두 번째 사례는 71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것이다.
칼텍스가 스위스 은행 이후락 관리 구좌에 정치자금 예치
70년 10월 칼텍스의 한국 합작회사인 호남정유 사장 서정귀는 칼텍스측에 "공화당이 2백만 불의 정치자금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정귀는 "공화당이 69년 3선개헌 투표 때 들어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요구가 뉴욕의 칼텍스 본사에 전달되었으나 본사측은 "정치자금 제공은 회사 정책에 반하는 것"이라고 서울대표부에 통고했다. 그러자 호남정유 경영진은 1백만 불 상당의 자금을 원화로 공화당에 제공했다. 후에 칼텍스측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 내 정부 및 공적 관계에 대한 책임은 한국측이 맡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남정유의 자금제공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만일 호남 정유가 공화당에 1백만 불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대략 50만 불이 배당금으로 분배되었을 것이다. 칼텍스 사는 계약상 어떠한 경우에도 첫 배당금 중 33만 불과 잔여 배당금 중 20%를 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1백만 불 제공으로 칼텍스측은 총 36만 4천 불의 손해를 본 셈이었다. 프레이저위원회는 그 액수를 칼텍스가 공화당에 제공한 간접적인 정치자금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71년 초 서정귀는 칼텍스측에 다시 한 번 "공화당이 다가오는 대선을 위한 정치자금 1백만 불 제공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서정귀는 "호남정유의 현금 유통 문제로 그 자금이 국외에서 달러화로 지불되어야 한다"고 못 박으면서 칼텍스측에 1백만 불의 대부를 요청했다. 그는 칼텍스측에 이 돈을 스위스은행에 있는 파나마 국적의 '아시아무역회사' 구좌에 이체시켜 달라고 했는데, 71년 3월 15일 이 돈이 이체되었다.
서정귀가 미국 기업으로 하여금 스위스은행에 정치자금을 예치하게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69년 9월, 걸프 사는 서정귀가 소유한 기업의 주식 2백만 불 어치를 매입한 후 그 대금 중 20만 불을 스위스은행 구좌에 서정귀 명의로 예치했다. 그런데 그 거래에서 서정귀가 입회한 가운데 이후락이 은행 신용카드에 서명했고, 이후 잔액명세서는 이후락의 사위 정화섭에게 우송 되었다. 20만 불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프레이저위원회가 이 모든 은행기록을 찾아내 제시하자,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은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정화섭이 이후락을 위해 돈을 관리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호남정유는 72년 후반부터 74년 초까지 칼텍스가 호남정유로부터 구매한 연료용 기름값을 깍아 줌으로써 칼텍스에서 빌린 1백만 불을 갚았다. 호남정유는 그 금액에 대한 이자는 지급하지 않았다. 호남정유가 기름값을 깍아주지 않았더라면 호남정유 주주들에게 추가분으로 50만 불의 배당이 돌아갔을 것이고, 칼텍스측도 약 1백 68만 불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텍스는 호남정유를 통해 70년과 71년 공화당에 적어도 50만 불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셈이다.
더욱이 70년 이래 두 번에 걸쳐 호남정유의 한국 주주들은 8백만 불에 달하는 선불중계료를 칼텍스가 스위스 은행 구좌에 입금하도록 하는 계약에 합의했다.
이 자금은 한국 주주들의 배당권 감소와 호남정유의 칼텍스 지분 구매권의 양도를 보상하기 위해 지불된 것이었다. 칼텍스측은 프레이저위원회에서 "우리는 그 자금이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어디에 쓰이는지를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텍스의 한국 파트너 호남정유가 70년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기업일 뿐 아니라 공화당에 대한 유력한 정치자금 제공 기업인 럭키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점만 봐도 사실은 명확하다. 더욱이 럭키그룹의 소유자인 구씨 형제 중 구태회는 공화당의 핵심지도부 중 일인이었다. 그는 70년부터 73년가지 공화당 당무위원이었고, 71년부터 72년까지 정책위원회 의장이었으며, 73년에는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이후 그는 유정회 정책위 의장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럭키그룹과 공화당의 이 같은 관계나 호남정유 서정귀가 69년 20만 불을 공화당에 제공한 사실로 볼 때, 스위스은행에 예치된 8백만 불 중 상당 부분이 공화당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72년 가을 한국 기업인 최기림(럭키그룹 구 씨 집안의 사위)은 미국 기업 퍼모스트 인터내셔널 사에 한국 정부가 퍼모스트의 상품및 용역 구매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고한 후, 퍼모스트가 판매 사업을 추진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통고한 후, 퍼모스트가 판매 사업을 추진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퍼모스트는 대표를 서울에 보내 최기림 및 정부 관리들과 그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최기림은 2명의 퍼모스트측 간부와 협의하는 자리에서 "우선 박 대통령이 속한 정당에 정치자금을 헌납해 달라"고 요구했다. 퍼모스트측 대표는 미국으로 돌아가 본사와 협의한 후 최기림에게 "회사의 사규상 그런 조건으로는 협상을 계속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최기림은 퍼모스트측에 "만일 '지방적 규모'의 미국 기업이라면 정치자금 제공 협상에 쉽게 응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지방적 규모의 기업'은 미국 군수품 청부업자로서 한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 기업 에이펙스 인터내셔널이었다. 최기림은 정치자금 제공을 쉬게 하기 위해 에이펙스 사가 퍼모스트 사의 하청업자로서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조정했다. 결국 에이펙스 사와 퍼모스트의 일정한 계약하에 퍼모스트 사는 50만 불을 최기림에게 건네주었고, 최기림은 이 돈을 공화당에 전달했다.
최기림과 퍼모스트 간의 협상 직후 다른 한국 기업가 엄익호가 협상에 참여했다. 퍼모스트 사의 대표는 "엄익호는 최기림의 상급자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엄익호는 한 한.미 합작기업의 부사장이었고, 당시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태완선과 절친한 사이였다. 엄익호는 퍼모스트 사 간부와 만나 한국적 윤리관에 대해 얘기하면서 "한국에서는 정치자금 헌납이 부도덕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암시했다. 그런데 퍼모스트 사는 한국측과의 공급계약 이전에 정확한 시장성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한국 정부와 최기림, 엄익호는 퍼모스트가 시장성 조사를 끝낸 후 한국과 총판계약으로는 한국에 이를 수행할 유능한 전문가가 없다고 결론짓고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이자계약 방식을 제안했다.
그러나 퍼모스트의 이 같은 제안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퍼모스트 대표가 74년 6얼 20일자 편지로 퍼모스트 본사에 보고한 것처럼 엄익호는 서울에서의 회의 때 "그런 조건으로는 이 프로젝트 자체가 심각한 난관에 부딪칠 것"이라며 퍼모스트 대표를 위협했다.
결국, 퍼모스트 사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관심이 있는 다른 기업을 물색했는데 미국기업 AHFI가 물망에 올랐다. 그래서 퍼모스트는 공화당의 정치자금 중개상 엄익호, 최기림과 AHFI 간의 만남을 주선했다.
74년 12월 AHFI 사는 최기림을 대리인으로, 에이펙스 사를 주요청부업자로 선임했다. 그와 함께 최기림과 에이펙스 사는 최기림이 에에펙스의 대리인이 되는 별도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최기림은 에이펙스 사와 AHFI 사 양측으로부터 약 1백75만 달러에 달하는 커미션을 기대할 수가 있었다.
최기림은 이 커미션을 당시 서울대학병원장이자 정부 관리였던 김홍기 박사에게 어느 정도 나누어 주었다. 서울대학병원은 퍼모스트와 AHFI의 물품 및 용역을 구매하는 기관이었다. 에이펙스 사는 73년 2월 최기림과 김홍기를 위해 찰리와 피터라는 암호명을 사용해 김박사의 은밀한 역할을 기술해 놓았다.
프레이저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정부 관리들에게 제공된 자금은 AHFI 사와 에이펙스 사가 지불한 커미션으로부터 나왔다. 그 자금은 김박사에게 제공 되었고, 나머지는 경제기획원과 정부 관리들에게 제공되었다.
그뿐 아니라 최기림이 사용한 비용 중 50만 불도 문제다. 이 돈은 AHFI 사로부터 나온 커미션으로, 에이펙스 사 간부의 은행 구좌를 거쳐 한국과 미국에 있는 제3자의 구좌로 위장되거나 최기림의 구좌에서 현금으로 인출되었다.
이 돈 중 엄익호에게 최소한 3만 불, 프레이저위원회가 입수한 당시의 거래 수표에 등장하는 '이름을 판독하기 어려운 인물'에게 18만 불이 돌아갔고, 33만 불은 에이펙스 사 간부의 은행구좌를 통해 구범(?)에게 전달되었다. 구범은 럭키그룹 창업주 구종회의 아들이다. 구범의 삼촌 두 명이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그 중 특히 구태회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최기림의 구좌에서 인출된 현금이 공화당으로 전달되었음은 이와 같은 인맥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상품 및 용역을 구매할 때 한국 정부는 가격 할인 및 상납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런 일은 항공, 곡물, 선박, 가발, 유류 관련 생산품및 용역산업 등에서 특히 성행했다.
가장 좋은 예가 석유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석유 및 석유화학 제품의 최고 가격은 한국 정부가 통제했다. 70년대 후반 국방부 관리들은 걸프와 칼텍스 사의 한국측 파트너에게 국방부에 판매할 기름 가격을 인상하도록 요청했다. 그런데 걸프와 칼텍스가 제시한 가격과 인상된 최종판매가의 차액은 국방부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국방부는 그 자금이 군인 및 그 가족들을 위해 사용될 것이며 한국의 모든 기업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칼텍스와 걸프 사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 받아들였다. 프레이저소위원회에 따르면, 71년부터 75년까지 이런 식으로 조성된 차액이 약 75만 불에 달한다.
비록 그런 거래를 주도한 것이 국방부 관리였지만 그것은 명백히 불법 행위였다. 국방부 측이 기름 구입 차액을 어디에 썼든, 그것은 예산안을 승인하는 국회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더욱이 비싼 기름값 때문에 한국의 국방예산은 실제보다 부풀려졌는데 이 때문에 한국 국회와 미국 군사정책 입안가들은 한국 국방비의 실제수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카길 사의 방계회사인 호엔버그 브라더스 사가 한국의 대한농산과 한 면화판매 거래도 정치자금 조성과 관련해 주목된다. 그 거래에는 대한 농산의 뉴욕 지사가 개입됐다. 카길이 한국의 대한 농산에 면화를 판매했을 때, 대리인인 뉴욕의 대한농산은 거기서 발생하는 커미션 지불을 카길측에 요구했다. 이에 따라 카길측은 대리인에게 몇%, 대한 농산에 몇 %, 그리고 '미국에 있는 다른 관련업체'에 몇 %씩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카길측은 프레이저위원회에 대한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측 구매 대리인은 면화 가격을 높이 책정하라고 종종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한국의 대한농산에서 나왔으며, 그러한 과잉가격 책정에서 나오는 이윤은 커미션 등의 형식으로 한국 내의 다른 곳에 지불되는 듯 했다."
면화 가격 차액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우리는 당시 대한농산이 중정부장 이후락의 영향권 하에 있는 기업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한농산은 중앙정보부가 미국 학계와 교포학자들 사이에 친박정희 세력을 조성할 목적으로 강영훈을 내세워 설립한 전위조직인 한국문제연구소의 재정 기부자였다. 더욱이 70년대 초반 이후락과 김성곤의 압력으로 대한농산은 쌀 수입 커미션 중 1백 50만 불 이상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
이 밖에도 프레이저위원회는 유태인 무기상 슐 아이젠버그가 수년간 한국 정부의 최고위층에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아이젠버그는 계약 성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만 한 청와대 보좌관들에게 계약액의 25%에 달하는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따냈다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아이젠버그는 공화당과 고위 관리들에게 차관, 증여, 상납금 조로 5백만 불 이상을 지불했다고 한다.
또한 캘리포니아의 유니언 오일(Union Oil) 사는 "우리 회사의 한국 합작회사인 경인에너지의 주식 50%를 소유한 C.H. 김(김종희 한국화약 회장)에게 우리는 때때로 대여, 선수금, 그리고 다른 자금 등을 지불했다"고 프레이저위원회에 보고했다.
김종희(일명 다이너마이트 김)는 이후락의 친구이자 사돈이다. 73년 후반부터 74년 초반에 걸쳐 김종희는 박정희와 박종규에게 이후락이 아무런 보복도 받지 않고 귀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탄원했다. 김종희와 그의 형제 김종식 및 그의 회사, 한국화약은 이후락의 중정부장 재직시 미국에서의 중정 공작에 적극 참여했다. 김종식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학국교포 단체였던 남캘리포니아 한인회에서 지명도가 높았는데, 이후락의 사위이자 전 중앙정보부 2국장 정화섭의 공작을 지원했다. 김종식과 정화섭은 반 박정희 인사를 한인회 회장직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런 유의 활동은 73년 중앙정보부와 한국 외무부에서 작성한 '한국교민 지도지침'이란 문서에 나타나 있다. 김종식은 또 한미정치협회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그 협회는 문선명 교단과 한국 정부 관리들이 개인적, 재정적으로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단체였다. 한국화약은 중앙정보부 전위조직인 강영훈의 한국문제연구소에 중앙정보부 및 타 기관들이 기부한 총 27만 달러 중 2만 달러를 냈다. 이는 유니언 오일 사가 김종희와 한국화약에 제공한 자금이 미국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에 사용되었슴을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제 2장 이후락이 관리한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 것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 것"
한국 정부가 기용한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이 미 의회 의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뿌린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조사하던 미 의회 외교위원회 국제관계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위원회)는 박동선이 뿌린 박정희 비자금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둘째 아들 이동훈을 몇 차례 소환했다. 78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이 씨는 계속 피해 다니다 결국 소재지가 발각돼 비밀 증언 형식으로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그는 증언대에서 "내 아버지 명의의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의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박정희 비밀구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물론 "도대체 이동훈이 왜 입을 열었을까" 라고 궁금해 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한보청문회에 출두한 정태수 회장처럼 '자물쇠 입'이나 '실어증'으로 버티면 되는 것 아니가 하는 의문일 텐데, 그것은 완전히 한국식 사고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증인출석 요구를 받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이동훈의 소재를 FBI를 통해 파악한 프레이저위원회는 그에게 소피나(강제소환장)를 발부했다. 소피나를 받고도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FBI에 의해 강제구인 당한다. 프레이저위원회는 그를 증언대에 세우기 위해 '비밀증언'이란 타협책을 제시했다. 미 의회의 조사활동 목표가 박 정군의 비밀자금으로 미국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려 한 한국인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뇌물을 받은 의원들을 밝혀 내 처벌하고 의회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동훈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프레이저청문회의 비밀증언대에 선 것이다.
그런데 일단 증언대에 선 이동훈은 결코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프레이저청문회의 조사반들은 이미 이후락 일가가 박정희 정권의 비밀자금을 조성하고 비축하고 유통시킨 과정에 대한 상당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증거자료들은 CIA, FBI, 법무성, 국세청, 국무성의 회계전문가들이 미국 내는 물론 스위스. 바하마. 도쿄 등 전 세계의 박 정권 비자금 거래 은행들의 거래기록을 뒤져 확보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걸프가 스위스은행의 이후락의 비밀구좌에 입금시킨 돈의 내역을 은행측이 이후락의 사위 정화섭에게 통보한 명세서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명백한 증거자료를 들이대며 심문하는 특별검사들의 칼날 같은 질문 앞에서 이동훈이 무슨 수로 비밀구좌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동훈은 "일본 모 은행의, 당신 이름으로 되어 있는 구좌에 예치돼 있는 2백만 불은 누구 돈이냐"는 추궁에 "그 돈은 아버지(이후락)로부터 받았지만 실제로는 박 대통령의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미국 최고의 일류 변호사까지 동원했지만 명백한 증거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끝내 사실을 부인했다가는 위증죄로 법정에 서는 일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5.16 직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63년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직에 있던 이후락이란 인물을 나는 공식 석상에서 몇 차례 만난 일이 있다. 그런데 이후락에 대해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사람은 정일권의 후임으로 63년부터 주미대사로 일했던 김정렬이었다. 그는 은퇴 후 서울에서 만났을 때 이런 말까지 했다.
"문 기자, 이후락이같이 교활한 놈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거요. 이후락과 김형욱이란 악당 손에 박 정권은 결국 몰락하고 말 거야. 3선개헌 때 우리 공화당 의원들이 그 두 놈 손에 어떻게 끌려갔는지 아시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앞 사람 벨트를 붙잡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소경처럼 질질 끌려간 곳이 제3별관이야. 가보니 촛불 몇 개 켜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의장이 시간을 끈다고 장경순(당시 부의장)이가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 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 하면서 땅땅 때리는데, 개헌안 통과시키는 데 1분도 안 걸렸어요. 모두가 화적단 같은 놈들이야. 문 기자, 내가 죽은 후에 언젠가 이것만은 역사에 밝혀 주시오."
"대사님, 그러게 5.16 나고 나서 공화당 사전 직후 의혹이다 뭐다 해서 모두들 들고 일어나 공화당 해체하라고까지 하는 판국에 무엇 때문에 공화당에 참여하셨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5.16 났을 때 내무장관으로 있던 홍진기가 발포 명령자에다 사사오입 개헌 관련으로 잡혀 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거든. 그런데 홍진기하고 나호고는 일제 때부터 아는 사이로, 자유당 때 각료도 같이 했고 해서 인간적으로 몰라라 할 수 없는 관계였어요. 그런 판에 하루는 박 의장이 나를 부르더니 '공화당 의장을 좀 맡으라'고 하더구먼. 그래서 나도 '청이 있다. 공화당에 갈 테니 홍진기 좀 풀어 달라'고 했지. 홍진기 살리려고 공화당 간 거야."
김정렬 씨는 이후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요. 해방 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들 군사영어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 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겠지."
공화당 정책위원장 박준규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자가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 나가더구만."
이 때 이후락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CIA의 뒷받침 덕분이었다. 민주당 정권에서 장면의 비서를 지내 선우종원은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 정권 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 할 '정보조사국'을 만들었다. 당초 정보조사국 창설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 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 맡게 된 것을 보니 CIA 한국 지부에서 그를 민 것 같았다."
사실 이후락은 5.16 이후 CIA가 박정희 주변에 깊숙이 박아 놓은 첩자였다. 그는 최고회의 공보실장 시절부터 최고회의 정보를 미국 측에 보고했다. 미국으로서는 창군 초기부터 내내 미국 정보기관의 끄나풀이었던 이후락을 좌익 전력을 가진 박정희 옆에 붙여 놓았으니까 박정희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일방적으로 감시만 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이후락 같은 미국 끄나풀을 곁에 둠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63년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이후락의 이른바 '떡고물' 정치가 본격화 되었다.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었다. 이후락은 자신의 아들 딸, 사위 등을 모두 미국에 보내 놓고 미국에서조차 축재에 열을 올렸다. 당시 그의 사위 정화섭과 둘째 아들 이동훈은 LA에 있었다. 그들은 현지에 은행을 설립해 함께 주주로 참여했고 교포방송인 LA방송국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 실무 작업을 위해 MBC 직원들이 LA에 파견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재력을 기반으로 정화섭은 LA한인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정화섭은 또 LA의 부자동네인 윌셔 블루버드에서 당시 돈으로 3천만 달러를 주고 빌딩을 사들여 한국 교포들에게 세놓았다. 이 과정에서 교포들 사이에 "이 빌딩은 실은 이후락 것이다."라는 소문이 나서 현지의 민주화운동 그룹들이 "이후락의 부정부패와 재산 해외도피의 산 증거인 문제의 건물을 불태워 버리겠다" 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훗날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에서 FBI가 조사에 들어갔을 때 정화섭은 그 빌딩을 이미 매각한 뒤인 것으로 확인 되었다.
이후락은 70년 중정부장에 취임한 후 그 해 12월 정보 분야에 아무 경험도 없던 사위 정화섭을 중정 국제담당 2국장으로 앉히고 둘째 아들 이동훈도 자신의 비서로 임명해 72년 남북회담 당시 모두 북한까지 자신을 수행하게 했다.
게다가 그는 아들들을 재벌 딸들과 결혼시켜 온 나라를 사돈 관계로 얽어 놓았다. 이후락의 첫째 아들 이동진(50)은 서정귀(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 흥국상사, 호남정유 사장)의 사위가 됐는데, 김동조 주미대사 시절 대사관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둘째 아들 이동훈(49)은 한국화약 창업주이자 전 회장인 김종희(일명 다이너마이트 김)의 사위가 됐다. 이들 사돈기업을 포함해 이후락의 후원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다섯 개 기업의 회장들은 세칭 '이후락의 5인방'이라 불렸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가 바로 그들이다.
사실, 미국의 석유재벌 칼텍스와 유니언 오일 사의 한국 내 합작선 선정은 제 3공화국 사상 최대의 이권이었다. 한국 재벌들이 석유 합작선을 놓고 벌인 혈투에서 호남정유와 한국화약 그룹이 최후 승리를 거둔 데에는 이후락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 호남정유와 한국화약그룹(경인에너지)이 모두 사돈기업이고 보면, 이후락은 유공.호남정유.경인에너지 이 3대 정유공장을 가진 한국의 석유재벌들과 사돈이 된 셈이다.
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 등 미국의 국제적 석유자본들은 기름값을 정부가 결정하는 한국에서 석유 공급을 독점함으로써 폭리를 취하고 그 대가로 박정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그것을 관리한 것이 이후락 일가였다.
내가 이후락 일가 부정부패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게 된 것은 사실 친구 ㅊ 덕분이다. 50년대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그녀는 이후락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이후락과 부인 그리고 자녀들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ㅊ은 후암동 이후락의 집에 드나들면서 접하게 된 기기묘묘한 일들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 집에 돈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 보니 집주인이 내방객으로부터 받은 봉투를 소파 밑에 밀어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버려 청소하던 식모가 수백, 수천만 원짜리 수표가 든 돈봉투를 주은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초등생이던 이후락의 셋째 아들 이동욱이 ㅊ의 집에 놀러 왔다가 ㅊ의 어린 딸에게 돈 세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폐를 한 장씩 넘기며)
"돈은 1억, 2억, 3억... 이렇게 세는 거야."
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평양을 왔다 갔다 하던 이후락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때에 나는 서울을 방문해 ㅊ의 집에 며칠 머물렀다. 그 때 영어를 배우러 온 이후락의 부인 정윤회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ㅊ이 나를 "미국 친구"라고만 소개했기 때문에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말끝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남북 통일을 시킬 것이다"라고 자랑을 하기에 나는 한마디 쏘아붙였다.
"정 여사, 당신 남편은 도둑놈이오."
그러자 이후락의 부인은 펄펄 뛰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건 다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세간에서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우리 주인은 절대로 결백합니다. 부정이라고는 모르는 분이예요."
이후락 부인과 나는 이후락이 도둑놈인가 아닌가를 놓고 한참이나 설전을 벌였다.
내가 자리를 뜨자 이후락의 부인이 ㅊ에게 "그 사람 누구냐"고 물었다라고 한다. ㅊ이 "워싱턴의 문 기자"라고 하자 다음 날 그녀는 돈봉투를 가지고 와서 내게 내밀었다. 기가 막힌 나는 그녀에게 목청을 높였다.
"나까지 도둑놈으로 만들려고 이러십니까?"
5공 시절, 나는 동향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 온 박영옥(김종필 부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부정축재 액수에서) 우리보다 이후락이가 적게 나왔는데 이럴수가 있나. 신군부 놈들이 이후락이는 봐준 거다. 당시 신군부 군인들의 기세가 어땠는줄 아니? 그들은 나에게 '이 도둑년' 하면서 내 손가락에 낀 반지까지 빼 갔다. 그러면서도 이후락이는 봐줬으니 신군부에다 뭐를 먹였는지..., 목숨 바쳐 혁명한 사람은 두 번이나 외국으로 쫓아내고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권력은 다 해먹은게 바로 그 자다."
이처럼 온 나라를 혼맥으로 엮어 가며 차기 권력을 향한 기반을 착착 다져 가던 이후락도 73년 12월 박정희의 '가지치기'에 의해 해임되고 만다. 권좌를 떠난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후락은 74년 4월 조계종 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을 빠져나와 런던으로 갔다. 그 곳에서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미국 측이 말썽 많은 그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자, 당시 한.영 영사협정에 따라 비자 없이 갈 수 있었던 영국령 바하마로 갔다.
거기서 그는 그 때 돈으로 50만 불을 주고 저택을 사들이려고 했다. 이후락이 50년대에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있을 때 알고 지내던 한 여성이 이후락의 부탁으로 바하마로 가서 집 구입 계약을 대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아챈 미 국무성 레이너드 한국과장이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 간의 채널을 통해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결국 영국 정부가 브레이크를 걸어 이후락의 저택구입 계약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락이 바하마에 집을 사서 정착하려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하마는 은행에 돈을 갖다 넣어도 비밀이 보장되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의 대부호들이 재산도피 장소로 애용하는 곳 중 하나가 바하마 은행이다. 이후락이 바하마에 정착하려 한 것은 그 역시 재산들을 상당 부분 바하마에 도피시켜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형욱에 이어 이후락마저 해외로 도망가자 박정희는 이후락을 다시 귀국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자신의 엄청난 치부들이 폭로될 것을 극도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후락을 설득하기 위해 보낸 밀사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조선일보 외신부의 김아무 기자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잔인성을 잘 아는 이후락 역시 노심초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서울과 바하마 사이에 몇 차례나 밀사가 오갔다. 최종적으로 이후락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을 확약하는 박정희의 친필 편지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박정희로부터 그것을 받고서야 74년 2월 극비리에 귀국했다.
[워싱턴포스트]가 최초로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74년 당시 정화섭, 이동훈은 모두 뉴저지의 호화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이동훈. 정화섭이 아직 프레이저청문회에 출두하기 전에 필자는 그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뉴저지의 저택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나는 가발을 쓰고 미국 기자를 기자석에 앉혔다. 우선 그 지역 부동산 브로커들을 만나 봤더니 "이동훈, 정화섭이 70년대 초에 모두 현금으로 35만 불을 지불하고 지금 살고 있는 저택을 사들여 깜짝 놀랐다"고 증언했다.
이동훈. 정화섭의 저택 사진을 찍으며 들여다보니 정화섭의 집안에는 캐딜락, 벤츠 등 자가용만 세 대가 서 있었다.
우리는 집 근처에 잠복했다. 한나절이나 지난 뒤에 마침내 정화섭의 처(이후락의 외동딸)가 아이를 태운 채 차를 몰고 나왔다. 우리는 그녀와 인터뷰하기 위해 그 차를 추격했다. 그러나 우리의 추격을 알아챈 이후락의 딸이 아이까지 자동차 안에 버려두고 도로변의 대형상가 안으로 피신해 버리는 바람에 인터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73년 이후락 해임 후 박정희의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박정희는 비밀구좌의 예금주 이름을 모두 박근혜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10.26 이후 전두환이 보안사 요원 5명과 박근혜를 스위스로 보내 그 비밀구좌의 돈을 모두 찾아 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 때 따라갔던 요원 중 한 사람이 미국에 와서 "그 때 수고비로 5만 달러를 받았다"고 발설한 일이 있다.
제 3장 망명 중앙정보원 김상근, 박정희에게 사기친 '로비스트' 김한조
워싱턴 주재 중앙정보부원 김상근의 망명을 주선하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에는 몇 명의 한국 '로비스트'들이 등장한다.
박동선. 김한조. 수지 박. 톰슨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80년대에 한국의 여러 기자들이 기사를 쓴 바 있다. 최근에는 본인들까지 나서 자기네 활동의 정당성을 필설로 주장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들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그들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열렸던 미 의회 외교위원회 국제관계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위원회)에서 76년 미국에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은 일명 '백설작전'과 김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74년 9월~75년 6월 사이 나는 김한조에게 한 번에 30만 달러씩 두 번에 걸쳐 60만 달러를 전달했다. '백설작전'이란 한국의 대미 로비활동을 위해 서울 중앙정보부의 양두원 실장이 외교행낭으로 자금을 보내오면 내가 김한조에게 그 돈을 전달하고 김은 그 돈을 가지고 미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공작을 한다는 것이다."
주미 한국대사관 김상근 참사관이 미국에 망명한 것은 76년 11월 26일의 일이다. 직함은 참사관이었지만 그는 대사관에 파견된 중정
요원이었다. 그는 왜 망명했는가.
당시는 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의 코리아게이트 첫 보도 이후 미국 언론에 한국 관련 보도가 연이어 터지고 미 의회에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던 비상한 시점이었다. "이런 사태 하에서 주미대사관은 대체 뭘하고 있는가" 하는 불호령이 매일 본국으로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청와대 정무 1수석비서관 유혁인이 주미대사관에 급파돼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그간 '백설작전'에서 김한조를 담당해 온 김상근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 희생양으로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김상근을 동정한 누군가가 그 사실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안 그래도 김상근은 백설작전을 자신에게 지시한 양두원 중앙정보부 실장이 11월 9일 해임된데다 11월 23일자 [뉴욕타임즈]에 '김상근 서울 소환설'이 보도되는 등 자신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불안에 떨고 있던 참이었다. 김상근이 내 사무실로 급히 전화를 걸어 온 것이 바로 그 때였다.
"문 여사님, 한국에서 나를 잡아가려 합니다. 망명할 길을 주선해 주십시오."
그는 벌벌 떨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중정의 생리를 잘 아는 그로서는 본국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신변에 닥칠지 훤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김상근은 73년 주미대사관 이재현 공보관장의 망명 절차를 주선해 준 것이 나라는 사실을 알고서 마찬가지로 내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하긴 필자 역시 73년 11월 한국 중앙정보부의 체포 위협을 피해 미국에 망명했던 동병상련의 경험을 가진 처지였다. 평소에 얌전한 선비 같던 김상근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괄괄한 경상도 여자인 그의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천상 이번에도 내가 도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리아케이트 보도 과정에서 미국 언론들은 김상근을 '동양의 제임스 본드'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아마 그를 직접 만나 보지 못해서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는 천성이 얌전한 선비 타입으로, 서울대 중문과를 나와 한문과 중국어에 능했다. 6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구직난이 심각했다. 그래서 어학 실력이 뛰어난 일류대 출신의 많은 청년들이 높은 보수와 안정된 근무조건에 끌려 61년 중앙정보부 설립 당시 그 곳에 연구직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흔히 중정 요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도 당시의 중앙정보부에는 많이 있었다. 김상근 참사관의 동기로서 중앙정보부 LA책임자로 있던 이아무개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백두진 국회의장이 LA에 있는 자기 딸에게 전해 주라면서 장농, 병풍 등을 외교행낭 편으로 부쳐오자 "외교행낭이 자기 집 우체통인가"라고 분개하며 물건들을 몽땅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가 목이 잘렸다.
김상근도 61년 중앙정보부에 연구직으로 들어갔다가 70년 주미대사관에 부임해 와서 뜻밖에 정치공작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김상근에게 대답했다.
"FBI에 연락해서 신변 보호를 요청할 테니 안심해요. 그러나 당신이 정치적 이유로 망명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모든 증거서류를 미리 옮겨 놓으세요. 미국에서는 증거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신 가족의 망명에 내가 관련된 사실을 절대 공개하지 말아 주세요."
김상근이 김한조에게 돈을 전달하고 받은 영수증 등 백설작전과 관련된 모든 서류들을 챙기는 동안 나는 김상근의 망명 추진을 위해 FBI와 미 국무성의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김상근과 그의 가족이 무사히 FBI의 보호 하에 들어갔다고 통보 받은 후 나는 타이슨스 코너에 있는 김상근의 집에 전화를 걸어 봤다. 전화를 받은 내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FBI 요원이었다. FBI측은 김상근 일가를 모처로 옮겨 놓고 집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지미 카터 대통령 당선자의 고향이 플레인스 조지아로 숨어 버렸다. 우선 코리아게이트 보도에 열을 내고 있는 미국 언론들의 추적을 따돌려야 했고, 다급해진 한국 중앙정보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카터 대통령 당선자가 플레인스 조지아에 머물며 집권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악관 기자단도 플레인스 조지아의 베스트웨스턴 호텔에 진을 치고 취재중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미국 언론들은 독자적으로 취재해 "김상근을 망명시킨 것은 쥬리 문"이라고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김을 망명시킨 것은 한 한국인 저널리스트"라고 썼고 [이브닝 선] 지는 아예 내 이름까지 밝혀 버렸다.
김상근 참사관이 FBI의 보호 하에 들어간 후로는 나도 그와 접촉할 수가 없었다. FBI가 제공한 안가에서 개인교사를 데려다 놓고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는 중국어 전공자로 영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김상근이 프레이저청문회에 나와 증언한 이후 나는 그를 만난 일이 없다. 당시 미국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분석관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를 교육시켜 중국에 파견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서 추방된 외교관 1호' 워싱턴 중앙정보부 공사 양두원
그러면 김한조란 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를 박정희에게 소개한 것은 바로 육여사였다.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 김영희가 김한조를 '한 해 2천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로 집중 조명한 특집기사가 발단이 된 것이다. 항상 여러 신문을 읽고 유익한 기사가 있으면 남편에게 브리핑하는 육여사가 이 기사를 보고 "여보, ㄹ재미교포 중에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 있대요" 하고 전하자 박정희가 "그래? 한번 만나 볼까"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로서는 내심, 한 해에 2천만 달러나 버는 교포라니 정치자금이나 좀 받아 볼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74년 들어 미국 의회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1억 달러 가까이 삭감하면서 박정희에게 인권개선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그 동안 '민간 로비스트'로 기용해 온 박동선은 그런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나친 돌출 행동으로 미국 조야의 의심을 사서 오히려 한국 정부에 손해를 끼치고 있는 판이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로비스트를 필요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한조를 기용하는 일에 다리를 놓은 것이 양두원 중앙정보부 기획실장이었다. 그는 73년까지 주미대사관 공사(중앙정보부 지국장)로 있었는데 '미국에서 추방당한 외교관 1호' 였다. 양두원이 미국에서 추방당한 사연을 알아보자.
양두원은 워싱터 주미대사관에 중앙정보부 공사로 주재하면서 교포 사회의 반 박정희 운동세력들을 뿌리 뽑는 공작을 주로 펼치고 있었다. 그는 이상호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수법은 60년대 한국에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다루던 방식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교포들에게 "죽인다 살린다"하는 정체불명의 전화를 걸어 불안하게 하는가 하면, 유학생들에게는 간첩혐의를 씌우는 식으로 협박했다. 그렇게 당한 사람 중 대표적인 이가 유병환 박사(농학)다. 그는 호남 출신으로서 김대중 씨가 73년 일본에서 납치되기 전 미국에서 유신 반대운동을 전개할 때 적극 참여했다. 그러자 양두원은 유 박사가 서울에서 미국에 올 때 베를린을 경유해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베를린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 북한 대사관에 갔다 온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지금 너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반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윽박질렀다.
심지어 73년 5월 김대중 씨가 LA 컨벤션 센터에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에는 그 지역 폭력조직의 일원으로 재미교포연합회장이라는 거창한 직책을 내걸고 있던 이민희 등을 사주해 강연장 2층에 토마토케첩 병을 박스로 쌓아 놓고 강연회를 방해하려고까지 했다. 이민희는 중앙정보부의 자금을 받아 미국 전역의 한인회 행사에 참여하고, 선거 때에도 중정의 자금을 받아 미국 전역의 한인회 행사에 참여하고, 선거 때에도 중정의 자금 지원으로 연합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던 자였다. 결국 주최 측인 한민통 의장 김재준 목사의 요청에 따라 경찰이 출동했다. 허가받은 집회를 폭력으로 방해하려 한 이민희 등은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나는 국무성 기자회견 때 중정의 불법적 활동에 관한 질문을 던져 사태를 문제화 했다.
"미국 내에 주재하는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이 시민권자는 물론이고 한국이 영주권자, 체류자, 유학생들을 공갈 협박하고 이들의 허가받은 집회를 폭력으로 제지하려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무성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미국 정부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대변인은 대게 "그게 사실이라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변한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 일단 질문이 나오면 국무성 대변인은 반드시 그에 대해 어떤 사후조치를 취했는지를 밝히게 되어 있다. 곧 FBI가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공갈. 협박. 테러 등 어떤 종류의 피해라도 당한 사람은 모두 신고하라"고 발표했고, 그 결과 피해 사례가 속속 입수되었다.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LA에 정착한 김운하는 훗날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당시 그가 FBI에 신고했던 피해 상황을 다시 한 번 증언했다.
"한국 중정의 활동 때문에 로스엔젤레스 시장은 톰 브래들리가 아니라 한국 총영사입니다."
그는 교포신문 [뉴코리아]를 발간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을 주장했는데, 한국 총영사 박영은 그에게 "한국 정부를 계속 비판하면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실제로 [뉴코리아]가 비판을 계속하자 박영은 이 신문의 수많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광고를 해약시켜 버렸다.
그 후 김운하는 한 중정 요원으로부터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의 통첩을 받았다.
첫째는 비판을 중지하고 한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것.
둘째는 신문사를 팔거나 폐업하는 것.
셋째는 보복을
당하는 것이었다.
김운하가 이 통첩을 무시하자 중정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그 결과 친척. 친지들이 멀어져 갔고 신문사 직원들은 사직했으며 새로운 직원도 구할 수 없었다. 김운하 부부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그 신문사를 꾸려 나가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반유신 교포신문을 발행했던 송선근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어야 했다. 그가 한국 정부 비판을 계속하자 총영사관의 중정 요원 임만성은 신문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특히 송선근은 프레이저위원회에서 76년 한국인 거주지 베이 지역의 관리 선거 유세 기간 중 발생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는 선거 전날 밤 한국 영사관의 지원을 받고 있는 후보자들의 불법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카메라를 가지고 영사관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중정 요원 임만성이 저를 발견하고는 자기 차로 제 차를 들이 받으려 했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제 친구이자 그의 친구이기도 한 정태봉에게 '송선근이를 없애 버리겠다'고 얘기했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송선근은 광고해약 사태로 신문 발간을 중단해야 했다.
시카고의 제화상인 조병웅은 중정 요원들에게 "반유신 운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한국에 있는 당신 가족들이 해를 입을 것이고, 특히 귀국중인 부인이 다시는 미국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당했다. 실제로 그의 부인은 전화로 "중정에 끌려가 심문 받았다. 무서워 도저히 못살겠다. 당신이 반정부 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선언 했다 한다.
또 반유신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한국 유학생 등은 주미대사관 교육담당 파견관 강경구로부터 "시위에 참여하면 한국에 돌아가서 취직하기 힘들 것"이라는 협박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이 중 특히 김대중 씨 강연회를 폭력으로 저지하려 한 사태는 국무성 내에서도 크게 문제시 되었다. 73년 8월 17일자 국무성 비망록에는 "이상호 공사가 워싱턴에 남아 있는 한, 그는 계속적으로 한국 교포사회에서 분쟁과 미국에 대한 방해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73년 12월 국무성은 최초로 이상호 즉 양두원이 귀국해서 오히려 기획실장(이후에는 중정 차장보)으로 승진해 워싱턴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김한조와 박정희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나는 [중앙일보]의 김한조 기사를 보고 기가 막혔다. 그래서 김영희 특파원에게 물었다.
"당신 김한조가 한다는 화장품 회사에 가 봤어요? 그 사람, 2천만 달러는 커녕 하루에 1달러나 버는지 몰라요. 현재 미국의 우리 교포 중에 2천만 달러 수입을 올리는 사업가는 아무도 없어요. 대체 그 사람 누구한테 소개 받았어요?"
-"전에 이재현 공보관장(73년 주미대사관 근무중 미국에 정치망명)이 소개해 준 사람이라 믿고 썼는데요?"
결국 이 기사로 인해 김한조는 일약 박정희의 눈에 띄어 한국에 갈 때마다 청와대에서 박정희 가족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박정희가 피아노를 치면 자기는 노래를 불렀다고 자랑할 만한 깊은 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듣고 보니 이재현 공보장관이 김한조를 김영희 기자에게 소개하게 된 경위도 짐작이 갔다. 김한조나 '코리아게이트의 주역'인 박동선 같은 부류의 인간들의 행동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의 국경일이나 경축일을 맞아 대사 주최로 파티라도 열리면 초청장도 없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자기 PR에 열을 올리는 것이 바로 김이나 박과 같은 사람들이다. 내가 김한조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의 그 같은 활동(?) 때문이었다. 김한조는 50년대 후반 도미한 미국 시민권 소지자로서 워싱턴 지역에 사는 무명의 교포 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75년 초부터 주미 대사관에서 열리는 파티마다 참석해 거드름을 피우는 등 수상한 점이 많았다.
당시 박동선 사건을 조사중이던 나의 취재망에 느닷없이 김한조라는 이름이 등장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나는 김한조의 사기 행각을 직접 목격한 일이 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1600번지에 있는 백악관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산 스시'라는 유명한 불란서 요리집이 있다. 그 곳은 워싱턴에서 가장 유명한 불란서 요리집 두 곳 중 하나로 키신저를 비롯한 역대 미국 고위 관리들이 드나들었고 백악과 보좌관들이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 단골로 들르는 곳이다.
하루는 내가 CBS 앵커 마빈 칼브와 함께 산 스시에 갔는데 뜻밖에 김한조 부부가 레스토랑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다가 마빈에게 반갑게 "하이" 하는 것이었다. 자리를 잡은 후 마빈이 나에게 물었다.
"저 코리언은 내가 점심 먹으러 여기 올 때마다 꼭 저 자리에 앉아 식사하면서 '하이' 하고 인사하는데 저 사람이 누군지 아니?"
듣고 보니 뻔했다. 미국 사람들은 낯모르는 사람이 "하이" 해도 으레 웃으며 "하이" 하고 답례한다. 이를 노리고 김한조 부부는 매일 산 스시의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하면서 테이블 옆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백악관 거물들이나 동행한 기자들에게 아는 척을 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김한조 옆에 있었다면 사기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빈에게 말해 주었다.
"사기꾼이다. 조심해라."
미국인들은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웃음을 보이고 건들건들해서 사귀기 쉬워 보이지만, 어떤 이유로든 한번 상대를 불신하게 되면 차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데 김한조는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러나 김한조의 웃는 얼굴을 대하는 마빈의 얼굴은 완전히 얼음장이었다. 미국에서 사기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77년 미 하원 윤리위원회에서 증언하던 김상근 참사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국에서 외교행낭 편으로 돈 30만 불을 보내왔을 때의 일입니다. 나는 지시대로 그 돈뭉치를 김한조의 집에 가지고 가서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내가 얼마라도 떼먹었을까 싶어서 김한조 부부가 응접실에다 1백불 짜리 지폐 30만 불을 쌓아놓고 한 장 한 장 침을 묻혀 가며 내 앞에서 세는 걸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 조국에는 아직도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학교에 가는 결식아동들이 숱하게 있는데.."
그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김한조에게 갖다 준 돈이 총 60만 불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김한조는 이 돈을 가지고 한국의 국익을 위해 어떤 로비를 했는가.
김한조가 지금도 자신의 '로비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뉴욕타임스] 75년 1월 8일자 초빙논설란에 박정희를 찬양하는 논설을 게재한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쟁점에 대해 찬반양론을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미국 신문들의 전통에 따라 당시 강력한 박정희 비판 논설이 계속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실어 준 것에 불과했다. 어쨌든 이 같은 '성과'는 박정희의 중앙정보부를 고무했고 김한조의 사기 행각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김한조의 핀들리 대학 동창으로 가이어란 사람이 있다. 74년 당시 오하이오 출신의 공화당 초선 의원이었다. 그는 김한조가 의회 로비를 한다고 설치게 된 계기가 된 사람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국회의원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파티를 연다. 74년 8월 사임한 닉슨의 뒤를 이어 포드가 대통령에 취임한 수 열린 파티에 가이어가 김한조를 데려갔는데, 이것을 가지고 김한조는 자신이 백악관과도 통한다고 한국측에 과시하고 '로비스트'를 자청했던 것이다.
김한조는 가이어에게 "박정희는 한국의 안보와 경제 발전을 책일 질 수 있는 유일하고 훌륭한 지도자다. 미국은 한국의 혈맹으로서 한국의 안보를 위해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켜야 한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국회 본회의장에서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는 라이샤워 교수(하버드 대학)등 미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뉴욕타임스] 칼럼 등을 통해 박정희를 독재와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악마라고 질타하던 때였고, 미국 의회 역시 박정희의 인권탄압을 문제삼아 군사원조를 삭감하는 결의안을 통과 시킨 바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본회의장에서 박정희 지지 연설을 하기가 창피했던 가이어는 연설도 안 하고 하원 국회의사록에다 김한조가 요청한 발언 내용만 올려놓았다. 보통은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해야 그 내용이 의사록에 기록되지만 의원이 의회기록실에 요청하면 희망하는 발언 내용을 의사록에 올려 준다. 김한조는 이것을 들고 박정희에게 가서 자신의 '업적'을 선전하는 데 열을 올렸다. 외무부에도 미국 의회 담당이 있어 주미대사관을 통해 미의회에서 있었던 한국 관계 찬반 발언에 대해서는 모두 청와대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어쨌든 박정희로서야 허구한 날 미 의회에서 독재와 인권유린으로 난타만 당하던 처지에 미국 국회의원이 본회의장에서 자신을 극구 칭송하는 연설을 했다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가이어는 가이어대로 그런 식의 어렵지 않은 '친한' 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돈을 챙기고 한국에 갔다 하면 주지육림에 빠질 수 있었으니 김한조의 요청을 사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국회의사록에 올려놓은 가이어의 박정희 지지 발언 같은 것이 실제로는 미국의 대한정책이나 박정희 정권을 보는 미 의회의 시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75년은 미국 내에서 한국 정부가 저지른 불법행위들이 미 의회에서 줄줄이 폭로되던 해였다. 75년 6월 상원 국제관계소위원회 산하 '다국적기업소위원회' 청문회에서 걸프 사 사장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67년에 1백만 달러, 71년에 3백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증언했다. 6월 10일에는 73년 망명한 전 주미대사관 공보관장 이재현이 '인권문제 청문회'에서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국 의회 지도자들을 매수하려 했으며 김동조 주미대사가 의회를 방문하기 전에 1백 달러짜리 지폐들을 봉투에 넣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이어의 박정희 지지 발언이 과연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김한조는 김상근에게 "가이어 의원을 통해 곧 세네타 맨스필드 상원의원(민주당 상원 원내총무)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 말고도 다른 중진 상원들을 만나려면 상당한 기부를 해야 하는데 그를 위해 내 돈을 10만 불이나 썼다. 이런 비용은 한국에서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라면서 계속 추가 자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의회와 법무성의 조사 결과 김한조가 의원들에게 제공한 돈은 거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가 김상근 등으로부터 넘겨받은 한국 정부의 로비자금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 답의 일단은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대한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의 고급 가구점인 '슬론'의 지배인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김한조라는 코리언 아메리칸이 무려 3~4만 불 어치의 가구를 한꺼번에 현금으로 사 갔다. 우리도 깜짝 놀랐다."
1천 달러짜리 가구라도 3년 할부로, 그것도 신용카드로 사는 것이 미국 사람들의 소비 패턴이다. 제 아무리 백만장자라 해도 3만 불, 4만 불을 현금으로 척척 지불하는 미국인은 없다. 그러니 김한조의 행동이 얼마나 놀라웠겠는가.
내가 김한조라는 인물의 사기 행각을 파헤치는 기사를 한창 쓰고 있던 때인 76년 6월경, 김한조는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필자에게 전해 왔다.
"문명자란 여자 왜 그리 까불어. 그 여자 나의 미국 전위대들의 실력을 모르는군. 더 이상 나를 건드리면 가까운 장래에 눈물을 찔찔 흘리면서 미국에서 강제 추방될 테니, 그 때 기념사진 찍을 준비나 하라고 전달하시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한조의 사기 행각을 어느 정도 눈치 챘던 것 같다. 나는 10.26 이후 미국에 온 김부장의 동서 최세현 전 주일공사로부터 "김한조가 한국에 와서 30만 달러인가를 받아 가는데 김 부장이 영수증을 쓰라고 요구했다. 김한조가 이에 반발해 일대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김한조가 한국 정부로부터 받아 챙긴 돈의 총액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김한조는 결국 김상근이 제시한 영수증이 물증으로 채택되어 의원매수 공모죄와 위증죄로 77년 9월 27일 기소되어 78년 4월 8일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뒤늦게야 그의 사기 행각을 눈치 챈 박정희 역시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사기꾼과 떳떳하지 못한 거래를 할 때 결국 누가 손해를 볼 것인지는 뻔하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한국 국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주미공사 집에서 설거지 도맡아 한 박동선
김한조를 이야기하면서 박동선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코리아 게이틀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나는 박동선의 행적을 취재하면서 여러 번 실소를 금치 못했다.
52년 고등학생 시절 미국으로 건너온 박동선은 시애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인근의 시골 대학에 다니다가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으로 옮겼다. 공부에는 관심 없던 그가 이 명문대학의 졸업장을 따낸 것은 천부적인 사교성(?) 덕택인 듯했다.
박동선은 조지타운 대학 시절에 시험철만 되면 교수들을 찾아가 "고국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식으로 사정을 해 시험을 안보고 학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속인 교수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우연히 교수들끼리 한담을 하던 중 통썬 팍(박동선의 미국식 발음)이라는 한국 학생 얘기가 나왔는데 너무 많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위독했던 것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래서 분노한 교수들이 퇴학시키려고까지 했는데 역시 그의 천부적 사교술로 그 위기를 모면했던지 졸업장은 얻어서 나왔다.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한 62년 이후 그는 주미 한국대사관 주변을 맴돌았다. 권력에 접근할 기회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심지어 박동선은 주미공사나 참사관 집에서 무슨 모임이나 파티가 열릴 때면 으레 나타나 일을 거든다면서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도맡아 하기 일쑤였다. 그런 박동선의 모습을 몇 차례 목격한 내가 한번은 집주인에게 물었다.
"아니, 저 사람은 공사께서 부르셨습니까.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무슨 일을 거든다고 저래요?"
-"부르긴요, 자기가 자발적으로 온 거지. 우리도 일손이 필요하니까 도움이 되고."
60년대의 한국 외교관들은 식모를 고용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박동선은 그런 '파출부 활동'으로 장예준 경제담당 공사 등과 얼굴을 익혀 훗날 쌀 수입 독점권을 따내는 데 활용했다.
박동선 때문에 김정렬 주미대사는 우리 교포들이 정식 초청장 없이 대사관에 와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사건의 발단은 워싱턴 코네티컷 가에 있는 '옌첸'이라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벌어졌다. 그 식당은 백악관이나 국무성 관리들, 워싱턴 정가의 여러 인사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당시에 주미대사관 참사관으로 있던 박근 씨가 미 국무성 한국과장을 데리고 옌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식사를 마친 박 참사관은 종업원이 계산서를 가져오자 자기 수표책을 꺼내 사인을 해서 종업원에게 주었다. 그러자 종업원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한국 대사관 미스터 박의 수표는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왜요?"
-"한국대사관의 통썬 팍(박동선)이 여러 차례 부도를 냈습니다. 당신도 역시 팍 아닙니까?"
"통썬 팍이요? 그래, 그가 대체
얼마짜리 수표를 부도냈습니까?"
종업원이 카운터에 가서 부도수표 한 묶음을 챙겨 와 보여주며 말했다.
-"보십시오. 15불짜리도 있고 30불짜리도 있고 여러
가집니다."
국무성 한국과장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박 참사관은 씨근덕거리며 김정렬 대사에게 그 사건을 보고했다.
"저 오늘 한국과장 앞에서 창피 톡톡히 당했습니다. 노상 우리 대사관에 출입하는 박동선이는 대사님이 초청장 내셨습니까?"
-"그런 일 없는데?"
이래서 박동선은 물론 김한조처럼 초청장도 없이 수시로 대사관에 드나들며 그 사실을 여기저기 과시하고 다니던 교포들에 대해 대사관 출입 금지령이 내리게 됐던 것이다.
이처럼 주미대사관 주변을 맴돌며 '로비스트'가 되고 싶어 안달하던 박동선을 사교계에 데뷔시킨 사람은 동양인 로비스트로 유명하던 안나 셰놀트(중국명 진향미)다. 그녀는 중국 출신으로서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에 대륙에서 한 영자신문사 기자를 하다가 장개석의 미국인 공군 군사고문이었던 셰놀트 장군과 결혼했다. 셰놀트 장군은 장개석 패망 후 미국으로 돌아와 대만을 기착지로 해서 미국을 왕래하는 화물 수송 비행기 회사 '프라잉 타이나'를 운영했다. 안나 셰놀트는 남편이 죽은 후 '프라잉 타이나'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녀는 자신의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대만과 장개석 정권을 위해 대비 로비를 했다. 그런데 여성들의 환심을 사는 재주가 있던 박동선이 이 여성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안나 셰놀트가 자신과 친분이 있던 상.하원 의원들을 박동선에게 연결해 주면서 박동선이 워싱턴 근교에 차린 조지타운클럽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조지타운클럽은 박동선이 김형욱의 위세를 등에 업고 한국의 외환은행으로부터 대부받은 돈으로 설립한 사교클럽이었다.
박동선이 이용한 여성은 셰놀트만이 아니었다. 덴티 디카슨이란 미국 여성은 박동선에게 빌려 준 돈을 받으러 서울에 왔다가 돈은커녕 세종호텔에서 구타까지 당했다. 그녀는 [워싱턴 포스트]의 맥신 체셔 기자에게 호소해 그 사실을 낱낱이 폭로했다. 또 박동선의 회사에서 부하직원으로 일했던 가토 미츠미라는 일본 여성은 박동선을 상대로 5천만 엔 반환 소송과 자신이 낳은 아들에 대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조지타운클럽은 회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체제로 운영됐다. 가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클럽 벽에 박수근을 비롯해 한국 유수의 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고 곳곳에 한국 골동품으로 장식돼 있는 등 서양인들이 동양적인 분위기에 매료될 만하게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코리아게이트가 시작되고 박동선이 탈세 혐의 등으로 자기 집까지 차압당할 무렵, 워싱턴에는 박동선에게 그림 값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박동선이 그림을 미국에 가지고 가서 팔아 준다고 해서 줬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그림 값 한 푼 받지 못했고 그림조차 찾을 길이 없다"며 발을 굴렀다. 당시 박동선이 국세청에 추징당한 금액은 4백50만 불에 달했다. 박동선이 그것을 갚지 못했기 때문에 그 그림들은 지금도 국세청에 압류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사교란이 세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이브닝 스타]라는 신문 사교란에 "박동선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라는 기사가 실린 일이 있다. 물론 이 신문 보도 전에는 조지타운클럽을 중심으로 이 같은 소문은 이미 무성하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70년대 중반 박동선의 미 의회 의원 매수공작이 소문나서 그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윤승국 공사를 통해 박동선이 나에게 연락해 온 일이 있었다. 가 보니 박동선과 윤승국이 나와 있었다. 듣던 대로 그는 유들유들했다.
-"문 여사님. 다른 미국 언론은 제가 다 통제할 수 있는데 문 여사님만은 잘 안 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뵙자고 했습니다.
저 좀 잘 봐 주십시오."
"당신, 왜 사기를 치고 다니나. 당신은 박정희의 조카가 아니잖아?"
그러자 박은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변명을 했다.
"저는 그렇게 얘기한 일이 없는데 기자들이 풍문을 듣고 쓴 것
같습니다."
"이것 봐. 거짓말도 사람을 가려 가면서 해야지. 내가 워싱턴에서 기자 생활한 지가 15년이야. [이브닝 스타]의 기자들이 소문 듣고 기사 쓰는 사람들이 아니야. 당신 입으로 말 안했으면 그런 기사가 나올 수가 없어. 그리고 루이지애나에 가서는 왜 한국 대사라고 하면서 사기 행각을 벌이나? 그러면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그에게 "나에게 잘 봐 달라고 하려면 쌀 커미션 얼마나 먹었고 어디에 썼는지 털어 놓으라" 고 했다. 물로 그 대답은 없었다.
이날 만나 보니 박동선은 머리도 좋고 성격이 유들유들해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앞치마를 두르고 남의 집 부엌에서 설거지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마도 정상적인 루트로 미국 사회에서 사업가로 데뷔했어도 성공했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박동선은 정상적인 루트가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길'을 택했다. 박동선이 조지타운클럽에서 안나 셰놀트가 소개해 준 워싱턴 정가 인물들에게 최고급 양주와 요리를 마음껏 제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있었다. 박동선이 김형욱과 처음 연결 된 것은 66년. 그를 김형욱에게 소개한 것은 정일권이었다.
5.16 직후 주미대사직에 앉은 정일권의 지상목표는 박정희 쿠데타에 대한미국의 신임을 얻어 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일권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정일권 역시 성격이 모나지 않고 유들유들해서 어떤 사람과 만나도 매끈하게 처신하는 타입이다. 그는 한국 특파원들과 어울려 밤새 포커 게임을 하며 언론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주미대사관 근처를 맴돌던 박동선이 정일권에게 접근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박동선은 타고난 사교술로 정일권이 포커판에 끼어들기도 하고 때때로 볼티모어 흑인 동네의 창녀촌으로 '모시고' 가기도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68년 리처드 한나 하원의원과 함께 서울에 간 박동선은 기왕에 쌓은 친분을 기화로 총리 정일권과 중정부장 김형욱을 만나 한.미간의 PL480에 따른 한국의 미국 쌀 수입업에서 독점적 중개인 자리를 따냈다. 박동선은 드디어 돈과 권력에 대한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룬 것이었다. 이로써 돈방석에 앉은 것은 박동선만이 아니었다.
박동선은 자신을 김형욱에게 소개한 정일권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는 쌀 수입 커미션의 일부를 정일권에게 꼬박꼬박 상납했다. 사실 나는 1969년 경향신문 특파원 시절 김형욱의 비호로 박동선이 미국 쌀 수입 독점권을 따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착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조사해서 서울 본사에 기사를 송고 했었다. 그러나 그 기사는 본사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 경향신문 외신부장에게 들으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압력으로 싣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유신체제 수립 후 정일권이 멕시코에 가면서 샌프란시스코에 들른 일이 있었다. 그 때 그가 무려 현금 5만 달러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돈은 박동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했다. 박동선은 정일권이 여행에 나서면 꼬박꼬박 경비를 갖다 주곤 했던 것이다.
70년 말부터 72년 3월까지 박동선이 쌀 수입 중개인 자리를 잃은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박동선과 정일권의 유착 때문으로 보인다. 즉,
정일권이 박동선으로부터 받은 커미션을 관례대로 공화당에 넘겨주지 않고 그 중 수십만 달러를 자신이 챙겼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박동선에게 돈을 상납받은 고위 인사는 정일권만이 아니었다. 미국 대사관은 73년 김형욱이 박동선에게 받은 쌀 수입 커미션 중 50만 달러를 가지고 한국을 탈출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9백20만 불 커미션 중 대미 로비에 쓴 것은 75만 불 뿐
박동선이 '대미 로비스트'로 활동한 기간 동안 한국은 필요하지도 않은 쌀을 미국으로부터 대량 수입해야 했다. 이것은 미국의 쌀 생산지대 출신 상.하원 의원들의 강요 때문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루이지애나 출신의 오토 패스만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상원 세출위원회 산하 대외활동소위원회 의장의 지위를 이용해 한국에 쌀 수입을 강요했다. 물론 이 문제에서 박동선은 항상 패스만에게 협력했다. 패스만은 대한 군사원조비를 중지시킬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그의 요구를 항상 들어 주곤 했다.
72년 3월 박동선은 다시 쌀 수입 중개인 자격을 얻었다. 그의 후견인 정일권이 박정희의 신임을 다시 얻었고, 박동선은 박동선대로 자신이 매수한 몇몇 미국 국회의원들을 동원해 박정희에게 아첨하는 편지를 보낸 덕분이었다. 게다가 71년 대통령 선거의 후유증으로 자금이 부족했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박동선을 중개인으로 복직시키는 데 영향력을 발휘한 후 그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72년 이후락의 요구에 따라 대한농산 사장은 박동선이 이용할 수 있도록 워싱턴 은행에 구좌를 만들었다. 이 구좌를 통해 박동선이 받은 커미션 중 1백 70만 달러에서 2백만 달러가 한국 중정으로 흘러들어갔다.
박동선이 미국 쌀 수입 독점권을 얻은 것은 쌀 수입에서 떨어지는 커미션으로 대미 로비를 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 프레이저위원회에 따르면, 박은 69년 이후 8년 동안 한국의 쌀 수입 중개상을 하면서 미국의 쌀장사들로부터 9백 20만여 달러 상당의 커미션을 받았다. 문제는 박이 이 돈 중 과연 얼마를 소위 '애국사업' 즉 대미 로비에 사용했는가 이다. 미국 법무성과 의회의 조사 결과, 박이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제공한 것으로 드러난 액수는 위 커미션의 8% 쯤에 불과한 75만 달러 정도였다.
이 같은 박정희 . 박동선의 부도덕한 대미 로비로 인해 한국 국민이 입은 피해는 미국의 형편없는 3등급 쌀을 비싼 값에 사먹어야 했던 것만이 아니다. 박동선은 캘리포니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텍사스, 아칸소 등 쌀을 팔아야만 정치생명이 유지되는 쌀 생산 주 출신 의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국 정부가 쌀뿐 아니라 그들의 출신주에서 생산되는 다른 농작물들까지 사들이도록 했다. 그로 인해 한국 농민들이 입은 피해상이 어떠했는지는 오늘의 한국 농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스 패스만 하원 세출위원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조선호텔에서 리셉션이 있었다. 마침 서울에 와 있던 나도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잠시 로비로 나갔다가 우연히 패스만이 루이지애나에 전화하는 내용을 듣게 됐다. 패스만은 아주 기분이 좋아서 떠들고 있었다.
"나 패스만이요. 우리 얌(고구마와 비슷한 작물)을 한국에서 사주기로 했습니다. 방금 이문제를 매듭지었습니다. 하하하.."
나는 기가 막혔다.
잠시 후 남덕우 장관이 보이기에 그에게 따졌다.
"아니 남 장관님. 한국에 고구마가 없어요? 뭣 때문에 루이지애나 얌을 한국에서 사 줍니까?"
게다가 박 정권은 미국 국회의원들이 이런저런 일로 한국을 방문하면 한국 매춘여성들을 대 주기 일쑤였다. 더구나 그들은 유엔외교를 위해서라면 미국 국회의원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각종 인종들을 한국에 불러들여 이런 짓을 했다. 나는 조선호텔의 한 종업원으로부터 미국 국회의원과 동침하던 한 한국 여자가 한밤중에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하고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복도로 뛰쳐나왔다는 소리까지 들은 일이 있다.
박동선은 코리아게이트 조사를 위한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왔을 때 나와 부딪치자. "같은 한국 사람끼리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증언에 나선 그는 시종일관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면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한국이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는 논리로 자신의 사기 행각을 변명하고 오히려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려 했다. 과연 그는 영웅인가.
77년 하원 윤리위원회에서 박동선이 했던 증언이 기억난다.
"로이벨 의원(캘리포니아, 민주당)에게 1천 불을 주었다. 내가 주고 싶어 준것이 아니라 패스만 의원이 주라 해서 로이벨이 그의 방에 왔을 때 현금으로 줬다."
미국 쌀 수입 커미션으로 무려 9백 20여만 불을 중간에서 가로챈 주제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참으로 오만불손한 태도였다. 취재하던 미국 기자들은 "기껏 1천 불 받은 현직 국회의원은 위증죄로 처벌을 받게 되고 무려 9백만 불을 중간에서 뜯어먹어 한국민 전체에게 비싼 쌀을 먹게 한 박동선은 미국과 한국에서 영웅같이 행세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고 했다.
그런데 더욱 한심했던 것은 이 사건을 취재하던 한국 언론 주미 특파원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프레이저위원회의 자워스키 수석 조사관이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 때의 영웅심으로 세칭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는 식의 사실과 전혀 다른 보도로 일관해 박동선 사건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인식을 그르쳐 놓았다.
73년 6월 주미대사관 공보관장 이재현 씨가 미국에 정치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그는 앵무새처럼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자신의 역할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MBC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했는데 이재현 공보관장과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우리 부부는 이재현을 사석에서 만나게 되면 "이것 봐요, 당신은 언제까지 유신체제 선전부장 노릇을 해먹을 거요?" 하고 다그치곤 했다.
그러던 중 이재현 씨의 차석으로 일하던 부하 직원 한혁훈이 아무런 보직도 없이 귀국 명령을 받는 일이 생겼다. 한 씨는 뭔가 잘못 돼 가는 걸 느꼈던지 사표를 내고 귀국을 거부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로부터 이 관장에게 "한혁훈에게 간첩 혐의라도 씌워 미국 정부에 통보하고 강제 송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한국 정부가 그렇게 나온 것은 민간인에게는 현지법이 적용되지만 외교관에게는 본국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관장은 "그렇게는 못 하겠다"며 한 주일 정도 본국과 실랑이를 벌였다. 그런데 하루는 주미대사관에 나와 있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갑자기 이 관장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완전히 범인 취조하듯 조서를 작성했다. 직감적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재현 씨는 필자에게 자신의 거취 문제를 상의해 왔다. 우리 부부는 그에게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유했다.
며칠 지나서 그가 최종 결심을 굳히자 우리 부부는 '이재현 가족 망명 007 작전'을 벌였다. 일체의 짐은 아파트에 그대로 놔 둔 채 가족들만 입은 옷 그대로 한 사람씩 우리 집으로 옮겨 오게 했다. 어차피 빌린 아파트이므로 미국 정부의 망명 허가를 받은 후 경찰의 보호 하에 짐을 챙기면 되었다. 그 날 밤 이재현 가족을 경호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워싱턴에 유학 와 있던 나의 조카까지 불러다 놓았다.
외교관 번호판이 붙어 있는 그의 폭스바겐을 어디에 숨기느냐도 문제였다. 생각 끝에 당시에 닉슨의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던 이웃의 미국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이 차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해서 미국에 망명하려는 한국 외교관의 차다.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추적당할 우려가 있으니 너희 집 차고에 좀 숨겨다오"
그는 어느 정도 한국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밤 새벽 2시경 조카가 달려왔다.
"집에 웬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정원 뒤로 돌아갔습니다."
유리창으로 내다보니 미국인 한 사람과 한국인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우리 집 정원에 서 있는 자동차 넘버를 전등을 비춰 확인하고 있었다. 이재현 씨의 차를 찾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우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수색했을 때 그들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미리 계획했던 대로 [워싱턴 포스트]에는 "유신체제에 반대해 미국에 정치망명한다"는 이재현 씨 인터뷰 기사가 대문짝하게 실렸다. 이 신문을 이재현 씨에게 갖다 준 후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한국대사관으로 갔다. 대사관에는 김동조 대사 이하 대사관원들과 기자들이 모여 앉아 '이재현의 행방'에 대해 설왕설래 하고 있었다. 김동조 대사는 완전히 탈진한 듯한 기색이었다.
한 기자가 김동조 대사에게 물었다.
"대사님, 그 사람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볼티모어에 있는 제 꼬붕 집에나 갔겠지."
'볼티모어에 있는 제 꼬붕'이란 이재현 씨 서 공보관 차석으로 일하다가 갑작스런 귀국 명령을 거부하고 미국에 눌러 앉은 한혁훈 씨를 가리킨다. 대사관원 중 한 사람은 이런 소리까지 했다.
"이북의 사주를 받아 간 것이 아닐까요?"
답답해진 김동조 대사가 탁자 위에 있던 [워싱턴 포스트]를 집어 던지며 버럭 짜증을
냈다.
"아니 어제 회의 때까지도 '미국 언론의 유신 비판 보도는 모두 내가 막겠다'던 사람이 '일당독재인 유신체제에 봉사하는 것은 더 이상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니, 이 사람 이거 좀 돈 것 아니오?"
김동조는 황호을 정무담당 공사를 불렀다. 무슨 까닭인지 김동조는 평소에 그를 상당히 미워했다.
"당신은 이런 낌새를 전혀
몰랐소?"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황 공사, 국무성에 가서 얘기하시오. 그 사람. 어제까지도 유신체제 수호를 위해 미국 언론도 막고 미국 기자단 기생관광까지 보내겠다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한 걸 보니 아무래도 정신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이오!"
황 공사는 김동조 앞에서는 "예" .. "예" 하고 있었지만 국무성에 가서 실제로 그렇게 얘기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재현 씨 가족은 미국 망명 절차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필자의 집에서 기거했다.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들 일가는 망명이 완전 공식화한 후 경찰의 보호 하에 자기 집에 돌아가 짐을 챙겨 웨스턴 일리노이로 이주했다. 이재현 씨는 그 후 일리노이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 과정에서 그도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와 증언을 했다. 전직 주미대사관 공보관장의 증언이고 보면 박 정권으로서는 빼도 박도 못 할 뼈아픈 내용일 것은 자명했다. 그 때문에 박 정권은 이 씨의 청문회 증언 때 김경원 대통령 국제정치담당특보를 파견해 증언을 청취했다. 이재현 씨의 증언 내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김동조 대사가 직접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현금 봉투를 돌렸습니다. 그가 1백 불짜리 지폐를 1만 불 내지 2만 불씩 봉투에 넣어 가방에 담아 상원 혹은 하원으로 가곤 했는데, 나는 그 봉투의 두께를 보고서 안에 든 액수를 짐작하곤 했습니다.
이재현 씨는 김동조 대사에게 들은 수뢰 의원들의 이름까지 공개했다. 지목된 의원들 중 어떤 이는 돈 받은 사실 자체를 부인했고, 어떤 이는 돈봉투인줄 모르고 받았다가 돌려주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김동조 전 주미대사를 소환해서 조사하려는 미국 측과 이를 피하려는 한국 정부 사이에 일대 외교전이 벌어졌다. 미국 측으로서는 현직 대사가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뿌렸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재현 씨는 공보관장 시절 자신이 미국 학계와 언론계를 상대로 벌였던 공장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미국 언론의 반유신 기사를 막고 친유신 기사가 실리게 하기 위해 미국 기자들에게 접근해 서울 방문을 권유했습니다. 그렇게 모집한 기자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고급 양복점에 데리고 가서 양복을 맞춰주고 기생관광도 시켜 주었습니다."
한국에 갔다 온 한 미국 기자가 양복 상의의 '서울 테일러'라는 상표를 보여주며 옷자랑하던 일을 나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재현 씨는 프레이저청문회 증언 전날 밤 강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에 관한 부분을 밝힐 것인가를 놓고 하룻밤 내내 고민했다. 그와의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사실 강영훈 씨는 5.16쿠데타 이후 미국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 온 사람이었다. 그의 부인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독한 파마약 때문에 손이 다 헐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선배님, 손 잡고 일합시다" 하는 박정희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그 같은 생활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70년대 초반 한국에 가서 10만 불을 받아 와 메릴랜드 스프링필드에 한국문제연구소라는 사무실을 차려 놓고 미국 언론계와 학계에 돈봉투를 뿌렸다. 유신을 지지하는 친한파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였다. 한국대사관에서 이 일을 뒷받침했던 사람이 바로 공보관장 이재현 이었던 것이다. 이 일로 강영훈은 의회 청문회로부터 소피나(강제소환장)를 받았다. 그는 그를 구인하려는 FBI의 추적을 피해 손가방 하나만 들고 한국으로 도망쳤다.
"5부 미국 최악의 뇌물 스캔들 코리아게이트와 김형욱의 최후
제 1장 김형욱은 서울 근교 폐차장에서 살해됐다.
김 부장, 양심선언 하시오."
73년 4월 15일 대만대학에 박사 학위를 받으러 간다며 한국을 빠져 나온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며칠 후 미국에 나타났다. 영락없는 도망길이었다. 그의 처자는 미리 미국에 와 있었다.
5.16쿠데타 주동 인물 중 하나였던 김형욱은 그 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63년 5월 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김형욱은 박정희를 위해 그의 별명처럼 '곰' 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한편,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치부했다.
이런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유는 자명했다. 수십 년간 충성을 바쳐 온 수하들을 하루아침에 내치고 잡아넣는 박정희란 인물의 냉혹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계자 자리를 노렸다는 이유로 명실상부한 혁명 2인자이자 사적으로는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내치고, 오치성 사건을 빌미로 자신의 충실한 비자금 조달책이었던 김성곤을 중앙정보부에 잡아가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역시 '박정희 이후'를 넘봤다는 이유로 군부 내 최측근으로 일컬어지던 윤필용을 하루아침에 독직사건을 뒤집어 씌워 감옥에 보내 버린 박정희가 아니었던가. 69년 김종필. 김성곤 일파의 협공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밀려난 후 호시탐탐 권좌 복귀와 '이북파'의 집권을 노려 온 김형욱에게 박정희의 칼끝이 언제 겨누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황해도 신천 출신인 김형욱은 기묘한 '친북파'다. 그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영남세력의 뒤를 이어 정일권을 수반으로 한 이북 출신들이 반드시 집권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김형욱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 신분으로 남미를 방문하고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 74년 4월경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백악관 뒷문(사우스 웨스트 게이트)으로 나오다가 뜻밖에도 김형욱과 마주쳤다. 김형욱은 비서와 함께 백악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니 김 부장, 언제 오셨나요?"
-"아, 안녕하셨소? 중남미를 돌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렀소."
나는 그 후 김형욱이 자기 말대로 한국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후 엉뚱하게도 김형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때는 이미 김형욱의 한국 탈출 사건이 소문났을 때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아니 서울 가신 줄 알았는데요?"
-"사실 나 한국에서 빠져 나왔소. 이후락이 계속 내 신변을 압박하더니 나를 잡아 죽이려고 해
미국으로 온 거요."
중정부장을 7년씩이나 한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갔다간 자신이 어떻게 당하게 될지 가장 잘 알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족들은요?"
-"가족들부터 한 사람씩 여행 가는 것처럼 해서 빠져 나온 후 제일 마지막으로 내가 나왔소."
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 김형욱은 때때로 우리 집 또는 사무실에 곧잘 전화를 걸어와 여러 가지를 묻곤 했다..
-"요사이 워싱턴 분위기는 어때요?"
또는 다른 기자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나에게 확인하기도 했다.
-"이웅희 특파원([동아일보])에 따르면 국무성에서 여차저차 했다던데 사실입니까?"
그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나는 5.16 이후 줄곧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자였고, 그는 박정희 체제를 버텨온 핵심인물 중의 하나가 아닌가. 김형욱과 나는 결코 호의적으로 대화를 나눌 만 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김형욱은 나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마치 자신이 박정희 체제에 반대해 정치망명한 민주인사인 양 행세했다. 물론 그것은 나로부터 정보를 빼내기 위한 술수였다.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했기 때문에 정보부장 자리에서 밀려났소. 나 대신 정보부장이 된 이후락이 내가 호신용으로 소유했던 권총마저 뺏어가는 바람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한국을 탈출한 거요."
그의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지만 나로서도 그가 가진 정보가 궁금해 전화가 오면 응대를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국무성의 입장과 미 의회의 분위기, 그리고 일본 언론들의 납치사건 관련 보도들을 그에게 알려주곤 했다.
김형욱이 두 번째로 전화했을 때부터는 수화기에 녹음기를 붙여놓고 통화했다. 그렇게 녹음한 테이프가 수십 개나 된다.
당시 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를 캐내기 위해 여러모로 조사 중이었다. 김형욱에게서 전화가 올 때마다 내가 조사한 김대중 납치사건 주범과 행동대원들의 인적사항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나 김형욱의 반응은 항상 비슷했다.
- "어? 문 여사의 정보망도 대단한데요? 000이가 개입된 걸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걔도 내가 부장할 때 채용한 애요."
흔히
김형욱을 '멧돼지'라고 한다. 저돌적이라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상대해 본 김형욱은 결코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두뇌회전이 빨랐고 인성은 교활했다.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에 대한 질문을 적당히 따돌리면서 말을 이어가다가 내게서 들을 만큼 얘기를 들었다 싶으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곤 했다.
73년 11월 8일 필자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후 김형욱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문 여사, 용감한 결심을 존경합니다.
우리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입니다."
"아니 김 부장, 동지는 무슨 동지란 말입니까. 김 부장은 아직까지 자신의 소신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밝히지도 않았잖습니까."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장이 나에게 동지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어쨌든 위로 전화 감사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김형욱은 나의 망명 선언 후 부쩍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김대중 납치범 명단은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때가 되면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제 할 말만 하고 자기 전화번호는 가르쳐 주지 않던 김형욱이 74년 봄 워싱턴에 나타났다. 그는 이 아무라는 보좌관을 데리고 필자의 집을 방문했다. 알고 보니 옛날 중정 부장 시절의 CIA 카운터파트를 만나 영주권 문제를 빨리 해결해 달라고 진정하러 워싱턴에 온 것이었다.
나는 당시 구하기 힘들던 두부까지 사다가 된장국을 끓여 저녁을 대접했다. 김형욱은 자신이 유신체제에 항거해 망명한 투사라도 되는 양 기염을 토했다.
그는 또 "각하에게 가장 충성한 것은 바로 나"라며 "3선개헌도 내가 다했다. 그런데 중정부장직에서 해임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는 김종필, 이후락과는 철천지원수가 된 듯했다. "나는 깨끗하지만 김종필, 이후락은 철저히 썩었다"는 것이다. "김종필이를 두 번 쫒아 낸 것도 내가 각하에게 '김종필이 가지고는 안 된다'고 진언해 성사 시킨 일"이라고 했다.
이처럼 박정희 주변 인물들의 온갖 비리를 주워섬기던 그는 정인숙 사건에 이르러서는 "각하는 물론이고 온갖 놈들이, 심지어 내 비서실장까지 걔를 건드렸는데 나만 까맣게 몰랐다"고 애통해하여 듣고 있던 우리 부부를 아연실색케 했다.
김형욱은 계속해서 떠벌였다.
-"우리 이북파들은 모두 애국자입니다. 정 총리(정일권)와 백 의장(백두진)을 추천한 것도 바로 나요. 앞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돼야 할 분은 정 총리밖에 없어요."
이북파가 애국자라는 바람에 내가 한마디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군 부패의 최고 책임자가 정일권 아닌가요? 강문봉이는 그 하수인이고. 그들이 하지를 털어먹더니 자유당 때는 국방부 출입기자 방우영과 짜고 쌀이니 배추니 하는 군대 물자는 물론이고 미국에서 들어온 레이션 박스까지 화차로 빼내 암시장에 팔아먹은 것이 바로 그들 아닙니까?"
-"그래 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 물건들이오. 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에다 6.25 때는 국가를 위해 생명을 걸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는 '김대중 납치범'에 대한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문 기자, 김대중 납치사건 내막도 내가 다 알고 있으니 때가 되면 문 기자가 세계적인 특종을 하게 해 주겠소."
중앙정보부장 시절의 측근들이 여전히 중정 구석구석에 박혀 있을 테니 그 말도 과장은 아닐 것이었다.
그런데 김형욱은 중언부언 하는 중에서도 결코 박정희를 직접 겨냥해 비판하지 않았다. 그것은 계산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간 내심 '김형욱을 만나면 반드시 확인하리라'고 마음먹었던 얘기를 단도직입적으로 꺼냈다.
"김 부장, 국무성 소식통에 의하면 김 부장은 2천만 달러나 되는 돈을 미국에 갖다 놨다고 합디다. 이제 김 부장이 유신에 반대해 미국에 왔다니 하는 말인데 그간 박정희 체제를 세우고 지탱해 온 것이 김형욱. 이후락이란 것은 천하가 다 압니다. 김부장이 진정으로 박정권이 잘못된 체제라고 생각한다면 박정희가 얼마, 이후락이 얼마, 김형욱이 얼마를 부정축재 했다고 양심선언 하시고 그게 다 한국 국민의 돈 아닙니까?"
김형욱은 펄쩍 뛰었다.
-"2천만 달러는 무슨 2천만 달러요?"
그러면서도 그는 노회한 술수를 잊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고 박 정권이 넘어가려 할 때쯤 모든 것을 밝히겠소. 내가 한 방만 때리면 박 정권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그 때까지 김형욱의 말을 꾹 참고 듣고 있던 남편은 이 말을 듣고는 인내심이 바닥난 듯 냅다 쏘아붙여 버렸다.
"김 부장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요."
김형욱이 돌아가고 난 뒤 한밤중에 뜻밖에도 이 보좌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기자님, 조금 전에 뉴저지에 도착했습니다. 부장님 모셔다 드리고 저희 집에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아 그러세요.
수고하셨네요."
-"문 기자님, 전부터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오늘 처음 뵙고 말씀을 들어 보니 과연 듣던 대로입니다.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부장님이 이런 처지로 미국에 와 있지만 여전히 돈 있고 박 정권과도 선이 닿아 있으니까 주변에는 온통 '부장님' '부장님' 하면서 돈이라도 얻어써 볼까 하는 사람들뿐입니다. 문 기자님처럼 부장님께 맞대놓고 양심선언 하라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그는 나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한 것 같았다. 내심 '이런 사람이 왜 김형욱을 따라다니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미스터 리는 어쩌다 미국까지 김 부장을 따라왔어요?"
-"중앙정보부에 근무할 때 김 부장님과 맺은 인연 때문입니다. 제
아내를 소개해 주신 이가 바로 부장님입니다. 제가 베트남에 파견됐을 때 김 부장님 주선으로 베트남 고위장성 딸과 결혼 했거든요. 업무상 이점이 많으니까 그렇게 주선하신 거지만요. 그 뒤에 제가 공부가 하고 싶어서 스위스에 보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부장님이 그걸 들어 주셔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부장님 미국 오실 때 과거 부하들이 아무도 안 따라가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한테 전화하셨는데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따라온 겁니다."
애당초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김형욱이 나의 집을 방문한 날 나는 그의 본심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김형욱은 미국에서 박정희 정권과 재미 민주화 운동세력에 양다리를 걸치려고 했다. 아니 박정권과의 거래를 위해 재미 민주화 운동세력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75년 12월 초순, 나는 유엔총회 취재차 뉴욕에 갔다. 취재를 마치고 김형욱의 집에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기어이 받아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음날 유엔본부 앞에 있는 로저 스미스 호텔의 한 식당에서 아침식사 약속이 되었다. 그 곳은 한국기자들이 유엔 취재 때 잘 이용하는 호텔이다.
다음날 김형욱과 만났을 때 그를 닦달했다.
"김 부장, 나에게 약속한 김대중 납치범 명단은 언제 줄 겁니까?" 벌써 2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여러 명의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나에게 주려고 미리 준비한 듯했다. 그는 재촉했다.
"빨리 보고 가방에 넣으시오."
나는 김형욱이 그러거나 말거나 탁자 위의 범인 명단을 펼처놓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박정희
이후락
김치열
이철희
양두원
윤진원
윤영로
김기철
김동운
명단을 다 읽고 난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 화가 치밀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나 차장 김치열, 국장 양두원 그 이하
중정요원들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모자들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나 역시 오래 전에 이미 그들의 이름을 폭로했었다. 그래도 '김형욱이 자필로 쓴 납치범 명단'이라는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김기철'은 '김기완'의 오기인 듯 했다.
"아니 김 부장, 김기철이 아니라 김기완 아니요? 김기철은 그의 형으로 야당 국회의원일 텐데?"
-"아 참, 그렇지."
김형욱은
'김기철'에 두 줄을 긋더니 그 위에 '김기완'이라 고쳐 적었다.
쓰기를 마친 김형욱은 '박정희'란 이름 옆에다 '?'를 하나 그려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PP(박정희 약칭)까지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좀 불확실한데?"
-그가 하는 짓을 보니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에게
따졌다.
"아니 김 부장, 이게 세계적인 특종이오? 이건 신문에 다 난 이름들 아닙니까?"
그 명단을 주면서 김형욱은 절대로 출처를 밝히지 말라고 누누이 부탁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문을 나서는데 마침 한 떼의 한국 사람들이 지나갔다. KBS의 김도진, [중앙일보]의 김여희, 그리고 [서울신문]의 임동수 등 한국 특파원들이었다. 나는 김형욱에게 말해 주었다.
"저 사람들 한국 특파원들이에요."
순간 김형욱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야단났는데... 내가 문 여사를 만나고
있다고 당장 소문이 확 퍼지겠구나."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반한인사 문명자'와 만나는 것을 한국기자들이 봤으니 틀림없이 서울에 말이 들어갈 것이고 그러니 큰일 났다는 뜻이었다. 박정희와 반독재인사 쪽을 향한 김형욱의 더블 플레이가 그만 한국 기자들의 정면에서 드러나 버린 것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짐짓 물었다.
"뭐 그리 큰일입니까?"
-"문 여사와 만나는 사람들은 한국 중앙정보부측이 모조리 체크하고 있습니다. 지금 박 정권이 가장 무서워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문 여사란 말이오. 지난번에 박종규(전 경호실장)가 여기 왔다 갔어요. 나보고 절대로 문명자를 만나지 말라고 합디다. 그런데 저자들에게 들켰으니..."
"원 참, 별소리 다 듣겠네.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답디까? 왜 무서워 한대요?"
-"몸조심하세요. 박 정권이 돈으로 흑인을 사서 문 여사를 죽이려 하고 있답니다. 내 정보는 틀림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총총히 호텔을 나갔다.
나는 김형욱으로부터 받은 '납치범 명단'을 약속대로 1년 2개월 동안 일체 공개하지
않았다.
김형욱은 그 후에도 종종 연락해 왔다. '유신독재'에 반대했기 때문에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도망 왔다는 사람이 한국에서 날아온 현직 고위관리들과 어울려 골프를 쳤느니 낚시를 함께 했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나더러 멕시코나 브라질에 대사로 가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는 소리까지 했다.
김형욱은 김대중 납치사건 주범 중 하나인 주일 중앙정보부 공사 김기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기완이는 미국에 온 직후 불만이 많았소. 원래 납치사건을 마무리 지으면 상당한 댓가를 받게 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사건이 시끄럽게 되자 가담자들을 헌신짝같이 취급하고 약속했던 보수도 주지 않았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알려 줬지요. '이거 봐. 그럴 게 아니라 당장 중정 본부에다 대고 돈 10만 불 내놓지 않으면 납치사건 전모를 폭로한다고 협박하라구. 그러면 제놈들이 당장 현찰 가지고 날아와 살려 달라고 할테니까.'"
김기완은 김형욱의 지시대로 따랐다. 과연 이틀 만에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가 브리프 케이스에 1백 불짜리를 가득 넣어 가지고 로스엔젤레스로 날아와 김기완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 후 김기완은 중앙정보부와 다시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77년 2월 초순 죄없는 김대중 씨가 머리를 빡빡 깍인 체 푸른색 죄수복을 입고 진주형무소로 이송되는 장면을 신문에서 보고 나는 이제야말로 문제의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공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내가 조사한 내용과 김형욱이 제공한 '납치범 명단'을 일본 교토 통신을 통해 발표했다. 이 기사는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등 일본의 주요 중앙지는 물론 각 지방지에까지 대대적으로 전개 되었다. 한국 정부가 발칵 뒤집히면서 그간 양다리를 걸치고 이모저모로 재미를 보고 있던 김형욱의 입장이 난처해졌슴은 물론이다.
한국정부 관리들은 물론 특파원들로부터 빗발치는 문의전화를 받은 김형욱은 뻔뻔스럽게도 "내가 미쳤다고 문명자에게 그런 것을 써줘? 문명자가 날조한 것"이라고 발뺌했다.
이에 나는 김형욱이 준 명단 원본을 AP통신을 통해 사진으로 공개했다. 이는 다시 대대적으로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 김형욱의 자필을 확인한 한국 관리들은 이 때부터 입을 다물었다.
김형욱은 프레이저위원회 조사관들에게서 이 쪽지의 자필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문명자는 미쳤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는 4개월 후 미국 의회 청문회 증언대에서 이 쪽지를 써 준 사실을 인정했다. 미 정부 수사당국이 미국을 방문한 한국관리들에게 "김형욱의 필적이 틀림없다"는 것을 이미 확인하고 추궁했기 때문이다.
77년 6월 22일 김형욱은 미 하원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그가 청문회에 나온 이유도 결국 박 정권과의 거래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박정희를 협박하려는 것이었다. 이 무렵 모든 악행은 다른 사람의 책임이고 마치 자신은 영웅인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이른바 '김형욱 회고록'이란 것을 그가 준비하기 시작한 것도 다 같은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청문회가 열리기 며칠 전쯤 김형욱의 아내 신영순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기자님, 우리 주인이 워싱턴에 갔는데 도대체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없네요. 혹시 문 기자님께 연락이 없으셨는지요?"
"없었는데요."
-"한국에서 민 장관이 오셔서 꼭 연락을 해야 하는데..."
당시 박 정권은 김형욱의 청문회 증언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김형욱의 청문회 출두를 만류하기 위해 사람을 그의 집에 보낸 것 같았다. 그러나 나 역시 그의 소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청문회를 앞두고 외부와 연락을 끊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청문회 전날 김형욱에게 전화가 왔다. 자신이 버지니아에 있는 '홀리데이 인'이라는 모텔에 있는데 좀 오라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가 그 곳에 가 보니 괌에 산다는 박 교수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우리 부부와 김형욱, 박 교수 이렇게 네 사람이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김형욱이 청문회에서 읽을 성명서를 보여 주기에 읽어 보니 비양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5.16 이후 박 정권에 참여한 12년 동안 자신은 비리라고는 저지른 일이 없고 모든 잘못은 이후락, 김종필 등에게 있다는 식이었다. "나는 부정축재한 적도 없고 민주인사 고문한 정고 없고 비록 중앙정보부장이었지만 학생들이 데모할 때는 속으로 공감했다"는 뻔뻔한 내용도 있었다. 심지어 김대중 납치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김대중 씨가 해외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한국정부의 왜곡 선전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김 부장, 사실대로 증언해야 합니다. 이 미국땅에도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증인들이 다 살아 있습니다. 김대중 씨가 망명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얘기만 해도 그건 박 정권의 새빨간 모략이에요. 73년 그가 납치당하기 전에 워싱턴에서 한민통을 결성할 때 워싱턴 교포인 최석남 장군이 망명정부 수립을 제안했는데 김대중 씨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극구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성명서에 돈 문제가 전혀 안 나왔는데 의원들이 반드시 '당신 수입원이 뭐냐, 어떻게 생활 하는가'라고 물을 테니 사실대로 밝혀야 할겁니다."
-"나는 돈 가진 것 없어요. 수입원도 없고."
"그럼 김 부장한테 돈 줬다는 증인이 나서면 어떡할 거요?"
-"나한테 돈 갖다 줬다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지."
더 얘기할 것도 없겠다 싶어 우리 부부는 식사 후 그가 준비한 성명서만 한 부 얻어서 돌아와 버렸다.
다음날 나는 시노트 신부와 함께 김형욱의 청문회 증언을 하루 종일 지켜보았다. 시노트 신부는 가톨릭 메리놀 교구에서 한국에 파견돼 15년간 봉사했다. 그는 인혁당 사건 사형수 8명의 구명운동을 펼치다 결국 그들이 75년 4월 9일 사형 집행되고 난 후 박 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김형욱이 청문회에서 증언한 내용 중 중요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박동선은 중앙정보부의 비밀 공작원이었다. 박은
주미대사를 지낸 정일권의 소개로 박 대통령을 만났다. 박동선은 주한미군 철수론이 나온 70년 미 의회를 상대로 매수회유공작을 펴라는 특별지령을 받았고, 이에 필요한 공작금은 한국이 미국에서 수입하는 쌀 대금에서 떨어지는 수수료로 충당하도록 했다."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기업은 총투자액의 5% 수수료. 리베이트. 정치헌금이란 명목으로 징수 당했는데 이 돈은 박 대통령이 스위스 은행에 개설한 비밀구좌에 입금돼 대외활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통일교 간부인 박보희는 중앙정보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중정은 그를 통해 통일교회를 움직여 왔다."
"박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한 두 세력은 김대중과 미 의회였다. 박대통령은 김대중 문제는 납치로, 이 의회에 대해서는 박동선에 의한 매수작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73년 8월 김대중 납치작전의 지휘관은 이후락 정보부장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중대한 계획이 대통령 허가 없이 감행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이 날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증언하면서 2년 전 나에게 써 준 문제의 '납치범 명단'을 제시했다. 그런데 김형욱이 이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그 전날 우리 부부가 그토록 사실대로 얘기하라고 당부 했슴에도 예의 '김대중 망명정부 수립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가 여전히 박 정권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김형욱은 박 정권의 부정부패 . 인권탄압에 대해서 낱낱이 폭로하면서도 자신의 치부에 대해서는 전혀 고백하려 하지 않았다. 김형욱은 "나는 한국의 학생데모는 애국정신의 발로라 생각했기 때문에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격화 되었을 때도 학생 한 명도 체포한 일도 고문한 사실도 없다"고 큰소리 쳤다.
이 말을 듣고 내 뒷자리에 앉아서 방청하던 시노트 신부가 갑자기 소리쳤다. "갓 뎀, 나쁜 놈, 거짓말!"
평소 조용하던 분이 욕까지 하는 바람에 돌아보니 그는 머리 전체가 빨개진 체(시노트 신부는 대머리다)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고문을 안했다고요?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나는 64년 한일회담 반대데모의 주역 김중태(당시 서울대 문리대생)의 등에서 내 눈으로 확인했던 고문 상처를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의 중앙정보부장이 바로 김형욱이 아니었던가.
김형욱은 또 "내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일어난 동백림 간첩사건으로 다소 국제적 물의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북괴 공작단을 일망타진함으로써 그들의 적화통일 야욕을 분쇄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삼아 말했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다. 취재하던 한 미국기자는 다음과 같이 빈정거렸다.
"갓 뎀, 넌센스, 그럼 왜 납치해 간 한국 사람들을 서독 정부 요청에 따라 서독으로 돌려 보냈는가?"
공화당의 구들링 의원은 김형욱에게 물었다.
"김 장군, 현재 수입원은 무엇이오?"
-"몇몇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철면피는 "나는 부정부패와 관계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미국에 올 때 1~2만 불도 구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 측은 이미 김형욱이 해외에 도피시켜 놓은 재산을 얼추 다 파악하고 있었다. 레이너드 미 국무성 한국과장은 비보도를 전제로 "우리는 김형욱의 해외 도피 재산을 1천 5백만 ~ 2천만 불로 추산한다"고 얘기했다. 나중에 프레이저위원회의 조사 결과 이것은 사실로 확인 되었다.
당시 김형욱이 미국 내에 숨겨 놓은 재산을 조사하고 있던 한 젊은 미국기자는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히 이즈 어 댐 라이어." (그는 지옥에나 떨어질 거짓말쟁이다)
시노트 신부는 청문회가 끝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쥬리,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형무소 앞에서 울부짖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제발 시체라도 돌려 달라면서 화장터로 향하는 영구차 뒤에 매달렸는데 수백 명의 경찰들이 우리들을 떼어내 무차별 구타했습니다. 뒤늦게 화장터로 뒤쫓아 갔습니다. 나는 그 때 불타고 있는 시체에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처들을 내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 가족들이 번갈아 우리 성당으로 찾아와 '신부님, 내 남편은 진실한 신자입니다. 그가 간첩 누명을 쓰고 죽었어요. 어린 자식들은 학교에서 공산당 간첩 자식이라고 따돌림을 받고 학교 가는 게 싫다고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하면서 울며 호소하던 그들의 얼굴이 생생합니다. 저 김형욱은 왜 진실을 밝히지 않습니까. 모든 게 조작된 사건이라고 이제라도 밝히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야 할 것 아닙니까?"
시노트 신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김형욱의 프레이저 청문회 증언 사흘 후인 77년 6월 25일자 한국의 모든 신문들은 뉴욕발 한창섭 합동통신 기자의 기사를 활자 하나 빠뜨리지 않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김형욱 씨 배후엔 반한 여기자가'라는 큰 제목에다 "반정부 활동, 회견등 조종", "김대중 사건 명단 써 주곤 협박받아", "잘못 걸렸다" 등의 작은 제목이 붙은 한창섭의 기사는 전혀 터무니없는 날조 기사였다.
그가 워싱턴 시절 나에게 몇 차례 공개망신을 당해 앙심을 품은데다가 김형욱이 청문회에서 "합동통신의 한창섭은 한국중앙정보부의 앞잡이"라고 증언하자 나와 김형욱을 한꺼번에 묶어 보복해 오는구나 싶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76년 6월 1일 김형욱의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LA타임스] 와의 회견을 내가 주선했고, 내 남편이 통역을 맡았으며 / 김형욱에게 반정부 대열에 가담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추방하겠다고 협박했으며 / 한국의 한 고위 외교관이 망명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와 NHK에 제보했으며 / 그동안 무보수로 특파원 생활을 했으며/ 문명자가 경영하는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 통신사는 북한 돈으로 운영된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창섭의 이 주장은 어느 것 하나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점은 "71년 김대중 씨가 대통령 후보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그의 동정을 낱낱이 한국 공관에 제보한 것이 바로 문명자" 라는 구절이다. 71년 김대중씨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나와 그 부부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 당시 한창섭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기에 그런 모략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창섭 자신이야말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한국 중앙정보부에 보고한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당시 한국신문은 허위와 날조라는 독소를 내뿜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바로 유신체제의 진면목이었다.
여자 팬티스타킹 안에 달러뭉치 감고 통관하다 적발된 김형욱
77년 1월 김형욱은 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채택돼 있는 상태에서 아들과 유럽을 여행하고 온 일이 있다. 그는 뉴욕 케네디 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에서 또 한 번 낯뜨거운 사건이 발생한다. 김형욱이 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세관원에게 걸린 것이다. 세관원은 오리걸음(덕 워킹)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양남자가 뭔가 숨기고 들어오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어 멈춰 세웠다고 한다. 꼭 아편쟁이 같이 생겨 마약 밀수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헤이, 유, 스탑."
-"미?"
"예스 유."
더욱 한심한 일은 세관원이 그를 불러 세워 수색하려 하자 김형욱은 한국식으로 세관원을 협박했다는 것이다.
-"내 몸을 수색해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너 그냥 안 둔다."
"오케이."
세관원은 옆에 있던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데려가서 발가벗겨"
보안관이 김형욱을 방에 데려가 발가벗겼는데 그는 다리에 무려 7만 5천 불의 돈뭉치를 붕대로 둘둘 감고 그 위에 여자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유태인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케네디 공항에서 김형욱을 잡은 세관원은 유태인이었는데 그 날이 마침 유태인들의 명절이었다. 그래서 그 날 저녁 그 세관원은 친척들이 모여 명절잔치를 벌이는 데 갔다가 '덕 워킹하는 코리언 거물' 김아무개를 잡은 얘기를 화제로 삼았던 것이다. 마침 그 자리에 참석했던 나의 유태인 친구는 '코리언 거물'이라는 바람에 "이 얘기를 워싱턴의 쥬리에게 알려 줘야겠다" 면서 새벽같이 나에게 전화를 해왔다. 얘기를 들어 보니 인상착의나 행동거지로 볼 때 그 '코리언 거물'은 김형욱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곧바로 뉴욕으로 날아갔다.
우선 뉴욕 이스트 지방검찰청 담당검사 방으로 갔다. 그는 "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가" 하면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그는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을 하던 시기에 미 8군 법무관으로 용산 미군 기지에서 근무했던 사람이었다. 김형욱이야 그를 알 리 없었겠지만 이 미국인 검사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김형욱을 기억하고 있어서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김형욱이 수사관들에게 이끌려 검사 방에 들어섰을 때 이 미국인 검사가 우리말로 인사를 했다고 한다.
"안녕하십니까? 김 부장."
난데없는 한국말을 들은 김형욱이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쳤다고 한다.
-"대체 댁은
뉘시오?"
사실 미국법에 따르면 입국할 때 5천 불 이상의 돈을 가지고 들어와도 세관에 신고만 하면 허용된다. 가지고 들어온 돈이 떳떳치 못한 것이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는 사람이 여자 타이즈 안에 돈뭉치를 둘둘 말고 들어오다 적발된 사건을 보고 나는 미국 검사 앞에서 민족적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미국인 검사가 다시 한 번 묻는 것이었다.
"형욱 김이 공항에서 잡혀온 것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았습니까?"
나는 그에게 말했다.
"기자에게서 소스(취재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취재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나는 법무성의 폴 미셸 특별검사와 프레이저 의원에게 전화를 했다. 김형욱 달러 밀반입 사건을 알려줬더니 모두들 깜짝 놀라며 엠바고(조건부 보도 유보)를 요청했다.
-"지금 상.하원 윤리위원회, 프레이저위원회에서 김형욱을 증인으로 신청해 놓고 있는데 그런 일 저지른 것이 보도되면 누가 그 사람의 증언을 신뢰하겠는가"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두 사람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이 세상에 비밀이란 없습니다. 내가 당분간 기사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질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교포 사회에서는 김형욱이 부정축재한 돈 수천만 달러를 미국에 숨겨 놓았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런 자가 자기 비리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박정희의 비리에 대해서만 미주알고주알 증언한다면 그가 설사 진실을 얘기한다 해도 결국 미 의회의 조사결과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요구하는 대로 이 사건 보도를 유보하겠습니다. 그 대신 당신들은 FBI 를 동원해서 김형욱이 미국에 도피시켜 놓은 재산을 샅샅이 조사해 코리아게이트 조사 결과 발표 때 함께 밝혀야 할 것입니다."
결국 김형욱은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나는 프레이저 의원측의 요구대로 그의 재판 기록이 입수될 때가지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유보했다.
라스베가스 시저스 팔레스 도박장에서 하룻밤 새 1백 42만 불 날려
그런데 김형욱의 프레이저 청문회 증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라스베가스에 사는 한 교포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LA지역의 반유신 운동의 대부라 할 김상돈 씨(장면 정권하의 서울시장)의 소개로 나에게 전화를 해 왔는데 김형욱에 대해 제보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괄괄한 성격의 여성으로 고향이 부산이라 했다.
-"우리 남편이 라스베가스의 '시저스 팔레스'라는 도박장에서 일하는데예 하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는기라예"
얘기인즉슨 이랬다, 사건 당일 한 50대 한국인 남자가 시저스 팔레스에 와서 도박을 하다가 무려 50만 불을 그 자리에서 날렸다. 그러자 이 남자는 약이 올라 씩씩거리며 칩을 가져다주는 종업원에게 50만 불어치를 더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그 종업원이 바로 전화한 여성의 남편이었다.
-"우리 남편이 보니 한국 사람이고 해서 그래도 동족이라고 생각해준다꼬 가만히 충고를 했답니더, '여기는 돈을 잃을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하고요."
그러자 그 남자는 화를 벌컥 내며 "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하면서 따귀를 올려붙이더라는 겁니다. 결국 그 남자는 그 날 도합 1백 42만 달러를 날렸다고 한다.
-"우리 남편이 집에 와서 따귀 맞은 얘기를 하는데 제가 그 소리를 듣고 참을 수가 있어야지예. 그래 내가 '동족이라 카는 놈이 그 따위요, 얻어맞아 가면서까지 그 직업 계속할 필요없소. 때린 놈이 누군지 이름이나 알고 봅시다' 하고 우리 남편을 끌고 '제너럴 김'이라 칸다는 그 한국 남자가 묵고 있는 호텔에 가서 알아 봤지예."
시저스 팔레스에서 '제너럴 김'으로 통하던 한국 남자의 호텔 예약기록을 확인하자 '김형욱'이란 이름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부부는 김형욱의 숙박비 지불 사인을 확인했다. 제널럴 김은 숙박비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로 긋고 사인을 했는데 확실히 '김형욱'이란 이름이었다.
그제서야 그가 한국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임을 알고 깜짝 놀란 부부는 더욱 분노했다. 그 당시 교포사회에서는 김형욱이 부정축재한 엄청난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 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부부는 LA지역의 반유신운동 지도자 김상돈 씨에게 전화했고, 김 시장은 "그런 얘기는 워싱턴의 문 기자에게 알려야 한다"고 해서 나에게 전화를 하게 됐던 것이다.
나는 LA에 연락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 봤다. 시저스 팔레스에서 1백 42만 불을 날린 코리언은 김형욱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세한 내용을 프레이저 의원에게 알렸다. 김형욱이 청문회에 증인으로 신청돼 있는 이상 프레이저 의원은 그의 언행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저 의원은 김형욱이란 인간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우리 위원회의 위신 문제니 그 일은 나중에 조사하자"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프레이저에게 강조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그가 도박장에서 날린 돈이나 미국에 숨겨 놓은 돈들은 모두 한국 국민의 세금입니다. 김형욱의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덮어놓고 박정희에 대한 그의 증언만 부각시킨다면 프레이저 위원회의 신뢰성은 떨어지고 당신 또한 미국의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한국에 무슨 사감이 있거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박정희를 치는 사람으로 매도될 것입니다. 반드시 김형욱의 비리를 낱낱이 조사해 그의 증언과 함께 발표해야 합니다."
결국 프레이저위원회는 행정부에 요청해 법무부와 FBI의 재무 전문가들을 동원해 미국. 스위스. 바하마 은행에 있는 김형욱의 비밀 구좌를 샅샅이 조사했다. 그 결과 김형욱의 아내 신영순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구좌까지 모두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78년 프레이저위원회는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2년간의 조사결과를 보고서 형식으로 발표하면서 "김형욱이 2천만 불에 달하는 재산을 해외에 도피시켰다"는 내용을 보고서에 수록하고 김형욱 비밀 구좌 거래사본까지 공개했다.
이 과정에서 김형욱의 축재 수법도 드러났다. 그는 주로 이북 출신 재벌들의 뒤를 봐주면서 돈을 거둬들였다. 그런데 웃지 못 할 일은 돈 걷는 수법 중 하나가 도박이나 내기였다는 것이다. 김형욱이 뒤를 봐 주는 재벌들은 그가 내기 골프를 하자고 하면 무조건 져 주어야 했다. 그 중 물정 모르고 김형욱에게 이겨 버렸다가 그에게 골프채로 맞아서 미국에 치료 받으러 온 사람까지 있었다.
수많은 증인들이 프레이저위원회에 나와 증언했는데 그 중 이색적인 인물이 바로 김형욱의 보좌관 이아무다. 그는 그 때 이미 김형욱과 결별한 뒤였는데 77년 5월 청문회 조사위원과의 인터뷰에서 "김형욱이 삼선개헌과 유신에 반대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증언을 마친 후 나는 이아무에게 김형욱과 결별하게 된 사연을 물었다.
-"그분은 돈이면 어떤 사람이라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 가지고도 못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평소 쌓인 불만이 폭발한 것은 76년 6월 4일 김형욱이 [뉴욕타임스]의 리처드 헬로런 기자와 인터뷰할 때의 일이라 했다.
-"미국 기자 앞에서 저를 욕하고 막 대하는데 해도 너무한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격모독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모실 생각은 없다. 나는 떠나겠다'고 선언했어요."
그와 같이 정의감 있는 사람이 김형욱 주변에 남아 있기가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종되기 몇 달 전인 79년 4월 19일 김형욱은 [민족통일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미국 교포신문들과 캐나다의 교포신문 [민중신문]에 유료광고로 게재했다. 그 내용은 요즘의 시각으로 봤을 때도 무조건적인 민족대단결을 주장하면서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 정도의 놀라운 것이었으니 유신 말기의 당시로서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모두들 그 광고를 보고 "김형욱이가 미쳤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 온 후 김형욱은 박정희와 김종필의 좌익 전력을 끊임없이 들먹이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반공주의자로서 '사상적 건전성'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내세우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나는 '드디어 김형욱이가 북한 카드를 쓰는구나' 싶었다. 박정희와의 거래를 위해 재민 민주화운동세력을 이용하고 미의회의 코리아게이트 청문회를 이용하더니 드디어 북한이라는 적의 적과 손잡으려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그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면 재미 민주화운동세력들이 그토록 냉담하게 그의 행위를 대했겠는가.
나는 79년 김형욱이 유럽에서 실종되고 난 후 교토통신의 요코가와 워싱턴 특파원과 함께 처음으로 뉴저지에 있는 김형욱의 대저택을 방문했다. 시점이 미묘한 때라 김형욱의 부인과 바로 연결이 되리라 기대하지 않고 무조건 김형욱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화를 받는 것은 김형욱의 부인 신영순이었다.
"미시즈 김, 저 워싱턴의 문입니다"
-"아, 안녕하셨어요?"
"그래 김 부장에게서는 무슨 연락이 있습니까?"
-"아니요."
신영순이 죽을 판이 다 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에게 집 위치를 물어 처음으로 뉴저지 테너플라이라는 고급주택가에 있는 그 어마어마한 저택을 찾아갔다. 웬만한 미국 부호의 집 못지않게 꾸며놓은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들어섰다. 응접실 벽에는 백자. 청자 등 한국 골동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가구는 완전히 불란서 스타일로 꾸며 놓았다. 그 호화로운 응접실에서 신영순은 사색이 되어 앉아 있었다.
"미시즈 김, 왜 전화를 직접 받습니까?"
-"저요, 전화벨만 울리면 우리집 주인이 금시라도 '여보, 나야'할것만 같아서요."
"파리 가서는 전혀 연락이 없었습니까?"
-"아니요. 도착하셨다고 전화가 한 번 왔었어요."
"그럼 실종된 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떤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를 했어요. 그가 온데간데 없다고요."
"그런데 왜 혼자 갔습니까? 비서 한사람이라도 데리고 가지."
-"그가 필요 없다고 했어요. 이상열 공사(당시 파리 주재 한국대사관 중앙정보부 요원)가 다 알아서 한다고."
듣고 보니 김형욱 실종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이상열 공사였다. 5.16 이후 일어났던 '반혁명' 사건 중 하나인 원충연 사건의 전모를 폭로한 것이 바로 이상열이었는데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시절 같은 황해도 사람이기도 한 그를 직계 인맥으로 삼아서 키워 주었다고 한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온 후에도 이상열은 파리 주제공사로 있으면서 때대로 김형욱에게 전화를 해 왔는데 박 정권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해 김형욱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물론 "저도 부장님처럼 망명하고 싶다"는 소리까지 할 정도였기 때문에 김형욱이 자기 사람으로 꽉 믿었다는 것이다.
당시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 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 하고 있었다. 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는 대가로 5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고 이미 1백만~1백 50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김형욱은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실종되고 만 것이다. 신영순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가기만 하면 스위스에서 나온 돈 받기로 다 돼 있다고 하면서 가더니 그만.."
일전에 그녀는 나에게 "있는 돈
박정희에게 다 바치고 서울 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우리집 주인에게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듣지 않아요"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었을 것으로 믿는다.
얘기 도중 화장실에 갔다 온 요코가와 기자가 필자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화장실에 한번 가
보세요."
가 보니 기가 막혔다. 화장실 손잡이는 18금이요, 쓰레기통은 은제품이고 수도꼭지도 금제였다. 이렇게 꾸며놓고 2천만 달러를 쌓아놓고 살던 사람이 그것도 모자라 5백만 달러를 더 탐내다 최후를 맞은 것이다.
그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사건 당시 나도 여러 가지 통로로 그의 사인을 추적했다. 중앙정보부가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 살해한 후 세느강에 버렸다는 설도 있었고, 산 채로 짐짝처럼 포장해 KAL기에 실어 서울로 데려갔다는 설도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사무실에 불어로 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바로 김형욱이 KAL기 짐칸에 실려 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외교관 출신으로 우리 통신사에서 함께 일하던 헤롤드 타프티에게 그 편지를 보이고 물었다. 그는 불어를 모국어만큼이나 잘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이 편지는 원래 불어로 쓴 것입니까? 아니면 외국어로 쓴 것을 불어로 번역한 것입니까?"
헤롤드는 편지를 읽더니 답했다.
-"이것은 외국어를 불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나는 미국의 항공사 화물부에 문의했다.
"사람을 짐짝처럼 싸서 운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하고 온도 습도가 낮아 사람이 짐칸에서 파리-서울간 15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중앙정보부가 KAL기를 전용기로 통째로 빌렸다면 가능한 일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취재는 벽에 부딪혔고 나는 김형욱의 사인규명을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 10여년 후인 86년 3월, 나는 뜻밖의 루트를 통해 김형욱의 사인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 발설자는 정일권이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나. 잘못했다고 비는 김형욱이를 자동차에 실어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 버렸다네."
그의 말에 따르면 산 채로 서울로 납치해 간 김형욱을 차지철이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대령했는데 박정희 앞에 선 김형욱은 "잘못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는 것이다. 정일권의 말대로라면 김형욱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 정일권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이북파 최측근'이었으니 분개할 만도 했다.
나는 이 사실을 86년 3월 25일 하이야트 호텔에서 정일권으로부터 직접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의 김형욱 [회고록]에 대해 몇 가지 짚어 둘 일이 있다.
내가 76년 주미대사관 김상근 참사관의 미국망명 절차를 주선해 준 후 언론의 추적을 피해 카터의 고향인 프레인스 조지아로 숨어버렸을 때의 일이다. 당시 카터 대통령 당선자가 고향에 머물며 취임 후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악관 출입기자들도 그 좁은 시골 마을에 진을 치고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카터의 어머니인 미시즈 릴리안을 인터뷰한 후 카터 가족 모임에 참석해 같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카터가 선거운동할 당시부터 같은 비행기에 타고 전국을 다녔기 때문에 카터 가족과 남다른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뚱딴지 같이 김형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 기자, 축하합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출마하시오. 하하하."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예요?"
-"김상근이도 망명시키고, 큰일 하셨소, 각 신문에서 난립니다."
"나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
아마 우리 집에 전화해서 남편으로부터 내가 카터를 취재하러 갔다는 얘기를 들은 그가 왕년의 정보부장 실력을 발휘해 플레인스 조지아 전화국에 '퍼슨 투 퍼슨 콜(Person to Person Call: 그 마을에 있는 쥬리 문이라는 사람을 찾아 달라고 신청하면 전화국에서 쥬리 문을 찾을 때까지 마을 전체에 계속 전화를 해서 연결시켜 주는 전화 교환제도)을 신청해 나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가 나에게 전화한 이유는 뻔했다. 그는 75년 박정희의 사위 한병기(박정희와 전처 김호남 사이의 딸인 박재옥의 남편)가 유엔대표부 부대사로 와 있으면서 캐나다 대사로 부임해 떠나기 직전까지 골프를 같이 쳤다.
한병기의 명목상의 직함은 유엔대표부 부대사였지만 사실상 그는 미국 내 한국의 로비활동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는 미국 언론과 한국 교포는 물론 반한적인 미국 국회의원들의 선거구민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매달 거액의 달러를 썼다. 75년 9월 걸프사에 근무하는 한 재미교포는 한병기로부터 "걸프 사를 그만두고 한미문화단체 주식회사에 와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한병기 관할하에 있던 이 '한미문화단체주식회사'는 겉으로는 한국문화를 미국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사업목적으로 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미국인들에게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사업들을 벌였다.
이처럼 끊임없이 박 정권과 접촉하여 거래를 계속하던 그가 김상근 망명사건이 나자 정보수집을 하려고 내게 전화한 것이었다. 그는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김상근 망명과정에서 나의 역할을 알아내려 했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은 김형욱이 79년 파리에서 실종된 후 85년 중반 한국에서 발간된 이른바 [김형욱 회고록]을 보니 플레인스 조지아에서의 상황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었다. 내가 먼저 김형욱에게 전화해서 "김상근을 내가 망명시켰다"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씨를 백주 대낮에 도쿄 시내에서 납치해 동해바다에 수장하려했던 한국 정보부 요원들이 설치는 워싱턴에서 중앙정보부 참사관의 망명을 내가 주선했노라고 자랑을 늘어놓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것도 박정권에 한다리를 걸치고 있는 김형욱에게 말이다. 미치광이가 아니면 모를까.
[김형욱 회고록] 곳곳에는 나에 대한 비방과 왜곡이 나온다.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된다.
나는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미 의회의 조사가 모두 끝난 78년까지 김형욱에 대한 전면적인 기사를 쓰지 않았다. 그것은 국무성과 의회담당자들의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조사가 마무리된 78년 10월 나는 교포신문 [한국신보]에 [내가 아는 김형욱의 전부]라는 시리즈를 통해 김형욱. 이후락 등의 부정축재, 공작정치, 인권탄압 행위들을 낱낱이 폭로했다. 겉으로는 유신에 반대해 망명한 민주인사인 양 행서하면서 뒤로는 박 정권과 거래하면서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던 김형욱으로서는 자신의 행적을 발가벗기 나에게 원한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김형욱 회고록]의 나와 관련된 부분을 직접 구술했다면 그것은 내가 쓴 기사의 객관성을 훼손하려는 의도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한국인의 진정한 벗 프레이저와 극우파 더윈스키
미 하원과 법무성의 2년에 걸친 서슬 푸른 조사활동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고 실형을 산 이는 리처드 한나 하원의원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박동선으로부터 받은 돈은 3만 달러도 안 되었지만 2년이나 형을 살고 국회의원 옷까지 벗어야 했다. 그는 친척이 한국전에 참전해 전사했던 인연으로 늘 "한군은 우리의 혈맹이다"라고 말하면서 비교적 순수한 마음으로 한국을 좋아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오토 패스만 하원 세출위원장 같은 거물들은 모두 빠져 나가고 한나 같은 피라미(?)만 걸려든 것은 뇌물 수사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뇌물 공여란 현금이 오가는 상황인 만큼 거물들은 한결같이 "받지 않았다" 혹은 "받고 난 후 돈인 걸 알고 돌려주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이다.
어쨌든 프레이저위원회를 비롯한 미국 의호의 코리아게이트 조사과정에서 박 정권의 비자금과 관련한 많은 사실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들의 활동이 없었다면 그 문제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 버렸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한국 국민을 위한 중앙정보부'의 역할을 했던 이 미국인들의 면면을 되새겨 보자.
무엇보다도 나는 하원 외교분과위원회 아시아 관계위원장이면서 국제기구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위원회)를 이끌었던 프레이저 의원을 비롯한 위원회 스탭들을 잊을 수가 없다.
코리아게이트의 전모를 밝히려 했던 청문회 활동으로 프레이저 의원은 78년 미네소타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곤경을 겪었다. 프레이저 의원은 민주당의 거물 험프리 의원의 후임자로서 그 지역에 진출했는데 그 지방은 유사 이래 공화당 후보가 낙선한 것은 통일교를 비롯해 한국의 보수적 친박정희 기독교파들의 치열하고 조직적인 낙선운동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프레이저를 '공산주의자' '마귀의 앞잡이'로 규정하고 낙선운동을 벌이는 넌센스를 벌였다. 박정희, 이후락, 김형욱 등 군사정권 주역들이 한국 민중을 가렴주구한 죄상을 낱낱이 밝혀낸 프레이저 의원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진정한 벗이 아닌가.
프레이저 의원은 이듬해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 시장에 출마해 3선을 역임한 후 96년 은퇴했다. 현재 그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76년 대통령 선거 때 카터 선거캠프의 중서부 총책임자였던 그의 부인 이반 프레이저는 미국의 정형적인 자유주의적 지식인으로 카터 당선 후 국무성 관리로 일했다.
한편 프레이저 의원과는 정반대로 프레이저위원회에서 박 정권을 위한 '변호인 심문' 역할을 주로 담당했던 극우파 의원으로 더윈스키(공화당, 시카고 출신)가 있다. 그는 코리아게이트의 조사위원이면서도 박동선의 돈을 먹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와 박동선을 싸고도는 그의 언행에 격분한 시노트 신부는 78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 때 시카고의 카톨리 카운티에서 더윈스키 낙선운동을 벌였다. 결국 더윈스키는 선거에서 낙선했는데 80년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 후 국무성 관리로 임용되었다.
국무성의 필립 하비브 아태담당 차관보도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그는 레바논계 미국 시민으로 유태인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다. 71년에서 74년까지 주한 미 대사를 지냈는데 그 무렵 서울과 워싱턴을 오가며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각종 명목으로 돈을 제공하는 박동선의 수상쩍은 행적을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보고하고 조사를 건의한 바 있다.
뒷날 박동선은 "하비브가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자기를 해치려고 했다"는 둥의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야말로 강변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비브가 아니라 누구라도 박동선 같은 수상쩍은 로비스트의 활동을 감지했다면 국무성에 보고하는 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직무이기 때문이다. 단지 당시 한미 간에 월남파병이라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국무장관 키신저가 박 정권의 불법적 로비 활동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을 뿐이었다. 실제로 하비브 후임의 주한 미국대사 리처드 슈나이더는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문: 당신은 주한미군 대사로 있을 때 한국인들의 불법적 로비활동에 대한 관심을 가졌습니까?
답: 그것은 우리에게 큰 문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72년 12월 18일에서 74년 2월 27일 사이에 주한 미국대사는 박동선의 로비활동에 대해 국무성에 정식으로 6번이나 상황설명과 경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미국 국회의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수시로 생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박동선은 요주의 인물이니 조심해라" "박에게 선물을 받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방한한 국회의원 보좌관 중 몇 명은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주한 미대사관에 알리고 간 일도 있습니다. 73년 8월 13일 나는 박동선이 미국에서 수입하는 쌀 1톤당 1불씩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는 사실을 국무성에 보고했고, 이외에도 박동선이 거둬들이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수수료와 그가 정일권을 통해 한국과 수시로 연락하고 있는 사실, 그가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면서 필요이상으로 미국대사관 주변을 맴도는 사실 등을 모두 포터 차관에게 전달했습니다.
특히, 74년 5월 서울을 방문한 니덱커 백악관 의회문제 특별보좌관에게 박종규 경호실장의 측근이 1만 불이 든 봉투를 전달한 사건은 하비브를 포함한 합리적 미국 관리들을 경악시켰다. 니덱커는 출국직전 이 봉투를 전달받고는 열어 보지도 않은 채 미국 대사관의 한 관리에게 맡기면서 "박종규에게 돌려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니덱커로서는 한국 방문 중에 노진환 유정회 의원이 접근해 의미심장한 제의를 했던 것, 또 그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반정부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려 할 때마다 한국 측에서 여러 차례 제지했던 사실 등 몇 가지 짚이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봉투 속에는 1백 달러짜리 지폐로 1만 불이 들어 있었는데 이 돈을 박종규에게 돌려준 것이 바로 하비브 대사였다. 니덱커는 "나와 함께 방한한 국무성의 크라우스 씨도 1만 불이 든 돈봉투를 받았는데 그도 그것을 돌려주었다"고 밝혔다.
니덱커는 워싱턴에 돌아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헤이그와 존 프뢰브에게 그 사건을 보고했다. 이것 역시 미국 정부관리의 당연한 의무다. 그들은 매일 상부에 올리는 일일보고서를 쓴다. 거기에는 그들이 수집한 정보나 만난 사람들에 대한 모든 정보가 기록된다. 이것은 상부에 의해 취합돼 관계부서로 속속 전달된다. 이런 체계에서 일하는 백악관 보좌관에게 1만 불짜리 봉투를 건네 '친한파'로 만들어 보려 했던 것이 얼마나 한국적 발상인지를 당사자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미국 국무성 관리들은 "주한 미대사관에서는 정무담당 하기가 쉽다"고들 말한다. 여야 할 것 없이 한국의 주요 인사들이 제 발로 찾아와 정보를 준다는 것이다. 정보를 받은 미국 관리들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면 "내 아들 비자 좀 내주시오"라는 식의 낯 뜨거운 청탁을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인사들은 자신이 제공한 정보뿐 아니라 자신이 한 청탁까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기록되어 국무성과 관계기관에 보고되고 관계부처에 회람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미국 관리들은 그들이 공무 수행중 받은 선물이 50달러자리 이상일 때는 반드시 국무성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니덱커 역시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 정권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는데 같이 골프를 하자고 했다. 골프가 끝난 후 그는 나에게 2천4백 년 된 돌로 깍은 골동품, 조각, 그림 등을 선물했는데 한국 측은 그것을 나에게 배편으로 보냈다. 나는 그것을 받아 골동품상에게 감정을 시켜 50불 이상 되는 물건들은 국무성에 보고했다. 그 중 한 개는 일리노이 박물관에 1만 불에 매각 됐는데 그 때 [워싱턴 포스트]의 맥신 체셔 기자가 참석했다."
또 니덱커는 청문회 증언에서 "1만 불짜리 봉투를 되돌려 보낸 후에도 노진환이 몇 다례 다시 찾아왔다"고 밝혔다. 한번은 그가 대통령, 대통령의 가족, 개인참모 그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참모들을 위한 선물을 가져왔다. 특히 헤이그 국무장관 부인에게 진주목걸이, 로즈 메리우드 닉슨 대통령 개인비서에게 진주목걸이와 귀걸이 등을 전해 달라고 했는데 니덱커는 "백악관 우체국에 말해 모두 노진환에게 다시 부쳐 주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74년 6월 의회 선거를 앞두고 노진환이 다시 찾아와 "백악관이 지명하는 모든 후보에게 5천~3만 달러까지 선거자금을 기부하겠으니 일을 주선해 달라"고 해서 니덱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밝혔다. 니덱커는 "노진환은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얘기하지 않았으나 모두 현금으로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은 일일정보보고 체계를 통해 도널드 레이너드 국무성 한국과장, 하비브 주한 미대사에게 즉각 보고되었다.
또 노진환은 니덱커가 성공회 신자라는 점을 기회로 서울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 니덱커의 이름으로 몇 번 헌금을 했다. 이 사실을 알고 니덱커는 "나는 공직에 있는 사람이고 종교적 신념으로도 다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 절대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중단 시켰다고 한다.
5공 시절 한국 기자들이 쓴 코리아게이트 관련기사를 보면 하비브 대사나 레이너드 한국과장이 '박 정권에 대해 증오심을 가진 사람들로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레이너드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사람이 직선적이고 괄괄해서 일면 거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박 정권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증오감이라기보다는 "질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는 5.16 당시 주한 미대사관에서 정무담당 참사관으로 주재했던 한국통이다. 그럼에도 그와 같이 정직하고 고지식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박동선과 한국 정부의 활동은 한 나라 정부의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수준의 행태였던 것이다.
한국 정부 관리들이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계속한 데는 인간관계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와 그에 대한 몰이해도 상당히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특파원 시절 나는 김동조 주미대사가 국무성에 들어가 한바탕 당하고 나와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미국놈들은 정말 몰인정하다. 바로 어제까지 골프 같이 치면서 '동조', '동도' 하던 놈이 오늘 문제가 생겨 국무성에 들어갔더니 어떻게 나오는 줄 아나? 책상에 딱 하니 정자세로 앉아 똑바로 쳐다보면서 '미스터 엠배서더' 하고 나오니 도대체 이거 미친놈 아닌가."
그런 경우 한국인들의 관점에서는 상대가 '미친놈'이지만 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보이는 법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골프는 골프고 일은 일이다. 아무리 친하다 해도 일단 일처리에 들어가서는 자기네 정책 지침에 따라 일할 뿐, 친분관계가 일처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미국 관리들이다. 그들의 제도 자체가 한국인들의 일처리에서 흔히 나타나는 인정주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레이저위원회의 주요 스텝 중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 한국인 증인들을 인터뷰하는 일을 도맡았던 에드 베이커는 현재 하버드 대학 연구원으로 있다.
또한 스탭진의 책임자였던 밥 베쳐는 그 후 불행한 일을 겪었다. 거의 2년 이상 진행된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로 밥이 일에 파묻혀 사는 동안 부인과 서서히 틈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의 부인은 밥이 일본 삿포로 주재 미국영사관에 근무하던 시절에 결혼한 일본인 여성이었다. 결국 밥은 부인과 이혼했다.
그 후 밥은 일본계통의 한 연구소에 취직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연구소는 일본의 극우성향인 사사가와 료이치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밥의 리버럴한 성향에 제동을 걸기 위해 사사가와 재단측은 연구소에 밥의 해임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원을 중지하겠다고 압력을 넣었다. 이혼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일에서마저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 밥은 방황하다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코리아게이트 과정에서 김한조와 관련된 두 미국인 법률가가 있다. 이 두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을 짓게 된다.
우선 법무성 특별검사로 김한조를 심문했던 폴 미셸이 있다. 김한조는 훗날 그가 쓴 책에서 "폴 미셀이 나를 공각 협박했다"고 했는데 김한조가 그런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정도로 미셸은 대단히 터프한 사람이었다. 이재현 전 주미대사관 공보 실장이 "김동조 주미대사가 직접 상.하원 의원들에게 돈봉투를 뿌렸다"고 청문회에서 증언 후 김동조 전 대사의 미국 소환과 청문회 출두 문제를 놓고 한미 간에 외교전이 벌어졌다. 이 때 미셸을 상대했던 한국 관리들이 "학을 뗐다"고 고개를 내젓더라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양심과 정의라는 면에서 폴 미셸과 대조적인 인물로 포비치라는 변호사가 있다. 그는 코리아게이트 조사과정에서 김한조의 변호인이었다. 김한조는 포비치가 자신을 무죄로 만들어 줄 것으로 확신했던 것 같다. 그러나 김한조는 포비치에게 거액의 변호사비만 뜯기고 끝내 실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김한조가 먹은 박정희의 비자금은 고스란히 포비치의 주머니로 들어간 셈이다.
코리아게이트의 한 주역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다. "한국은 반드시 민주화 되어야 한다."는 카터의 신념이 없었다면 코리아게이트 사건은 그처럼 철저하게 파헤쳐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의 어떤 이들은 카터가 자신의 '도덕정치'라는 명분을 위해 코리아게이트를 이용했다는 식의 '정치적' 평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카터라는 인물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카터는 역대 미국 대통령은 물론 워싱턴 정가의 정치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물이다. 나는 그가 대통령 선거전을 치룰 때부터 비행기를 같이 타고 미국 전역을 다녔기 때문에 그를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대단히 소탈하고 인간미가 흐르는 사람이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 같은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권위로 다른 사람을 누르려고 하는 법이 없고 누구든 격의 없이 대한다. 하지만 일단 가치판단의 문제에 서면 교묘한 정치적인 언사로 초점을 흐리는 법이 없이 직선적이다. 그의 부인 로잘린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가라기보다는 인권운동가 같은 성향이었다.
이 같은 부모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막내딸 에이미는 고등학생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 앞에서 남아공의 인종차별과 인권탄압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봉고차에 실려 간 일도 있었다.
카터가 백악관에 입성한 후 백악관 출입기자들로부터 톡톡히 상견례(?)를 치른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코리아게이트 같은 것이 왜 미국땅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취임한 후 1백일 까지는 '허니문 기간'이라 해서 백악관 출입기자들도 본격적인 질문공세를 삼간다. 이 기간이 지난 후 열린 첫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현재 대통령의 직계가족 중 출가한 사람들까지 백악관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경비는 대통령 월급에서 지불됩니까? 아니면 백악관 예산으로 충당하고 있습니까?
그 기자의 지적대로 당시 칩 카터 부부 등 대통령의 출가한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들이 백악관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대통령의 미혼 자녀는 백악관에서 함께 살지만 출가한 자녀는 분가하는 것이 관례였다. 케네디나 존슨, 닉슨의 자녀들은 아직 미혼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문제가 관심사가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대통령 취임 후 첫 질문이 "혹시 대통령이 자기 아들 손자며느리를 백악관 예산으로 먹여 살리고 있는 것 아니냐"고 따지는 셈이었는데 나의 동양적인 정서로서는 미국기자들이 좀 지나치다 싶었다.
언론담당 대변인 조디 파월이 이에 답변했다.
"기자는 백악관 시스템을 모르십니까? 대통령의 기혼 자녀의 생활 경비는 대통령 월급에서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기자는 지지 않고 "그렇다면 대통령의 세금납부 명세서를 내놔라"고 물고 늘어졌다. 대통령이 아들 생활비를 자기 월급에서 냈다면 세금 낼 때 그 부분이 경비로 처리되었을 테니 증거를 보자는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한 해에 두 번 소득세를 냈다. 4월 20일 이 첫 번째 소득세 납부일이었는데 카터가 77년 1월 20일에 취임했으니 취임 1백일이 지난 그 시점에서 보면 4월 20일에 첫 번째 소득세를 냈을 테니 그 명세서를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결국 그 기자는 대통령의 소득세 납부명세서까지 받아내고서야 물러섰다. 이래저래 말썽이다 싶었던지 얼마 후 칩 카터 가족들은 백악관에서 나갔다. 그 기자의 배후에 공화당의 영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설사 그렇대 해도 따질 만한 것을 가지고 따져야 기자 자질을 의심받지 않는다. 결국 카터 아들 부부의 생활비 문제도 미국사회에서는 따질만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레이건이나 부시도 대통령 전용기에다 친척, 친구를 태웠다가 기자들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다. 기자들이 "대통령 친구가 타고 간 거리가 몇 마일이나 되며 거기에 소요된 기름 값은 얼마나 되는가를 밝히라고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규칙위반에 대해서는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따따부따하는 미국 사회이니 코리아게이트가 2년여 동안 뜨거운 이슈가 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한국 정부가 문제될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코리아게이트를 회고할 때 백악관과 국무성의 미국인 동료 기자들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5.16쿠데타 이후 내가 백악관과 국무성에서 외롭게 한국관계 질문을 던질 때마다 추가 질문을 던져주어 한국문제를 사건화해 준 동지들이다. ABC의 데드 카풀, NBC의 톰 브로커, AP통신의 베리 슈왈츠, UPI의 존 바튼, [워싱턴포스트]의 오버도퍼 등은 한국민들이 기억할 만한 언론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아시아담당 기자들이기도 했다. 미국의 언론사들은 일단 국무성 출입기자로서는 UPI의 헬렌 토마스와 ABC의 샘 대니슨을 잊을 수 없다. 헬렌 토마스는 61년 2월부터 백악관을 출입하기 시작한 현역 최고참 백악관 출입기자다. 그 다음이 61년 4월부터 백악관 출입기자를 시작한 필자다.
헬렌 토마스는 레바논 계통의 중동계 미국인이다. 중동계는 미국 사회에서 소수민족이다. 반면 유태인들은 미국의 정.재계만이 아니라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만 해도 활동하는 기자의 60%가 유태계다. [워싱턴 포스트] 사장 캐서린 그라함 여사의 남편 역시 유태인이다. CBS의 앵커맨 월터 크롱가이드, NBC의 앵커우먼 바바라 월터스도 유태인이다. 이러다 보니 나중에는 버거, 헬드만 등 미국 기자들의 성만 보고도 그가 유태계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국무성에서 중동전쟁 문제를 브리핑할 때면 유태계 기자들이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치게 마련이었다. 한번은 대통령 수행기를 함께 타고 가며 헬렌 토마스가 눈물을 흘렸다.
-"쥬리, 중동의 비극을 해결할 수 있는 대통령이 언젠가는 나올거야. 우리 함께 노력하자."
"헬렌, 이 지구상의 분단국가는 모두
통일 됐는데 오직 내 조국 코리아만이 분단 상태로 있어. 언제 다시 동족끼리 전쟁을 치르게 될지도 몰라. 이건 정말 비극이야."
헬렌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예에스, 예에스 코리아는 통일돼야 한다."
한국 문제나 중동문제가 이슈가 될 때면 우리는 백악관에서 서로 도왔다.
그러나 헬렌 토마스 보기에 민망했던 일이 있다. 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헬렌 토마스는 평소 소신대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 그에게 물었다.
-"미스터 프렌지던트, 한국은 이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성숙했다 봅니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언제쯤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김 대통령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상황은 주한 미군의 주둔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후 PBS(교육방송)와의 대담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통일 이후에도 주한 미군은 한국에 주둔해야 합니다."
헬렌 토마스가 경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ABC의 샘 대니슨은 카터 선거전 때 애틀랜타 취재 기자였는데 카터가 당선되고 나서 백악관 출입기자로 왔다. 그는 유들유들하면서도 끈질긴 성미의 소유자다. 지난번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였다. 백악관 대변인 조지 스타나폴리스가 "오럴 섹스는 있었으나 성행위는 없었다"고 클린턴을 변명하느라 진땀을 빼는데 샘 디니슨이 천연덕스럽게 질문했다.
-"대변인, 오럴 섹스는 섹스가 아닌가? 그렇다면 섹스와는 뭐가 다른가?"
조지 스타나폴리스가 땀을 흘리며 답변했다.
"다 아는 사람이 짓궂게 왜 그러는가?"
정례 브리핑이 끝나자 조지는 연신 "못 해먹겠다"고 투덜거렸다. 뒤에 보니 그는 국무성으로 옮겨 갔다.
매년 1월이면 여기자 협회는 미국 상.하원 의원, 정계 인사들을 초청해 만찬 행사를 갖는다. 이를 '콩그레셔널 디너'라 부른다. 78년 콩크레셔널 디너에서 우리 기자들은 정치인들을 초청해 놓고 코리아게이트를 소재로 한 연극을 공연했다.
극중에서 미국 정치인들이 박정희로 분장한 한국인들에게 묻는다.
"준비 됐나?"
-"예, 준비 됐어요."
곧이어 한국인들은 가짜 1백 불짜리를 무대 위에 눈처럼 뿌리기 시작하고 미국 정치인들은
"내 돈" "내 돈" 하며 일제히 달려들어 이를 줍는다.
이를 본 구경꾼들이 비아냥 거닌다.
"사우스 코리아에 얼마나 돈이 많길래..."
"사우스 코리아에 원조해 주고 커미션 먹고, 원조해 준 돈 뇌물로 먹고... 미국
정치인처럼 좋은 직업이 어디 있니?"
구경 온 정치인들의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임은 물론이다.
극본을 쓴 것은 [이브닝 스타]의 정치부장 로럴드 소러였다.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미국 기자들의 심리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하나는 부정한 돈을 받아먹은 미국 정치인들의 비리를 파헤치려는 기자정신 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나라가 조금 컸다고 돈을 뿌려?" 하는 못마땅한 심사였다. 이 연극은 그들의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요즘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60~70년대에 워싱턴 주재했던 일본 기자들은 백악관이나 국무성 정례브리핑 때 질문을 거의 하지 못했다. 단지[도쿄신문] 특파원인 가토라는 영감만이 질문을 종이에 적어 와서 열심히 묻곤 했다. 그러나 그 질문을 알아듣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링컨 화이트 같은 점잖은 대변인은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청하지만 맥 크로스키 같이 성미 급하고 까다로운 대변인은 "도대체 당신 질문 내용이 뭐요?"하고 닦달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영어가 짧아 고생했던 일본 기자 중에 [요미우리]의 워싱턴 특파원 와다나베 쯔네오(현 [요미우리]사장)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성실하고 정직한 성품이었다. 도쿄대 다닐 때 공산당 당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력도 있었다. 나는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갖는 그를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도 변하는 것인지 그는 그 후 [요미우리]의 편집국장과 사장을 역임하면서 완전히 극우파로 변해 버렸다. 그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시절에 [요미우리]는 일본 평화헌법 개정의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그 시기 필자를 가장 슬프게 한 것은 바로 동족인 한국기자들이었다. 합동통신의 한창섭 기자는 아예 나를 매장시키기 위해 박스기사로 '문명자는 친북인사'라고 썼다. 그는 과거 칼 알버트 하원 의장실에 자신이 박정희의 첫 사위인 한병기의 친척인 것처럼 거짓 행세했던 일을 두고 내가 나무랐던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앙심을 품은 것 같았다. 그가 그런 사감으로 나에 대한 왜곡기사를 계속 쓰는 바람에 다른 일간 신문사에서는 뉴욕발 합동통신 기사에 반드시 '한창섭 기(記)'라고 밝히곤 했다. 자신들이 쓴 기사로 오해받을까 해서 그랬던 것이다.
나에 대한 모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에서 발간되는 민단신문은 어처구니없는 인신공격 기사를 실었다.
"문명자가 일본말을 잘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문은 또 일본 대학시절 연애박사로 남녀 관계가 문란했다."
이 기사의 필자는 '김윤환'으로 되어 있었다. 분통이 터진 나는 당장 서울의 김윤환(당시 유정회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같은 대구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야, 윤환아 뭐라고? 내가 일본놈 혼혈아라고? 또 뭐 연애박사?"
-"누님, 누님, 그건 절대 내가 쓴 기사가 아닙니다. 어느 놈이
내 이름을 도용한 겁니다."
"그러면 네가 똑똑히 밝혀."
한번은 메이지대학 동창생으로 일본 히로시마에 사는 최성원씨가 미국의 우리 집에 놀러왔다. 그는 대학시절 나에게 청혼을 했던 사람이다. 나는 그 청혼을 거절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뒤에는 가족끼리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문 여사. 사실은 중앙정보부 놈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기막힌 소리를 하더구먼. 대학시절에 내가 문 여사하고 성관계가 있었다고 증언해 달라는 거요."
"뭐요? 그래서요."
-"아,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지. 나는 사실 손목 한 번 못 잡아봤고, 대학시절 문명자는 워낙 남성적으로 활동적이라 '중성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랬지. 일본에서 전화로 얘기하면 문 여사 혈압 올라 죽을까 봐 내가 워싱턴에 와서야 얘기하는 거요."
실제로 나는 혈압이 올랐다. 중앙정보부의 저열한 공작에 분노했고, 나아가 내 조국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데 더욱 분통이 터졌다.
중앙정보부에 뺏긴 이희호. 닉슨 백악관 회동사진
79년 6월 카터는 도쿄에서 열린 G7에 참석했다가 한국을 방문했다. 나는 그 때 백악관 수행기자단의 일원으로 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카터는 일본 방문길에 한국에 들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상당히 고심했다. 인권외교를 펼쳐온 카터로서는 자신의 방문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로 비쳐질 것을 못내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까지 왔다가 한국에 들르지 않고 간다면 이는 한미방위조약이 흔들리는 것으로 비쳐 북에 빌미를 줄 우려가 있다는 안보논리로 카터는 마지못해 한국 방문을 결정했다. 79년 이란 팔레비 정권,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 등 제3세계 친미 독재정권들이 잇따라 붕괴하고 있는 당시의 정세도 이 같은 안보논리에 힘을 실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 내린 직후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방한 수행단 모두 육여사 묘지에 가서 참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터는 바로 헬리콥터를 타고 주한 미군부대 캠프 케이시로 가버렸다. 그는 거기서 자고 다음날부터 공식행사를 시작했다. 이는 국빈 방문 의전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곤란해진 것은 우리 기자단들이었다. 미국 대사관 관계자는 '공식방문에 따른 스케줄'이라면서 계속 육여사 묘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AP의 베리 슈와이트는 "그게 말이 되느냐"라면서 펄펄 뛰었다.
다음 날 여의도 광장에서 카터 방한 환영행사가 열렸다. 그 후 한.미 양국 대통령이 탄 차가 중앙일보사 근처까지 왔을 때 인근 빌딩에서 수많은 색종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카터는 차에서 내려 연도의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카터가 내리자 박정희도 내렸다. 즉시 경호원들이 박정희를 둘러쌌고, 키 작은 그는 경호원들의 '인의 장막'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그는 연도의 국민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걸 보고 뉴욕 [데일리 뉴스]의 한 기자가 나에게 말했다.
"박정희는 이제 마지막이다. 저렇게 국민을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오래 갈 수가 있겠는가."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도착한 후 나는 [뉴욕타임스][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뉴욕데일리]등의 기자들을 데리고 당시 연금중이던 동교동 김대중 씨 집으로 갔다. 이희호 여사가 가르쳐 준 대로 007작전처럼 택시를 여러 번 갈아타고 홍익대 쪽에서 내려 뒷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김대중 씨는 거실에 걸린 달력에다가 하루하루 동그라미를 쳐놓고 있었다. 연금된 날짜를 세는 방법인 듯싶었다. 이희호 여사가 커피를 내왔고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 도중 파리가 윙윙 날자 김대중 씨가 파리채로 파리를 잡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나라의 야당 지도자를 집안에 가두어 놓고 파리나 잡게 하면서 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다음날도 김대중 씨를 인터뷰하겠다는 각 사의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교대로 동교동으로 보냈다. 그러느라 서울 언니 집에도 가보지 못했다. 설사 시간이 있었다 해도 중앙정보부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돈암동 언니 집까지 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니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부리나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UPI의 헬레 토마스가 나를 따라 내려왔다. 가 보니 언니가 큰조카와 함께 사색이 되어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주변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 놈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언니, 올라가자."
나는 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막아섰다.
-"안 됩니다. 위쪽은 현재
통제구역입니다."
그 때 소식을 들었던지 국무성 대변인 하딩 카터가 나타났다. 그가 중정 요원들에게 말했다.
"이분은 미국 대통령의 손님입니다. 무례한 행동을 삼가 주십시오."
그리고 하딩은 언니의 팔짱을 끼며 나에게 말했다.
"쥬리, 올라갑시다."
내 방에 마주앉자 언니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건강하던 언니가 몹시 쇠약해져 있었다. 나의 망명 후 사실 나보다 더 시달림 당한 것은 서울에 남아 있던 나의 유일한 혈육인 언니였다. 당시 형부는 주단 제조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집안 형편이 다소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안 형사들은 걸핏하면 언니 집으로 찾아와 트집을 잡고 행패를 부렸다. 그럴 때 마다 언니는 그들을 인근 중국요리 집에 데려가서 실컷 먹이고 용돈까지 쥐어 보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으며 통행금지 시간까지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형부가 쓰러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단다. 그 날도 형사들은 언니 집에 찾아와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미국에 있는 동생은 여학교는 어디 나왔어요?"
그렇게 시작하면 그들의 트집은 통행금지 시간까지 계속이었다. 참다못한 형부가 형사들에게 소리쳤다.
"출가외인 문명자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날이면 날마다 우리 집에 와서 괴롭히는 거야? 나가. 이 새끼들아!"
그 순간 형부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형부는 반신불수가 됐고, 언니는 남편을 고쳐 보려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환자 간호하는 사이에 자신도 병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명자야, 박정희 이놈은 언제 죽겠노?"
"언니, 박정희는 얼마 못 가. 틀림없어."
내 말을 들은 언니는 손으로 내 무릎을 짚으면서 울먹이며 말했다.
-"제발! 제발!"
언니의 눈물을 닦아 주고 옆에 있던
헬렌에게 인사를 시킨 후 나는 물었다.
"언니, 내가 전에 신문지로 싼 뭉치, 맡겨 둔 것 있지. 그건 어떻게 됐어?"
그것은 71년 김대중 후보와 이희호 여사가 워싱턴을 방문해서 이희호 여사가 패트리셔 닉슨과 회동했을 때 백악관 공식 사진사가 찍은 8 x 10 사이즈의 사진이었다. 나는 71년 3월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한미 공수기동훈련) 취재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것을 가지고서 언니에게 맡겼던 것이다.
언니가 말했다.
-"봐라, 그게 그렇게 중한 것이라고 나한테 말해 줬으면 좋았지 놈들한테 뺏겼다."
형사들이 집안이 완전히 뒤집어질 정도로 샅샅이 수색을 했는데 그 사진이 튀어 나오는 바람에 사찰이 엄청나게 심해졌다는 것이다.
형사들이 언니 집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한 것도 그 뒤부터라고 했다. 내가 이희호와 패트리셔 닉슨의 회동을 주선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중앙정보부가 뭔가 다른게 없나 해서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희호와 닉슨의 회동 사진은 중앙정보부로 넘어갔다. 그러나 지금도 캘리포니아에 있는 닉슨 라리브러리에 가면 그 사진을 볼 수 있다.
언니는 수없이 뒤돌아보며 조카의 손을 잡고 신라호텔 문을 나갔다. 나 역시 언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우리 둘 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인권문제 제기하니 박정희가 10분간 테이블 밑만 쳐다봐"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나는 카터에게 물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프레지던트 박의 인상이 어떻던가요?"
-"쥬리, 정상회담에서 말이요. 내가 인권문제를 제기하니까 그가 아무 대답도 안하고 한 10분 동안 칵테일 테이블 밑만 쳐다보는데 그만 답답해서 미칠 뻔했고. 근혜 양은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느라 수고하는데 인상도 좋고 차분하더군요. 참으로 안되었습니다."
박동선, 김한조 같은 자들은 물론, 박정권 하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사들조차 코리아게이트라는 미국 국회의원 매수공작을 놓고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애국적 동기에서 벌인 일이었다"고 변명한다. 또 어떤 이들은 "70년대 박정희의 대미 로비는 유태인들의 로비활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운이 나빠서 '도덕정치 구현'을 걸고 나온 카터의 정치적 목적과 특종을 만들려는 미국 언론의 제물이 된 것이다."라고 코리아게이트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코리아게이트는 박정희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한 카터의 압박 작전이었다'라는 심오한 분석도 있다. 미국의 진정한 목적은 박정희의 독재정치나 인권탄압을 막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로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다 못해 핵 개발에까지 나선 박정희를 제어하기 위해 그의 약점을 공격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 같은 분석은 다원적인 미국 사회를 전체주의적이고 일원적인 사회와 혼동한 데서 나온 오류다. 설사 카터가 박정희의 핵 개발을 막으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코리안게이트를 의도적으로 사건화하려 했다 해도 의회, 언론, 지식인, 시민사회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는 것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미국 사회다.
미국 상.하원이 윤리위원회, 프레이저위원회 등 각종 기구를 구성해 사건 조사에 나선 것은 한국 정부가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려 했다는 의혹이 터져 나온 상황에서 의회의 명예회복을 위해 당연히 취할 수 밖에 없는 조치였다. 게다가 미국의 언론인들은 미국 사회에서도 가장 리버럴한 지식인 집단이다. 그들의 눈에 유신체제와 인권탄압으로 정권을 유지하려 하는 박정희라는 인물이 대체 어떻게 비쳐졌을지는 불문가지다. 여러 미국 신문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기고한 라이샤워 같은 미국 지식인이 박정희를 마치 악마와 같이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결국 문제는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불법적이고 반민주적인 조치로 정권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유신체제로 억지로 정권을 연장하려 하다 보니 코리아게이트라는 '억지 로비' 행위가 뒤따르고 이것이 최소한의 법치질서가 확립돼 있는 미국땅에서 저질러지다 보니 박 정권이 된서리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을 무시하고 코리아게이트에 대해 교묘한 논리로 이러쿵저러쿵 합리화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사실 박정희는 김동조 주미대사가 의회를, 박동선이 민주당을, 김한조가 공화당을 맡아 돈봉투로 로비를 한다니까 상당히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종자들의 주장대로 그가 자신의 정권안보가 아니라 국가안보를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막으려 했다면 박정희는 닉슨은 물론 카터 행정부가 어떤 이유로 주한미군을 철수하려 했는지를 똑똑히 알아야 했다.
닉슨 행정부 당시 월남전이란 수렁에 빠져 있던 미국이 염려한 것은 박정희의 장기 독재와 인권유린,부정부패였다. 만일 이에 항거해 한국민들이 봉기라도 일으키게 된다면, 혹은 내부 저항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박 정권이 내부문제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북한을 선제공격하는 식으로 국지전이라도 일으킨다면 주한미군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한반도에서 내정에 휘말리게 되고, 그것은 제2의 월남과 같은 쓰레기통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미국 정가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의 여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막고자 했다면 박정희는 유신 독재를 중단하고 스스로 물러나 한국에 민주주의를 확대시켜야 했다.
그러나 온 세계가 냉전에서 벗어나 데탕트로 나아가고, 진보주의의 흐름에 합류하던 시기에 박정희 홀로 유신체제라는 독재정치를 더욱 강화했고, 온 세계가 군축으로 가던 시기에 홀로 자주국방의 깃발을 들고 군비확장 노선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주미대사는 물론 박동선, 김한조 같은 사기꾼들에게 돈봉투를 돌려 이를 비판하는 미국 의회를 매수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보고자 했다.
최근 [월간조선] 조갑제로 대표되는 박정희교 신도들은 '미국과 맞선 박정희의 민족주이'라는 미화 논리를 새로 개발한 듯하다. 이야말로 도대체 형평성도 인과관계도 맞지 않는 비이성적인 얘기다. 박정희가 핵 개발로 미국에 맞서다 희생된 민족주의자라면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김일성은 어떤가? 또 인공위성 발사로 미국과 맞서고 있는 김정일은?
그토록 민족주의자라는 박정희는 왜 자신이 직접 주재한 청와대회의에서 주한미군 철수 저지와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대미 로비를 진두지휘했던 것일까. 박정희의 자주국방 옹호론자들은 이 점을 설명해야 한다.
박정희가 대미 로비에 나선 발단은 주한미군 철수 저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독재와 인권탄압을 옹호해 줄 미국 국회의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을 매수해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미국으로부터 보장받고자 했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을 우려한 미국이 이를 보장해 주지 않자 그는 도리 없이 미국에 맞서기 시작했고 핵 개발을 강행한 것이다.
박정희교 신도들이 펼치는 논리를 보면 오로지 박을 미화하려는 목적 외에는 어떤 가치판단 기준도 원칙도 없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허점이다.
박정희가 워싱턴 정가에 뿌린 돈, 그리고 그를 등쳐먹은 김한조, 박동선이 워싱턴의 금발 미녀들에게 뿌린 돈들은, 저녁밥을 짓기 위해 국제유가보다 30%나 비싼 석유 한 통을 사려고 달동네의 산비탈을 수없이 오르내려야 했던 한국 여인네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너문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잊어가고 있다.
제 1장 망명 중앙정보부원 김상근의 증언
"30만 불 돈뭉치 김한조에게 주면서 점심 굶는 한국아이들 생각했다"
76년 11월부터 78년 10월까지 거의 2년에 걸쳐 미국 의회의 상.하원 윤리위원회와 프레이저소위원회는 '코리아게이트'에 관한 청문회를 열고 수백 명의 증인을 출석시켜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박정희-양두원(중앙정보부 기획실장) - 김한조로 이어지는 미국 국회의원 매수 작전에서 양두원과 김한조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주미 한국대사관 주재 중앙정보부 참사관 김상근의 청문회 증언을 그대로 소개한다. 김상근은 박 정권이 워싱턴 정가에 어떤 방법으로 비자금을 뿌렸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증언이 청문회 세 곳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중복되는 부분은 생략했다. 주미대사관 장학관 강경구와 부공보관 임기서의 증언 일부를 함께 소개한다.
[77년 10월 10일 김상근의 하원 윤리위원회 증언]
"서울에 가면 당분간 감옥에 갈 것"
Q: 당신은 현재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A: FBI의 보호 하에 워싱턴 근교에서 살고 있습니다.
Q: 미국에 망명한 후로 수입원이 있습니까?
A: 미국 정부로부터 한 달에 9백 10불씩 받고 있습니다. 아울러 특별 영어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Q: 학교는 어디를 졸업했습니까?
A: 한국의 서울대학교 중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Q: 언제 공무원이 되었습니까?
A: 61년 7월부터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일했습니다.
Q: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처음 한 일은 무엇입니까?
A: 국가안보 부문의 연구직으로 3년 반 동안 일했습니다.
Q: 그 다음에는 어느 부서에서 일했습니까?
A: 대외문제 부분으로 옮겨 일했습니다.
Q: 그 다음에는요?
A: 66년부터 67년까지 중앙정보부장 비서직에 있었습니다.
Q: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누구였습니까?
A: 김형욱 씨였습니다.
Q: 미국에는 언제 왔습니까?
A: 70년 10월 30일 김동조 주미대사 때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에 1등서기관으로 부임했는데 76년
3월 31일 참사관으로 진급했습니다.
Q: 중앙정보부 계통으로 당신의 상관은 누구였습니까?
A: 71년까지는 윤승국 중앙정보부 공사였고, 그 다음이 김윤호 공사, 그리고 이상호 공사였습니다.
Q: 이상호의 본명은 양두원입니까?
A: 네, 그렇습니다. 74년 1월까지 양두원이 있었고, 그 다음에 김영환 공사가 왔습니다.
Q: 미국에 망명한 것이 언제입니까? 동기는 무엇입니까?
A: 76년 11월 26일입니다. 76년 10월부터 함병춘 대사가 이
문제(코리아게이트)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함병춘 대사는 박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두원, 김상근에게 모든 책임을 씌워 해임해야 한다"고 보고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Q: 누가 그 얘기를 했습니까?
A: 김영환 공사입니다.
Q: 그는 함대사와 뜻을 같이한 것입니까?
A: 그들이 회의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Q: 그런 결론을 낸 회의에는 누가 참석했습니까?
A: 서울에서 유혁인 정무비서관이 와서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 함 대사가 "양두원이 서울에서, 김 참사관이 워싱턴에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Q: 코리아스캔들이 연일 신문에 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입니까?
A: 그렇습니다. 김영환 공사가 말하기를 "함 대사가 박 대통령에게 그렇게 보고했고, 나도 신직수 중정부장에게 그렇게 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보고했다"고 말했습니다.
Q: 11월 초순에 김영환 공사가 당신에게 "서울에 가면 당분간 감옥에 갈것"이라고 얘기했습니까?
A: 그렇습니다. 김영환 공사는
"당신과 양두원 차원에서 끝을 내야지 그 이상 차원으로 불이 붙으면 곤란하다. 그러니 한 1년은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Q: 그 이후 FBI에 협조하기로 결심했습니까?
A: 네
Q: 김한조를 압니까?
A: 네 압니다.
Q: 제일 처음 만난 때는?
A: 72년 가을 입니다.
Q: 어디서 만났습니까?
A: 이상호 공사 사무실에서 만나서 소개를 받았습니다.
Q: 그 후에 다시 만났습니까?
A: 73년 미주 총영사회의가 워싱턴에서 열렸을 때 김동조 대사관저에서 디너파티가 있었는데 그 때 한국교포 몇 사람과 함께 김한조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Q: 그 후 74년 8월 말경 김한조와 다시 만났습니까?
A: 네. 김한조가 내게 전화를 해서 "내가 8.15행사 때 한국에 갔다
왔는데 불행히도 육여사가 저격당했다. 이제부터 당신과 중요한 임무를 같이 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당신을 암호명으로 김 교수라고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집을 방문해 달라고 하면서 위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후 9월 3일경 양두원 장군으로부터 그 일에 대한 자필 편지를 받고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Q: (청문회장에 제시된 증거자료 중 일련번호 '1번'이 붙은 문서를 가리키며) 이게 그 편지 맞습니까?
A: 네.
Q: 내용은?
"김한조는 해밀턴, 중정부장은 도지사, 대통령은 불국사 주지"
A: "워싱턴에서 '백설작전'을 시작한다. 극도로 보안을 지켜야 할 문제이니 당신은 아무도 알지 못하게 김한조와 이 일을 집행하고 당신과 나는 외교행낭으로 접촉한다. 보안을 위해 김한조는 닥터 해밀턴, 당신은 김교수, 나는 가톨릭 신부, 중정부장은 도지사, 대통령은 불국사 주지라는 암호로 부르기로 한다. 서울에 전화할 때도 암호로 이야기 하도록 할 것이며, 당신이 하는 일을 절대 김영환 공사도 알지 못하게 해라. 우선 미국 내의 반정부 인사들의 동향을 모니터해서 수시로 김한조에게 제공하도록 하라. 그러면 김한조가 그들을 해결해 줄 것이다."
Q: 74년 9월에 김한조를 방문했습니까?
A: 네. 9월 4일과 6일로 기억합니다. 김한조는 자기가 어째서 이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는지를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자기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육여사에게 "나는 미국에서 성공해 백만장자가 된 지금 국가에 공헌하고 싶다. 나는 정치가도 아니고 사업가다. 미국에서 나의 협조가 필요하다면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 나의 진실한 심정을 알아 달라"고 얘기했었다며 "비록 육여사가 죽었지만 그에게 약속했던 얘기를 실천하고 싶어서 백설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가 협조해서 할 일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물었는데 그는 "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한국에서 편지 받은 것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얼마 후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김학진이라는 한국 중앙정보부 본부요원인데 당시에는 총무국장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미국에 출장 가는데 비행장에 나올 것은 없고 당신 집을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때 맥클리 버지니아 도울리 메디슨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김학진이 실제로 저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Q: 김학진은 언제 무슨 일로 왔습니까?
A: 74년 9월 11일입니다. 그는 양두원의 지시에 따라 미국에 왔습니다. 그는 양두원이
제게 보내는 편지를 가져왔는데 저는 그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가 망명 후에 FBI에 주었습니다.
Q: 그 때 양의 직위는?
A: 한국 중앙정보부 기획실장입니다.
Q: 김학진이 가져온 양두원의 편지가 여기에 전시된 2번 문서가 맞습니까?
A: 네
Q: 편지를 읽겠습니다. "이것은 극비임. 가톨릭 신부가 김 교수에게. 당신이 굉장히 공부에 열중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지사가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총무국장으로부터 25만 6천 달러를 받을 것인데 그 돈과 당신 구좌에 들어가 있는 10만 달러를 합쳐 30만 달러는 해밀턴 박사에게 , 5만 6천 달러는 한광년(워싱턴 교포로 친박정희 교포신문인[한국신문] 발행인)에게 별도로 빨리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으시오. 우리가 그것을 불국사 주지에게 보고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건강 건투를 빌고 나의 안부를 해밀턴 박사에게 전해 주시오. 가톨릭 신부. 이 편지 읽고 태우시오." ..... 그 다음에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A: 김학진에게서 얇은 갈색 종이에 싸인 돈뭉치 25개와 6천 불을 받았습니다. 한 뭉치가 1백 불짜리로 1만 불이었는데 세어 보지 않고 뭉치 수만 확인했습니다. 김학진이 영수증을 써 달라고 해서 써 주고 다음날이 9월 12일 김한조에게 30만 불을 전달했습니다. 편지에 쓴 대로 내 구좌에서 4만 4천 불을 빼서 대사관에 들러 30분가 앉아 있다가 그 돈을 우리 집으로 가져가서 김학진에게 받은 돈과 합쳐 30만 불로 만들어서 종이에 싸들고 김한조의 집으로 갔습니다.
김한조에게 현금 30만 불 전달
Q: 김한조가 뭐라고 했습니까?
A: 내가 김한조에게 돈을 전달하자 그는 "이건 큰돈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이것은 정말 큰돈입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애들이 점심밥도 목 먹슨 실정 아닙니까? 라고 얘기 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난 후 김상근은 감정이 격해져 잠시 동안 증언을 계속하지 못했다. -필자주) 그 후 김한조가 돈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부인이 방에 들어왔다가 그 많은 돈이 방에 펼쳐져 있고, 남편이 그것을 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한조는 부인에게 "이 돈은 모두 보내 줄 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김한조는 자기가 각 신문에 기고한 글과 자신이 사업가로서 성공한 과정을 담은 성공담 기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랑 섞인 얘기로 "앞으로 이 일과 관련해서 더 많은 돈이 올것이다. 서울에 얘기했는데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1백만 불이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Q: 그 임무가 어떤 것인지 김한조가 얘기했습니까?
A: 상세한 임무에 대해서는 김한조가 서울에서 얘기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는데 김한조가 "이 돈을 쓰면서 나는 의회활동을 더 활발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Q: 이 청문회에서 관련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감안해 답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날 당신이 30만 달러를 김한조에게 전달하면서 "그 돈을 어느 국회의원에게 주느냐?"고 물어 봤습니까?
A: 김한조는 자기의 오랜 친구라는 한 국회의원의 이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Q: 김한조는 그 날 받은 돈으로 그 사람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 하겠다고 얘기 했습니까?
A: 자신이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을 통해 더 많은 국회의원과 친해지게 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Q: 그런 정도의 돈을 주면서 그 돈을 받을 국회의원들의 상세한 이름을 질문하지 않았습니까?
A: 네. 그런 지시가 없었습니다.
Q: 30만 달러를 주고 영수증을 받았습니까?
A: 네. 지시에 따라 받았습니다.
Q: 영수증은 몇 일자입니까?
A: 74년 9월 9일자입니다.
Q: 그 영수증이 여기 전시되어 있는 자료중 3번 문서가 맞습니까?
A: 그렇습니다. 그것이 감한조의 필적으로 된 영수증입니다.
Q: 그것을 김한조가 당신 앞에서 썼습니까?
A: 그렇습니다.
Q: 위원장, 내가 영수증을 읽겠습니다. "영수증. 74년 9월 11일 오후 8시 나는 내집에서 30만 불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합니다." 그런데 당신 구좌에 있던 10만 달러는 어디에서 난 것입니까?
A: 그 전에 양두원 장군이 박동선에게서 받아 외교행낭 편으로 보내 왔습니다. 그 돈은 수표로 왔습니다.(그 수표도 청문회장에 게시되어 있었슴-필자주) 그 때 동봉한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줄 안다. 동봉한 수표를 받으면 당신 구좌에 넣었다가 나중에 전달하라는 데에 보태 쓰시오. 하느님의 은총을. 가톨릭 신부. 이 편지 불태우시오." 그 돈은 9월 7일 제 구좌에 입금했습니다.
Q: 박동선은 왜 10만 불을 양두원에게 주었습니까?
A: 저는 모릅니다.
Q: 한광년에게 5만 6천불을 갖다 주었습니까?
A: 네.
Q: 그는 누구입니까?
A: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친정부 교포 신문인 [한국신문] 발행인입니다.
Q: 양두원은 왜 그 돈을 한광년에게 준 것입니까?
A: 나는 모릅니다.
Q: 김한조에게 30만 불을 전달한 후에도 한국 중앙정보부로 부터 계속 지시가 있었습니까?
A: 외교행낭으로 계속 지시서가 왔습니다.
Q: (전시된 증거자료를 가리키며) 일련번호 8번 문서는 언제 받은 것입니까?
A: 74년 5월 초순입니다.
Q: 이 문서에서 '차성부로부터'라고 씌어 있는데 그는 누구입니까?
A: 양두원 장군의 비서실장입니다.
Q: (전시된 증거자료 중 하나를 가리키며)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습니다. "해밀턴이 요청하는 중요한 자료를 외교행낭 편으로 보냈다. 불국사 주지계서 전력을 다하는 프로젝트니까 철저히 수행해서 성과가 있기를 바라면서. 가톨리 신부" 이것을 설명해 주시오.
A: 그 문서는 74년 10월 10일 오후 8시 30분 양두원 장군으로부터 전화로 받은 내용을 메모한 것입니다.
[77년 10월 20일 하원 윤리위원회 청문회(위원장 존J.플린트)]
증인: 김상근 (전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참사관, 76년 11월 미국에 망명)
심문자: 포튜인(Fortuin) 특별검사
통역 안홍균
(플리트 위원장은 개회선언과 증인과 통역의 선서가 끝난 후 카메라 사용 금지를 요청했다. 청문회장 증인석 앞에는 이른바 '백설작전'과 관련된 증거자료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두벌의 옷'은 20만 달러를 의미"
Q: 74년 10월 23일 무슨 일로 김한조를 만났습니까?
A: 저는 그 날 김한조의 집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김한조는 그때 저에게
"서울에서 옷 두벌이 나에게 올 것이 있는데 혹시 서울에서 전화가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옷'이란 돈을 의미합니다.
Q: '두벌의 옷'은 얼마를 뜻합니까?
A: 20만 달러입니다.
Q: '서울에서 전화 왔느냐"라는 것은 '중앙정보부의 양두원 장군에게서 전화가 왔느냐'라는 의미입니까?
A: 그렇습니다.
Q: 당신도 양두원과 통화했습니까?
A: 했습니다.
Q: 내용은?
A: 저는 김한조 집에서 그의 앞에서 양 장군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김한조와 양 장군이 먼저 통화했습니다. 그는 "내가 이 프로젝트를 굉장히 열심히 추진하고 있는데 옷 두벌이 지금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후 김한조가 수화기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 때 양장군이 저에게 세 가지 지시를 했는데 첫째는, 옷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남은 옷을 해밀턴 박사에게 주라. 둘째, 30일 이내에 해밀턴 박사가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보고해라. 셋째, 해밀턴 박사가 하고 있는 일이 절대 누설되지 않도록 확인해라"는 것이었습니다. 해밀턴 박사란 김한조를 의미합니다.
Q: 74년 11월 8일 박왕규와 대화했습니까?
A: 예.
Q: 박왕규는 박청일로 알려진 사람입니까? 74년 당시 그의 직위는 무엇입니까?
A: 맞습니다. 그는 양 장군의 보좌관이었습니다.
Q: 박왕규와는 언제 어디서 얘기했습니까?
A: 11월 8일 11시 30분경에 주미대사관에서 서울에 있는 그와 전화로 얘기했습니다.
Q: 그가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A: "11월 18일경 미 의회에서 의원들이 한국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이 사실을 해밀턴에게
전달해라. 만일 미 의회가 한국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압력을 가할 것 같으면 한국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돌리도록 해밀턴에게 전달해라'는 것이었습니다.
Q: 비판적 관점에서의 압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A: 미국 의회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삭감하는 방향으로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Q: 미 국회의원들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면 김한조가 하는 일은 그 말을 막는 것입니까?
A: 그렇습니다. 그 일도 김한조가 하는 일 중의 일부입니다.
Q: 당신이 김한조에게 전달한 '기록'이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A: 서울 양두원 장군이 보낸 미국 내 반정부 인사들의 명단인데
서울에서 우리 대사관에 보낸 외교행낭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시에 따라 김한조에게 전달했습니다.
Q: 김한조는 그 명단을 가지고 무었을 했습니까?
A: 김한조가 8월에 서울에 갔을 때 그들 사이에 무슨 약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한조는 "반정부 인사들의 명단을 주면 서울에서 얘기한 대로 내가 모두 조사해서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Q: 그 명단에 수록된 인사들은 한국인들입니까? 미국 시민들입니까? 모두 몇 명입니까?
A: 한국인도 있고 영주권자도 있습니다. 모두 7~8명 정도 되었습니다.
Q: 김한조가 그 명단을 받아 어떻게 처리했다고 서울에 보고했습니까?
A: 보고서를 낸 것으로 압니다. 그 명단에 든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국회의원 또는 백악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문제 외에도 김한조는 서울에 보고서를 자주 보냈습니다. 미국 의회의 활동상황이라든가, 유신에 대한 미국언론들의 보도 태도, 학계동향 등은 물론이고 자기 집에 누구를 초청 했다든가 [뉴욕타임스]나 [워싱턴 스타] 독자란에 기고문이 실린 것 등등이 주요 보고사항 이었습니다.
Q: 74년 1월 23일 김한조를 만났을 때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A: 김한조는 나에게 "백설작전을 위해 내 돈 70만 달러를
썼다. 이 돈을 받아야겠는데 혹시 나에게 돈이 온 것이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한국에서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을 때였는데 김한조는 "한국의 국민 투표를 지지하는 특별성명서 같은 것을 미국 국회의원들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국회의원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받은 영수증이라면서 1백 20달러짜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영수증 사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한국에 보고했습니다.
Q: 영수증은 어디에서 받은 것입니까?
A: 워싱턴의 산스시라는 레스토랑에서 발행한 것입니다.
Q: 75년 3월 31일(날짜 확인) 김한조를 다시 만났습니까?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A: 김한조의 집에서 만났는데 그는
지난번과 같은 얘기를 되풀이 했습니다. "나는 백설작전을 위해 내 돈을 60~70만 불을 썼다. 우리집에 텔렉스까지 갖다 놓아서 상당한 돈이 든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별로 감사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다. 이전까지는 백설작전을 위해 시간을 쪼개 일했는데 이제는 이 일이 나의 전업이 되었다. 나는 시간당 10~12불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등의 얘기를 늘어놓았습니다.
Q: 김한조가 텔렉스를 어디다 설치했는지 봤습니까?
A: 자기 집 차고 옆방에 텔렉스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Q: 김한조는 주로 누구와 텔렉스 교신을 합니까?
A: 서울 양두원 장군 사무실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Q: 당신이 박동선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A: 71년 초쯤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대사관에 있는 임규일 대령의 소개로 내가
박동선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Q: 임규일은 그 때 무슨 일을 맡고 있었습니까?
A: 한국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주로 미 국방성 관리들을 접촉하는 일을 했고, 두
번째로는 의회담당을 했습니다.
Q: 의회담당이란 의회와의 연락관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까?
A: 연락관 역할보다는 의회 모니터 활동이 주요한 임무입니다.
Q: 임대령이 왜 당신에게 박동선을 소개했습니까?
: 나는 그 때 워싱턴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들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임대령이 나를 박동선의 집에 데려갔는데 처음에 유재신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맞았고, 그 다음에 박동선과 만났습니다.
Q: 박동선이 의회로비를 하는 데서 한국 중앙정보부 워싱턴 지부에서는 주로 임대령이 지원사업을 한 것입니까?
A: 예 그렇습니다. 김한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중략>
Q: 김한조가 거래하고 있다는 미국 국회의원 중 한 사람이라도 이름을 밝힐 수 있습니까?
A: 김한조는 걸핏하면 "미국 의회에 나의 전위대가 있다"라는 소리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전위대에 속해 있다는 국회의언 이름은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김한조가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과 잘 통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Q: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라면 어느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입니까?
A: 포드입니다.
Q: 포드의 특보는 한 사람밖에 없는데.(그 때 사회자가 '그 부부는 비공개 사항'이라면서 질문을 가로막음.)
Q: 김한조의 '전위대'가 속한 정당 이름은?
A: 미국 공화당입니다.
Q: 전위대 멤버는 몇명입니까?
A: 김한조가 말하기를 모두 5명이라고 했습니다.
"박동선은 건달이고 내가 진짜 로비를 한다."
Q: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박동선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김한조에게 들은 일이 있습니까?
A: 있습니다. 김한조는 "박동선은 의회
로비를 한다면서 건달같이 왔다갔다하면서 중앙정보부 양두원 실장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 박동선 뒤를 캐려고 12명의 기자들이
쫓아다닌다. 박동선은 건달이고 내가 진짜 로비를 한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습니다.
Q: 75년 4월 25일 김한조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A: "돈에 대해서 전화로는 얘기 못 하겠으니 우리 집에 오라"고
해서 다음날인 4월 21일 김한조의 집에 갔습니다. 김한조는 "지난 1월에 한국에 갔을 때 내 돈 2만 8천불을 썼다. 이 문제에 대해
양두원에게 편지를 쓰겠으니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날이 4월 22일 편지 때문에 다시 그의 집에 갔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전화가 와서 4월 26일 김한조의 집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김한조는 "내가 양두원 장군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고 그가 나에게 전화했을 때도 같은 얘기를 했다"면서 돈 얘기를 되풀이했습니다. 저는 그 날 저녁 11시 15분쯤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니 김한조가 다시 전화를 했는데 "방금 양 장군과 통화했다. 75년 1월 건에 대한 옷보따리를 보내오는 일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양 장군이 못 알아듣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Q: 옷은 돈을 뜻합니까?
A: 그렇습니다.
Q: 5월 초에 김한조가 또 한국에 갔습니까?
A: 그렇습니다.
Q: 돌아온 후 김한조와 대화했습니까?
A: 그렇습니다. 돌아온 후 김한조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 서울에서 온다"라고 말했습니다.
Q: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란 무엇입니까?
A: 김한조가 제게 말하지는 않았고, 혼자서 "백설작전에 필요한 자금.."이라며
중얼거렸습니다. 그 후 김한조가 "첫 번째 물건이 왔느냐"고 묻기에 나는 "못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Q: 그 대화 후에 서울 중앙정보부로부터 추가로 돈을 보내는 문제에 대해 연락이 있었습니까?
A: 있었습니다.
Q: (게시되어 있는 증거 자료들을 가리키며) 여기 전시된 문서중 어느 것이 그 때 추가로 돈을 보낸다는 메시지를 담은
문서입니까?
A: (게시되어 있는 문서 중 하나를 가리키며) 여기 10개의 문서는 모두 내가 서울과 연락한 문서 중 일부인데. 겉봉에
'극비' '김상근 서기관에게' 뒷면에 '한국중앙정보부 75년 6월 3일'이라고 씌어 있는 두 통의 편지가 물으신 문서입니다. 한 통에는 편지가. 한 통에는 30만 달러짜리 수표와 7,563 달러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고 (확인)다른 한 통에는 편지가 들어 있습니다. 편지에는 "수고가 많다. 이 편지를 받은 즉시 나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함께 보낸 물건은 지체 없이 해밀턴 박사에게 전달해 주기 바란다. 만약 물건이 도착하지 않았으면 빨리 연락 주기 바란다. 건투를 빈다. 박왕규"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박왕규는 양두원의 보좌관입니다."
Q: 그 돈을 어떻게 했습니까?
A: 지시대로 김한조에게 전달했습니다.
Q: 그 시기에 서울로부터 추가로 현금이나 수표를 받은 것이 있습니까?
A: 있습니다.
Q: 그러면 전시된 자료 중 어느 것이 관련 문서입니까?
A: 11번(전시된 자료는 모두 일련번호가 붙어 있었슴) 입니다. 11번은
6월 말쯤에 받은 편지입니다. 편지 안에는 박동선 이름으로 된 세 장의 수표가 들어 있습니다. 편지에는 "당신이 고충이 많은 줄 안다. 이 임무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모든 결과가 좋게 나타나면 나는 특히 당신에게 보답할 것이다. 여기 동봉하는 세 장의 수표를 은행에 예치하고 보안에 조심하라. 이 편지는 읽고 난 후 불태우라. 양두원"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Q: 당신은 지시대로 수표를 은행에 예치했습니까?
A: 세 장의 수표를 라그스 내셔널 뱅크에 있는 나의 개인구좌에 입금 시켰습니다.
Q: 은행 기록에 의하면 당신은 당시 수표 3장을 모두 다른 날짜에 입금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40만 불을 찾았는데 그 돈을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A: 최제영이라는 워싱턴에 사는 한국교포에게 주었습니다.
Q: 최제영은 '뉴욕상사'의 사장입니까?
A: 그렇습니다.
Q: 그 돈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A: 나는 전혀 모릅니다.
Q: 전시번호 14번의 이 40만 불짜리 영수증은 최제영에게 받은 것입니까?
A: 그렇습니다.
Q: 김한조는 8월에 또 한국에 갔습니까?
A: 그렇습니다.
Q: 갔다와서 그가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A: "나는 8월 한국 방문 때 내 돈 10만 달러를 썼다. 물론 나는 억만장자니까 그
정도 쓰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양두원을 만났을 때도 "왜 백설작전에 내 돈을 써야 하나? 여기에는 정부자금이 나와야 되는 것 아닌가. 두 번째로 받은 30만 달로도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다 뿌렸다"고 얘기했다고 나에게 전했습니다.
Q: 국회의원 누구누구에게 돈을 뿌렸다고 얘기했습니까?
A: 이름은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Q: '백설작전'에 대해 묻겠습니다. 당신이 백설 작전에 대해 최초로 들은 게 언제입니까?
A: 나는 74년 8~9월 경에
김한조로부터 그 얘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그 뒤에 박왕규(양두원의 보좌관)로 부터 편지가 와서 자세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Q: 그 편지로 지시받은 것을 얘기해 보시오.
A: 한국의 이익을 위해 김한조가 박동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광범위한 범위의 미국 저명인사들과 접촉할 것인데 앞으로는 박동선보다는 김한조를 접촉하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오후에 속개>
"중정이 지목한 반정부 인사 1호는 문명자 여사"
Q: 백설 작전에 대한 질문에 들어가기 전에 당신이 이야기 한 것에 대해 몇 가지 추가로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 몇 가지 추가로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이 양두원으로부터 받아 김한조에게 전달했다는 반정부인사 명단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을 밝혀 주십시오.
A: 첫째로 문명자 여사...
Q: 쥬리 문으로 알려진 그사람 말입니까?
A: 네
Q: 그 밖에 누가 있습니까?
A: 워싱턴 교포인 정기용, 장성남씨, 한민통 사무총장인 이건팔씨, 김대중 씨의 처남인 이성호 씨 등이 있습니다.
Q: 김대중 씨가 누구입니까?
A: 박 대통령의 반대파인 야당 정치인입니다.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습니다.
Q: 당신이 박동선에게서 나온 40만 불을 최재영에게 전달했다고 했는데 최가 운영하는 회사이름이 무엇입니까?
A: 유나이티드 영
컴퍼니(United Young Co.)입니다.
Q: 그 회사는 한국중앙정보부와 연결된 주요 정보 제공자입니까?
A: 그렇습니다. 70년대 후반 박청일(박왕규의 가명)이 워싱턴에
있을 때 이 회사로부터 여러가지 정보와 자료들을 공급받았습니다.
Q: 그러면 최쟁영이 40만 불을 어디에 썼는지 모릅니까?
A: 나는 모릅니다.
Q: 박동선의 활동과 관련해서 당신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A: 박동선으로부터 업무내용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 외교행낭편으로 서울에 보냈습니다. 거기에는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든지 국회의사록에 박 대통령을 칭찬하는 발언이 실렸다든지 하는 내용이 씌어 있었습니다.
Q: 거기에 국회의원 이름은 없었습니까?
A: 서울로부터의 마지막 지시서에 박과 관련을 맺고 있는 국회의원 명단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Q: 몇 사람쯤 됩니까?
A: 거기에는 국회의원뿐 아니라 미국 저명인사의 이름도 있었는데 모두 40~50명 정도 되었습니다.
Q: 박동선에게도 백설작전의 지시를 전달했습니까?
A: 서울에서 온 원본을 복사해 사본을 박의 집에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Q: 박은 서울과 텔렉스로 교신했습니까?
A: 그가 직접 하지 않고 이봉양이라는 박의 고용인이 텔렉스를 사용했습니다.
Q: 76년 4월 백설작전에 관해서 이봉양이 텔렉스를 받은 것이 있습니까?
A: 본국에서 지시가 왔다고 이봉양에게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Q: 그 지시가 한국 중앙정보부 본부에서 온 것이 맞습니까?
A: 그렇습니다.
Q: 그 때 이봉양이 받은 지시 내용은 무엇입니까?
A: "당분간 빙산작전에 대한 지시를 중단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Q: 75년 8월 중순(어느해인지 확인) 경에 김한조 이외의 중앙정보부 에이전트에 관한 연락은 없었습니까?
A: 있었습니다. 8월
말경 김한조가 나에게 전화해서 "나는 대단히 실망했다. 한국중앙정보부가 나 이외의 딴사람을 돕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하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를 만났더니 "한국정부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해 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를 추천한 사람은 함병춘 주미대사"라고 말했습니다.
Q: 함병춘 대사가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입니까?
A: 김한조가 말하기를 "내 전위대 중 한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서울
정부 측은 나를 통하지 않고 내 전위대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함병춘 대사가 얘기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한국정부 내에서는 "김한조가 자꾸 돈을 내라고 하는 게 김한조를 통하지 말고 현지 대사가 국회의원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 어떠냐"라는 말도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듣고 김한조가 노발대발한 것입니다. 또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김한조 외의 다른 에이전트를 통해 국회의원들과 연결을 시도한 예도 있습니다.
Q: 함병춘 대사가 직접 국회의원들을 접촉한다는 내용의 얘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까?
A: 저도 국회의원들과 접촉하는 다른 길을 모색 했었습니다.
Q: 왜 그랬습니까?
A: 김한조는 "국회의원들과 한 번 접촉하는데 2만 불이 든다. 경쟁자가 있기 때문에 그 이하는 안 된다"는
식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그를 통해 백설작전을 계속하는 데 흥미를 잃은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Q: 김한조가 몇 명의 국회의원들에게 2만 불씩을 뿌렸다는 말입니까?
A: 거기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습니다.
Q: 김한조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A: 76년 7월 입니다.
Q: 박동선은?
A: 76년 9월 초순에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77년 10월 20일 하원 윤리위원회 의원들의 보충질문]
-퀼렌 의원: 당신이 망명하려고 최종 결심한 것이 언제입니까?
-김상근: 76년 11월 23일 밤입니다.
-퀼렌 의원: 특별히 그 날 행동을 개시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상근: 그 날 겪은 몇 가지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어제 증언했던 망명 동기에서 빠뜨린 부분을 하나 추가하겠습니다. 76년 3월 내가 서울에 갔을 때 윤승국 전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를 만났는데 그가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도대체 미국에서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 너는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거냐"라고 힐난해서 당혹했던 일이 있습니다. 코리아게이트 관련 보도가 시작되고 난 후 한병기 유엔주재 부대사가 서울에 갔다 왔는데 김영환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가 뉴욕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한대사가 "신직수 부장이 양두원 실장에게 '나도 모르게 그따위 작전을 하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하고 대단히 책망했다"는 말을 하더라고 했습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구나' 하던 차에 11월 23일 [뉴욕타임스]에 "양두원 장군과 김상근이 이 사건에 대한 인책으로 해임됐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최제영을 만나 "나는 지금 수사를 당하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얘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한국 중앙정보부의 해외담당 미주국장으로부터 국제전화가 왔습니다. 그가 내게 "당신 최제영을 만났나?" 하고 묻기에 "지금 만나고 돌아왔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내용을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그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한국대사관 통신과에 있는 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앞으로 본국에 보고할 때 통신과를 통하지 말고 당신이 알아서 메시지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아랫사람인데 나에게 말하는 투가 전과 달리 대단히 냉담하고 무례했습니다.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나는 모르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뭔가를 많이 알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진짜로 그만둬야 할 때구나'라는 느낌이 들어 최종적으로 망명 결심을 한 것입니다.
-퀼렌 의원: 양두원은 당신에게 굉장히 많은 지시서를 보내면서 그것을 불태우라고 계속 지시 했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것을 보관하고 있었습니까?
-김상근: 양두원 장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긴 했지만 지시 내용중 굉장히 무리한 것도 많고 심지어 지시 자체가 말이 안 돼 제 선에서 묵살한 것도 있습니다. 만일 앞으로 상황이 변화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저는 그 서류들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코크란 의원: 김한조가 추진한 백설작전이란 것은 미의회와 행정부에 박 정권에 대한 비판을 약화시키기 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를 통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삭감 등을 철회시키려고 한 것인가요?
-김상근: 네 그렇습니다. 김한조가 미국 의회, 정부, 백악관, 언론, 학계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한국 정부를 도울 수 있다고 너무 과장에서 말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 사람은 교포사회의 반정부인사들도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미국사회는 물론 한국 교포사회에서도 별 영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코크란 의원: 그런 사람이 자기 활동에 무려 70만 불을 썼다는 사실이 우습지 않습니까?
-김상근: 그렇습니다. 김한조는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뿌린다고 얘기했는데 미국 의회가 열려 있는 9월에는 한국에 가 있었고, 휴회가 돼 국회의원들이 모두 자기지역으로 돌아갔을 때에 워싱턴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 돈을 언제 어떻게 썼다는 것인지 저는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질문자: 특별검사 할츠(Mr. Hritz)
증인: 김상근
<하원 윤리위원회와 중복되는 내용은 생략>
"김한조는 늘 돈 얘기만 했다"
Q: 당신은 김상근 이외의 다른 이름은 없습니까?
A: 저의 본명은 김규진입니다.
Q: 백설작전에 대해 당신이 가진 모든 증거자료를 법무국에 제출했습니까? 그 속에 김한조가 친하다고 말한 의원 명단도 포함돼
있습니까?
A: 네.
Q: 그 의원들의 이름은?
A: 테니슨 가이어, 래리 윈, 벤델 자게트, 길만, 라고 마시너.
Q: 김한조가 말한 의회의 '전위대 그룹'에는 상원의원들도 들어 있습니까?
A: 아니오.
Q: 김한조가 당신에게 자신과 친분이 있다고 상원의원들의 이름도 얘기했습니까?
A: 네. 75년 초쯤에 프랭크 처치 의원과 오래
전부터 굉장히 잘 아는 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75년 말쯤에 테니슨 가이어와 자기, 그리고 세네타 맨스필드 상원의원, 테프트 상원의원 이 네사람이 찍은 사진을 저에게 슬쩍 보여 주었습니다.
Q: 맨스필드 의원과는 어느 정도 친하다고 했습니까?
A: 맨스필드와 좋은 관계라고 하면서 가이어를 통해 맨스필드를 알게 됐다고 얘기했습니다.
Q: 사진을 같이 찍었을 때말고 다른 때도 맨스필드를 만났다고 얘기 했습니까?
A: 아니오.
Q: 테프트 상원의원과 만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A: 아니오. 나는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김한조가 그들과 아는지도 몰랐습니다. 김한조가 "이 사진을 양장군에게 보내 주시오"라고 해서 사진 설명을 붙여서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Q: 그 사진을 서울에 보낸 목적은?
A: 김한조가 주는 것은 모두 서울 중앙정보부 본부에 보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김한조의 모든
활동에 대해 보고하라는 것이 양두원 장군의 지시였습니다.
Q: 김한조가 그 사진을 언제 찍었다는 얘기를 했습니까?
A: 아니오.
Q: 사진 찍은 장소가 상원의원 사무실인지 다른 어떤 모임인지 설명은 없었습니까?
A: 상원의원 사무실인 것 같습니다만, 어느
상원의원 사무실인지는 내가 가보지 않아서 모릅니다. 하여간 김한조의 사무실은 아닙니다.
Q: 김한조가 사진을 보내달라고 할 때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까?
A: 75년 1월 김한조가 서울에 갔었고, 8월에도 갔었는데 8월
방한 후에 그 사진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Q: 그 때 당신은 김한조의 활동에 대해 의심했습니까?
A: 네. 과연 김한조를 통해 백설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의심을 품었습니다.
Q: 다른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도 의심했습니까?
A: 76년 3월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양두원 장군도, 그의 보좌관 박왕규도
"김한조 가지고 될까?"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Q: 맨스필드, 테프트, 가이어 의원과 김한조가 찍은 사진이 미국 법무성에 있습니까?
A: 그건 모르겠습니다.
Q: 김한조가 처치, 맨스필드, 테프트 의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까?
A: 프랭크 처치 의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75년 4~5월경에 상원의 처치 위원회에서 한국문제와 관련해 걸프 사를 증인으로 한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이 때 김한조가 말하기를 "처치 의원이 '한국에 굉장히 불리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면서 나에게 걸프사에 관한 서류를 하나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김한조는 서류를 서너 페이지 넘긴 후 타이핑한 본문에 밑줄 친 부분을 저에게 보여 주면서 "여기가 한국에 굉장히 불리한 부분이었는데 내가 처치 의원에게 불리한 문구는 삭제하고 유리한 문구로 바꿔 달라고 부탁해서 다시 고쳐서 타이핑한 것이 바로 이부분이다"라고 했습니다.
Q: 김한조는 당신에게 처음에 불리하게 쓰여진 서류와 나중에 유리하게 고쳐진 서류 양쪽을 다 주었습니까?
A: 아니오, 고쳐쓴 서류만 주었습니다.
Q: 처음에 불리하게 쓰여진 문구에 대해서는 보여 주기만 했습니까?
A: 그 부분을 써 주었는데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그대로 서울로 보냈습니다.
Q: 김한조가 처치 의원에게 받았다는 서류는 처치 의원이 보도 자료로 쓴 것입니까 아니면 청문회의 공식 문서입니까?
A:
그건 모르겠습니다.
Q: 그 서류가 상원의 공식 서류용지에 씌어 있었습니까?
A: 그냥 흰 종이에 타이핑 된 문서였습니다.
Q: 분량은?
A: 7~8쪽 정도 되었습니다.
Q: 그 외에 김한조가 한 얘기는?
A: 김한조는 늘 돈얘기만 했습니다. 사진 보여 주고도 돈 얘기, 서류 보여 주고도 돈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만 했습니다. 돈만 많으면 처치 의원으로 하여금 한국을 더 돕게 할 수 있다고 했고, 앞으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강조했습니다.
Q: 처치 의원에게 돈을 얼마 주었다든지 앞으로 줄 것이라든지 하는 얘기는 없었습니까?
A: 김한조는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연막을 피우는 습관이 있는데 그렇다고 내가 꼬치꼬치 물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이번에 처치 의원이 도와줬다"는 말만 강조했습니다.
Q: "그가 도와줬다"는 얘기를 듣고 당신은 김한조가 그에게 돈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까?
A: 김한조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지만 제 육감으로는 김한조가 돈을 준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서울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야겠다는 욕심에서 계속 그런 얘기를 반복한 것 같습니다.
Q: 김한조의 활동내용을 보고하는 게 당신의 책임인데 그의 활동의 미심쩍은 점도 보고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A: 그가 상원의원을 만났다고 해도 저에게 장소, 시간을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진짜 자기 말대로 상원의원을 만났는지를 제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김한조가 하는 얘기를 그대로 본부에다 보고 할 뿐이고 판단은 본부에서 합니다. 그를 통제하고 평가하는 것은 양두원 장군입니다.
"서울이 백설작전에 흥미를 잃었다"
Q: 김한조가 당신에게 처치 의원을 같이 만나자는 얘기는 안했습니까?
A: 그 뒤로는 김한조가 양두원과 직접 왔다갔다해서 내가 관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한조가 "앞으로 처치 의원은 대통령이 될 사람이다. 내가 이 사람을 잘 아니 돈을 더 보내라"는 얘기는 했습니다.
Q: 김한조가 당신에게 "처치 의원을 마나는 것도 백설 작선의 일환"이라고 말했습니까?
A: 질문을 해도 자세한 대답을 안 하고
"이건 백설작전의 일환"이라고만 했습니다. 돈 문제가 있을 때마다 김한조는 서울에 가서 양두원과 쑥덕쑥덕 해서 일을 다 만들어놓고 워싱턴에 와서는 저에게 "양 장군과 얘기 됐다. 옷뭉치가 오지 않았느냐"라는 얘기만 했습니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 중앙정보부 본부 서울측에서도 "도대체 이자가 돈을 어디에 쓰는지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Q: 김한조는 처치 의원 외에 다른 상원의원이나 자신의 지지자들 중 누구에게 돈을 어떻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까?
A: 김한조는 돈 문제에 대해서 "모든 일은 서울에서 얘기됐다. 당신은 묻지말라"는 식이었습니다. 다만 75년 8월에 한국에 가서 미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10만 불을 썼다. 미국 기자 빅 골드(우익 칼럼니스트-필자주)에게 매년 5만 불씩 주고 있다는 얘기를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Q: 김한조 집에 텔렉스가 설치된 것을 보았습니까?
A: 75년 3월 31일 김한조네 지하실에 텔렉스 설치한 것을 처음으로 봤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양두원과 연락했는데 한국말로 텔렉스를 보낼 때는 내가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Q: 김한조와 양두원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텔렉스로 연락했습니까?
A: 75년 3월에서 76년 4,5월까지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Q: 텔렉스 외의 방법으로는 서울과 어떻게 연락했습니까?
A: 일주일에 한 번씩 외교행낭 편으로 지시서와 보고서를 주고받았고,
김한조나 제가 수시로 한국을 방문해 양두원 장군과 직접 대화 했습니다.
Q: 양두원이 김한조의 활동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A: 76년 3월 이후에는 활동이 상당히
저조했는데 제가 서울에 가서 "이 작전 기대할 것 없다"라고 양 장군에게 얘기했고, 김한조도 양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한조가 서울에 갔다 와서 "서울이 백설작전에 흥미를 잃었다. 이제 끝장이 아닌가"라는 얘기를 나에게 했습니다.
Q: 그러면 김한조가 "서울측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써서 이 일을 계속할 것 같다"라는 얘기는 안 했습니까?
A: 76년 8월
김한조가 서울에 갔다와서 "함병춘 대사가 이 일을 도맡아서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는데 나는 74년 초부터 함대사가 상당 부분 그런 활동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그 이후 김한조는 폐기 상태가 되었습니다.
Q: 백설작전은 언제까지 계속되었습니까?
A: 76년 8월에 중단 되었습니다.
Q: 이유는?
A: 미국 언론에 매일 코리아 스캔들이 터져 나오니까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Q: 함병춘이 김한조의 집을 방문한 것은 백설작전과 관련이 있습니까?
A: 아니오
Q: 함병춘은 백설작전에서 김한조가 맡은 역할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A: 아니오. 그러나 김한조가 서울에 가면 박 대통령도 만나고 하니까 미국대사로서 어느 정도는 눈치는 챘을 것입니다.
Q: 당신은 백설작전 기획서를 본 적이 있습니까?
A: 네.
Q: 김한조, 노진환, 한광년 세 사람이 서로 경쟁적으로 로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까?
A: 중앙일보 김영희 특파원이 중앙정보부 요원 박재범에게 그렇게 얘기한 것을 내가 전해 들은 일이 있습니다.
Q: 실제로 세 사람이 경쟁적으로 일했습니까?
A: 네. 김한조는 백설작전을 수행했고, 한광년은 중앙정보부 돈을 받아 신문을
발간했고, 노진환은 때때로 미국을 방문해 국회의원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같은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김한조도 "한광년은 한국 가면 돈 받는다"라고 얘기했습니다.
Q: 김한조가 국회의원뿐 아니라 언론계와도 접촉하니까 한광년의 활동과 비슷비슷한 것 아닙니까?
A: 김한조는 미국언론과 접촉하고 한광년은 교포사회 선전을 맡는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한국정부에 잘 보여서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는 점에서는 본질이 같습니다.
Q: 노진환에게서 그의 활동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습니까?
A: 노진환은 워싱턴에 올 때마다 "미 의회에 연락할 일이 있어서 왔다.
나는 강영훈 장군과 관계가 있고 강영훈은 양두원 장군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삼각관계로 연결된다"고 얘기했습니다.
Q: 당신이 양두원에게서 온 돈 40만 불을 전달한 최제영은 누구입니까?
A: 그는 재미교포로서 우리 대사관에 자주 와서 한국
중앙정보부에 여러가지 정보와 물건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그와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만났기 때문에 워싱턴에서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Q: 당신은 언제부터 양두원, 박동서, 김한조 등과 가깝게 연락했습니까?
A: 중앙일보 김영희 특파원이 김한조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썼을 때부터입니다. 양두원과 박동선은 그 전부터 친밀하 사이였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그런데 코리아 스캔들이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양두원이 나에게 "박동선, 김한조에 관한 김영희의 기사를 비롯해 모든 신문기사들을 중앙정보부 사무실에서 없애버리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박동선, 김한조와의 연락도 두절했습니다.
Q: 당신이 워싱턴에서 한국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있는 동안 미 CIA와도 관계를 가졌습니까?
A: 아니오.
Q: 당신은 박정수를 압니까?
A: 미국에서 공부한 박정수 말입니까?(박정수와 이범준 부부는 60년대 초반 부부가 같은 해에 워싱턴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함-필자주) 그의 부인 이범준은 유정회 국회의원인데 76년 박정수가 정일권의 특별보좌관으로 워싱턴에 왔을 때 도쿄 레스토랑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박정수가 때때로 워싱턴에 와서 미국 국회의원들과 접촉한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Q: 누가 당신에게 그런 얘기를 했습니까?
A: 대사관의 우리 동료들과 내 사무실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76년 노진환이 워싱턴에
왔을 때 "박정수가 워싱턴에 와 있다" 면서 "우리 집에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Q: 박정수가 어떤 국회의원들과 자주 연락한다고 들었습니까?
A: (오프 더 레코드)
Q: 당신은 과거에 박정희의 주치의 였다는 닥터 김신걸을 압니까?
A: 76년 여름에 김신걸 박사가 내 아이들을 봐준 적이 있습니다.
Q: 박정수와 김신걸의 관계를 압니까?
A: 아니오.
Q: 김신걸과 미국 국회의원들의 관계를 압니까?
A: 아니오.
[78년 6월 6일 김상근의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
<상.하원 윤리위원회와 중복되는 내용은 생략>
"라이샤워 교수 영향력 줄이려 하버드대에 1백만 불 기부"
78년 6월 강경구 주미대사관 장학관의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
(강경구는 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주미대사관직을 사직하고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하고 있었슴-필자주)
Q: 73년 한국대사관에서 하와이 대학교와 서미시간 대학교에 돈을 기부하는 문제를 논의했습니까?
A: 그렇습니다.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상(본명 양두원)가 주동이 돼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의 각 학교에 돈을 기부하자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Q: 당시 한국정부 내에서 서미시간 대학과 하와이 대학에 대한 기부무제를 책임지는 관료는 누구였습니까?
A: 민관식 문교부
장관입니다. 하와이 대학에 준 1백만 불도 문교부 장관이 결재해서 나온 돈을 내가 전달했습니다.
Q: 하와이 대학 서대숙 교수가 직접 관장하는 동서문화센터 한국학연구소에 그 돈을 준 것은 서 교수가 북한을 방문한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A: 네. 한국정부는 서 교수의 활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나도 하와이 대학에 가 봤는데 개발동상국가인 한국의 처지에서 1백만 불이란 큰 돈을 연구사업에 쓰라는 것도 아니고 동서문화센터 건물을 짓는데 쓰라고 준 것이 나로서는 달갑지 않았습니다.
Q: 한국정부는 하버드 대학에도 돈을 기부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까?
A: 그렇습니다. 하버드대에서 한국문제를 유리하게 다루게 하기 위해서 1백만 불을 기부하자고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돈을 낼 수 있나를 검토했는데 외환법이 까다로워서 한국정부가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부기구를 통하는 방식이 채택됐습니다.
Q: 한국무역협회 장학재단에서 하버드대에 돈을 기부하는 계획에 대해 들은 것은 언제입니까?
A: 74년 12월에서 75년 1월 초
사이로 기억합니다.
Q: 그 문제를 제기한 것은 함병춘 주미대사입니까?
A: 본국정부입니다. 나는 지시에 따라 계획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 무역협회에는 장학재단이 없었는데 이 계획을 위해 사후에 만들었습니다.
Q: 한국정부가 기부를 직접 지시했습니까?
A: 문교부 지시로 75년에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Q: 그 때 양윤세 경제공사와 함께 갔습니까?
A: 네
Q: 하버드 대학에 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A: 1백만 불을 기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알아보라는 지시에 따라 장차 돈의 사용 용도를 상의하러 갔습니다. 하버드대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미국 학생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했었는데 갔다와서 문교부 장관 앞으로 "1백만 불을 기부해서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장차 한국의 이미지가 좋아질 것"이라는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Q: 왜 하버드 대학이 선택되었습니까?
A: 한국정부는 하버드 대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버드에 돈을 기부하는 주요 목적은 당시 이 대학 라이샤워 교수가 코웬 교수의 반한적인 언론 기고문으로 반한 여론이 광범위하게 조성되고 있었는데 그들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이었습니다. 양윤세 공사도 보고서에 그렇게 썼을 것입니다.
Q: 양윤세는 라이샤워와 코웬이 한국에 비판적인 글을 쓴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A: 그 뿐 아니라 나를 포함해 모든 한국대사관 관리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Q: 돈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A: 나는 무역협회가 보냈는지 한국 중앙정보부가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Q: 75년 후반기에 조지워싱턴대 김영진 교수가 메리오트 키브리지 호텔에서 한국문제 관련 심포지엄을 열었는데 함병춘 대사가 김교수에게 수표로 2만 불을 준 사실을 압니까?
A: 네 김영진 교수는 한국정부와 깊은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떤 액수의 돈도 조달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압니다. 큰돈을 기부 받을 때는 김 교수가 본국으로부터 직접 받지, 함대사나 저를 통하지 않습니다.
Q: 그는 어떤 채널을 이용했을까요?
A: 어디에서 돈을 받는지 저는 모릅니다.
Q: 외무부에서 받습니까?
A: 그것도 가능합니다.
Q: 무역협회는?
A: 그것도 가능합니다.
Q: 한국중앙정보부는?
A: 그것도 물론입니다.
Q: 서미시간 대학의 앤드류 남 교수에게 돈을 주었습니까?
A: 1천불 이상 준 기억은 없습니다.
Q: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나서 당신과 남 교수 사이에 [뉴욕타임스]에 유신헌법 지지하는 글을 쓰라는 얘기가 있었습니까?
A: 네.
Q: 그 신문에서 유신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그레고리 헨더슨에게 답하는 형식으로 남교수가 편지를 썼습니까?
A: 네. 비판기사에 대한 반박문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남 박사는 내 말을 듣고 글을 쓰기는 썼는데 한국정부를 그다지 두둔하는 글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민주주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니까.
Q: 앤드류 남에게 그럴 때마다 돈을 얼마씩 주었습니까?
A: 7백 불에서 1천 불 사이입이다.
"유학생 중 데모 학생은 모두 본국에 보고"
Q: 워싱턴에서 한국정부에 반대하는 한국 학생들의 데모도 당신 소관입니까?
A: 네.
Q: 학생 데모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A: 내가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5년반 동안 열 번 정도 있었습니다.
Q: 데모가 일어나면 당신이 학생 데모 동향을 수집합니까?
A: 그런 것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담당합니다.
Q: 당신도 학생들의 동향을 수집해서 중앙정보부에 보고 했습니까?
A: 그들과 제가 상당히 협조적인 관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Q: 당신이 데모하는 학생들의 사진을 찍었습니까?
A: 아니오.
Q: 학생들을 데모 현장에서나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A: 데모하지 말라는 말은 안 했고 그런 짓은 좋지 않다고 동지적 입장에서 충고했습니다. 나는 학생회장 등 학생 지도자들과 가깝게 접촉했는데 그들에게 "미국법을 위반하는 일이나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Q: 데모하면 한국에 돌아가서 취직하기 힘들다고 얘기한 일이 있습니까?
A: 그런 일 없습니다.
Q: "데모가 친북이나 친공 행위로 비쳐지는 것을 조심해라. 그런 일에 대해서 미국FBI가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도 했습니까?
A: 네.
Q: 당시 한국 대사관이 한국학생회에 매년 1천 5백 불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계속 데모하면 지원금을 중단하겠다"라고 얘기
했습니까?
A: 네.
Q: 결국 당신은 학생들을 협박한 것이 아닙니까? 결코 우호적 충고라고 볼 수는 없는 얘기를 했는데요?
A: 우호적인 충고였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데모를 계속했지만 지원금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Q: 데모하면 한국에 가서 취직하지 못한다는 것은 공갈이 아닙니까?
A: 그렇게 강하게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Q: 유학생 중 데모한 학생에 대해서는 전부 당신이 보고하지 않았나요?
A: 네
Q: 한국문제연구소 강영훈씨를 압니까?
A: 네.
Q: 한국문제연구소에 재정 지원한 사람 명단 7페이지에 '민관식 문교부 장관' 과 '강경구'가 있는데 기억납니까?
A: 네.
Q: 거기에 당신이 총 3만 불을 기부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맞습니까?
A: 아닙니다. 강 장군이 우리 사무실에 와서 현금을 주면서
그에 상응한 수표를 써 달라고 해서 장학관이 쓰는 수표를 떼어 준 것입니다.
Q: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A: 강 장군은 한국에서 영향력이 있고 나와도 가깝습니다. 그 사람이 현금을 주면서 수표를 써 달라고 하는데 안 해 줄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금전적인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니까요.(중앙정보부에서 받은 현금을 돈세탁하기 위해 현금과 수표를 바꾼 것임-필자주)
Q: 강영훈이 그 돈이 어디서 났다는 얘기는 했나요?
A: 아니오.
임기서 전 주미 한국대사관 부공보관의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
(임기서 씨는 68년~69년 사이 주미 한국대사관 부공보관으로
일하다가 미국에 정착했음. 증언 당시는 미국시민이었음. 임 씨는 강영훈의 한국문제연구소 재정기부자 명단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었음.)
Q: 73년 3월 20일 강영훈의 한국문제연구소에 기금을 기부한 일이 있습니까?
A: 아니오.
Q: 한국대사관의 중앙정보부 참사관 최홍태가 당신에게 수표를 달라고 한 것은 사실입니까?
A: 네. 1만 불짜리를 써 주었습니다.
Q: 그건 개인수표였습니까?
A: 네.
Q: 최홍태가 당신 수표를 한국문제연구소에 준 것은 사실이지요?
A: 네. 그렇지만 내 돈을 준 것은 아닙니다. 최홍태가 내 수표를 가져가면서 1만 불짜리 자기 수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내 구좌에 집어넣었습니다.
Q: 최홍태가 당신 수표를 가져가면서 그것을 강영훈에게 줄것이라고 말했습니까?
A: 네.
Q: 최홍태가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것을 당시에 알았습니까?
A: 아니오. 나는 그가 강영훈 장군 밑에서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중앙정보부 요원이면서 강 장군과도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프레이저 위원장: 우리는 한국문제연구소가 총 13만 불을 돈세탁한 것을 오늘 날짜로 확인했습니다. 증언해 준 강경구 씨와 임기서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제 1장 중앙정보부 주일공사 최세현 증언 "김대중은 조총련과 관계 없다"
홀부르크 "안보가 위태로운데 한국의 인권이 대수인가"
마침내 박정희가 갔다. 총으로 시작해 총으로 끝난 오욕의 생애였다. 그 날 국무성 정례 기자회견 때 있었던 일이다. 첫 질문을 하도록 되어 있던 AP통신의 베리 슈왈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무성 정례 기자회견에서 첫 질문은 미국의 양대 통신사인 AP와 UPI가 교대로 하게 되어 있다. 그는 말했다.
"대변인, 오늘은 나의 특별한 요청을 수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언론인으로서 모든 것을 바쳐 싸워 온, 한국에서 온 우리의 동료 쥬리 문이 오늘의 첫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기자석에서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변인은 베리의 요청을 수락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레지던트 박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으로 사망한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태를 계기로 한국이 민주화되기를 기대합니다. 미국정부는 프레지던트 박정희의 장례식에 대표를 파견할 예정입니까? 만일 파견한다면 누가 가게 됩니까?
대변인이 답했다.
-"프레지던트 박의 장례식에 미국 대표를 파견하도록 결정되었습니다만, 조문 대표가 국무성측 인사일지 의회측 인사일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박정희 장례식 참석자는 번스 국무차관으로 결정되었다.
80년 서울의 봄은 불길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안개정국이라고 했으나 사태는 분명했다. 79년 12월 12일 정승화를 체포한 신군부 일당은 80년 4월 전두환이 중앙정보주장을 겸임하면서 자신들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냈다. 박정희가 키운 젊은 사냥개들이 본격적인 권력 사냥에 나선 것이다.
오히려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은 미국의 태도였다. 나는 정례 기자회견 때마다 국무성 대변인에게 한국의 앞날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캐물었다. 대변인은 한결같이 한국의 민주주의 진전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그것이 미국의 국익과 합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79년 이후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 친미 독재정권들이 잇따라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한국에서 기대하는 것은 과연 어떤 정부일 것인가.
마침내 80년 5월 신군부의 권력 찬탈에 대한 저항으로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광주학살의 참상은 아마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외신기자들이 촬영한 생생한 광주학살 필름을 항쟁이 진압된 지 불과 한 주일 정도 지나서 봤으니까 말이다.. 국내로부터도 학살 상황을 증언하는 수많은 기사들이 비밀리에 전달되어 왔다.
나는 몸을 떨었다. 한국군의 작전권을 주한미군 사령관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의 승인 없이
어떻게 한국군 부대가 광주에 가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는 말인가. 광주학살이야말로 미국이 전두환 일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산 증거였다.
나는 국무성 기자회견 때면 으레 대변인을 물고 늘어졌다.
"미국의 이념이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자국민을 학살하는 독재자라도 지지하는 것이 미국의 이념인가?"
나는 홀부르크(국무성 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에게 따졌다.
"도덕정치와 인권외교를 표방하는 카터 행정부가 어떻게
한국군이 광주학살에 나서는 것을 승인할 수가 있는가?"
홀브르크는 냉담하게 답했다.
"광주 사태를 방치했으면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한국의 인권이
문제냐?"
카터의 이상은 제3세계의 친미정권을 안정시켜야 하는 미국의 국익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후 미국 의회가 전두환의 정권 찬탈을 이유로 4억 5천만 달러의 차관을 연기하려 할 때 카터는 단연 안보가 인권에 앞선다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전두환 체제를 승인하고 정착시킨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도덕주의자 카터였다.
80년 7월 아시안 외무장관 회담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있었다. 미국에서는 머스키 국무장관이 참석했고, 국무성 기자단이 취재차 수행했다. 회담을 마치고 말레이시아를 떠나기 전날 [워싱턴 포스트]의 오버도퍼 기자가 내게 말했다.
-"쥬리, 나는 도쿄를 거쳐 서울로 들어간다."
"왜?"
-"전두환과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어."
나는 정말 오버도퍼가 부러웠다. 전두환을 인터뷰하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서울에 간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 때 서울 언니의 병이 나날이 깊어가고 있었다. 조카들은 매일 미국에 전화해서 성화였다.
"이모, 어머니가 매일 이모만 찾으세요. 박정희도 죽었는데 미국 이모는 왜 안 오나 하고 계세요. 언제쯤 들어오실 수 있으세요?"
난들 마음이 급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은 계속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박정희가 죽고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이 왔다는데도 나는 여전히 '반한인사'였다. 광주항쟁이 일어나면서 연일 광주학살 고발 기사를 [한국신보]에 쓰고 있었으니 비자 발급은 더욱 난망했다.
나는 오버도퍼에게 언니의 일을 얘기했다.
"오버도퍼, 난 정말 당신이 부럽다. 서울 가야 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난데.."
나는 7월 4일 도쿄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후 죽어 가는 언니를 뒤로 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9월 30일 한밤중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의 큰조카였다.
"이모, 엄마가 숨을 거두셨어요."
전화통을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73년 11월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하고
만 1년 만에 포드 방한을 수행에 서울에 들어갔을 때 언니는 숙소인 조선호텔로 찾아왔었다. 우리 자매는 호텔 지하 아케이드로 해서 경향신문사 쪽으로 빠져 나왔다. 근처 다방에 들어갔는데 중정 요원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따라왔다.
나는 언니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고생돼?"
언니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너, 나
알지? 우리 걱정하지 말고 네 소신껏 살아아."
평생을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온 언니였다. 그런 언니가 이 모진 유신체제 아래서 그처럼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놀랍고도 감격스러웠다.
"다른 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그런데 서울에 있는 언니 가족들이 고통당한 걸 생각하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어떤 수난이든 내가 감당할테니 너는 네 소신껏 살아라."
언니는 보퉁이를 하나 내밀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서울에 들어올 때마다 언니는 내게 보퉁이를 하나씩 주었다. 그 속에는 머리와 내장을 떼낸 멸치 한 뭉치와 마른 김 몇 톳이 들어 있곤 했다. 그 때 그것이 언니로부터 받은 마지막 유품이었다.
그런데 한 시간 뒤에 또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셨어요. 이모."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언니가 숨진 지 한 시간 만에 병석에 있던 형부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직 환갑도 되지 않은 언니와 형부가 그처럼 빨리 세상을 떠난 이유는 모두 나에게 있었다. 내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맞서는 가파른 길을 걷는 동안 서울에 있던 언니 부부는 내게 가해질 탄압을 대신 받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겠다는 나에게 한국대사관은 끝내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다가올 전두환 정권의 진면목을 보았다.
언니 부부는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에 묻혔다. 언니가 다니던 절에서 49재를 올린다고 했다. 거기에나마 참석하고 싶었다. 주미대사관의 한 참사관에게 그 얘기를 했다. 그는 사적으로는 친구의 동생이다. 49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누님, 서울 누님 49재가 내일모레죠? 가십시오. 사후처리는 내가 할테니..."
비로소 나는 서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형부를 위해 조니워커를 한 병 샀다. 생전에 형부는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만 보면 조니 워커 한 병 사오라는 게 인사였다. 그러나 나는 형부 생전에 그 좋아하는 조니 워커 한 병 사다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도 좋은 술 많은데 왜 양주를 마셔야 하느냐"고 형부를 닦아세우곤 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조선호텔로 갔다. 외국인들이 많은 호텔 쪽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내 옆방에슨 중앙정보부 요원이 들어와 있었다.
연락을 받은 조카들이 호텔로 몰려와 내 방은 그만 울음바다가 돼 버렸다. 제사를 지낸 후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로 향했다. 표 안 나게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하는 중정 요원이 불쌍해서 그를 불렀다.
"이거 봐요, 고생하지 말고 그냥 같이 다닙시다."
언니 부부의 묘 앞에서 통곡하다 나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중정 요원이 쫓아와서 나를 부축하며 "그만 하세요"하고 위로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언니와 형부의 얘기만 나오면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박정희의 권력욕으로 고통당해야 했던 것일까.
80년 5월 17일 신군부에 연행된 김대중 씨는 군사재판에 회부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재판을 하나마나 그에게 사형이 선고될 것은 삼청동자도 짐작하는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광주학살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권력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 전두환 신군부 일당이 김대중 씨를 속전속결로 처형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외의 양심세력에 호소해 국제여론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래야만 미국정부가 움직일 것이었다.
김대중 씨에게 씌워진 혐의는 반국가단체 수괴로서 내란을 음모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국가 단체란 73년 일본에서 결성된 한민통(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을 가리키는 것이고, 내란 음모란 광주항쟁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한민통은 민단의 개혁파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반유신운동 단체였다. 조총련과는 전혀 관계없었다. 그러나 전두환 일당은 전향한 조총련 관계자를 증인으로 내세워 조총련과 한민통이 밀접한 관계인 것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김대중이 사형을 면하려면 우선 이 부분을 사실대로 밝힐 수 있는 증인이 와 있었다. 바로 김재규의 동서인 최세현이었다. 그는 10.26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였다. 즉 중앙정보부 일본 총책임자였던 것이다. 그는 10.26 이후 전두환 일당의 보복을 피해 미국 뉴욕으로 피신해 왔다.
나는 [아사히 신문] 워싱턴 지국장 다나카 상과 이 문제를 의논했다. 다나카 상은 최세현이 입을 열 경우 1,2,3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하겠다고 했다.
나는 시노트 신부와 함께 최세현을 만나러 뉴욕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만나 주지 않았다.
80년 4월 나는 등소평 중국 부수상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집을 비운 사이 최세현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귀국 후 최세현을 만났다. 그가 나를 찾은 이유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전두환 일당을 피해 급히 미국으로 온 처지이니 그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다. 한국 정부는 그의 외교관 신분을 박탈했고 미국 정부로부터는 추방명령이 떨어졌다. 워싱턴에 있다가 뉴욕으로 간 변호사 존 김에게 그 문제를 상의했는데 존 김이 나에게 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내가 최 공사를 도울테니 당신은 김대중 씨를 도우시오. 최공사의 증언이 있어야 김대중 씨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최세현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국무성의 패트리셔 데리안 인권담당 차관보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선처를 호소했다. 마침내 최세현 일가에 대한 강제 송환 처분이 중지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일본 [아사히]신문 워싱턴 지국장과 함께 최세현을 앉혀 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심리학을 전공한 학자로 고려대 교수로 가려다가 동서인 김재규의 간곡한 청으로 주일 대사관 공사로 나가게 되었다고 했다. 김재규는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고 한다.
"형님, 도쿄에 가셔서 김대중 씨와 조총련의 관계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셔서 사실대로 보고해 주십시오. 우리 요원들을 시켰더니 모두들 한 건 하려는 생각이 앞서서 어떤 보고에서는 김대중 씨가 조총련 돈을 받았다고 하고, 또 어떤 보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니 내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부임 후 김재규의 명령대로 김대중과 조총련, 한민통과 조총련의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한민통은 조총련과 전혀 관계가 없고 김대중도 조총련의 돈을 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세현 인터뷰는 80년 8월 15일을 기해 [아사히]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최세현 인터뷰 기사를 영문으로 써서 [아사히]에 넘겼다. 그리고 일본어 번역판까지 모두 확인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8.15를 기다리고 있는데 8월 10일쯤 뉴욕에서 최세현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문 기자님,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워싱턴으로 가겠습니다."
그가 워싱턴에 나타나 하는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기사를 8월 15일에 내보내는 것을 중지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제가 동생 최재현이 후쿠오카 한국 영사관에 교육감으로 있는게 기사 나간다는 얘기를 했더니 펄펄 뛰고 있습니다."
최재현은 "형님 없어진 것만 가지고도 지금 죽을 판인데 김대중 관계 기사를 터뜨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가족을 다 죽이려 합니까. 우리를 모두 미국으로 데려가든지 아니면 기사 터뜨리는 것을 중단해 주세요."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최공사, 그 얘기를 왜 이제야 합니까. 진작 얘기했으면 무슨 대책을 세웠을 것 아닙니까. 지금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앞이 캄캄했다. 최재현 일가 다섯 명을 어떻게 닷새 만에 미국으로 데려온다는 말인가. 결국 기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김대중의 운명은 어찌되는가.
집에 돌아와서 남편 최동현에게 상황을 얘기했다. 나는 너무나 낙망해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만 포기할래요."
남편 최동현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보, 그러면 김대중은 죽어. 당신이 가서 그들을 데려오시오."
"뭐라고요? 내가 무슨 수로 전두환 일당들을 피해 그 사람들
다섯명을 미국까지 데려옵니까? 할 수 있으면 당신이 가 보세요."
최동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보 나는 못 하지만 당신은 할 수 있어. 이건 김대중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길이오. 포기하지
마시오."
순전히 남편의 부추김 때문에 나는 그 무모한 일에 나섰다. 남편의 말대로 마지막으로 한 번 용기를 낸 것이었다. 우선 국무성 대변인 하딩 카터의 알렉산드리아 집으로 찾아갔다. 국무성 인권담당 차관보 패트리셔 데리안은 그의 아내다. 나는 두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최재현 일가를 미국에 데려와야만 김대중이 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들은 공감을 표하고 협조해 주겠다고 했다. 패트리셔 데리안에게 물었다.
"패트리셔, 내가 이 다섯 명의 미국 비자를 어디서 어떻게 받을 수 있겠니? 너는 할 수 있잖아. 영사과의 누구를 찾아가야 하니?"
패트리셔가 말했다.
-"쥬리, 용기를 내. 너는 잘 할 수 있을거야. 우선 그들을 런던으로 오게 해. 그리고 런던의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비자과장을 찾아가도록 해."
나는 바로 일본에 있는 한민통 배동호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들 런던으로 보내세요. 입은 그대로 몸만 빠져 나오라고 하세요. 짐은 절대 안 됩니다."
짐을 챙겨들고 출발할 경우 중앙정보부가 눈치 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런던으로 날아갔다. 가서 보니 런던에는 공항이 두 군데 있었다. 도쿄에서 오는 비행기가 착륙하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입국장에서 최재현 일가를 기다리는데 동양사람들만 보면 전두환의 보안사 요원들인가 해서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최세현과 인상이 비슷한 최재현이 나타났는데 이들 다섯명의 가족은 이민보따리처럼 산더미 같은 짐을 카트에 실은 채였다. 아들은 손에 소니 카세트까지 들고 있었다. 기가 막혔지만 뭐라 하기도 힘들었다. 이들을 재촉해서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 가까운 호텔에 들어갔다.
호텔방에서 의자란 의자는 모두 문 앞에 쌓아 놓았다. 바람에 문이 덜컹거리기만 해도 누가 들이닥치는가 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상대는 이미 손에 피를 묻힌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한밤중에 우리를 기습해 온다 한들 낯선 런던 땅에서 대체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가. 뜬눈으로 밤을 세우다시피하고 다음날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비자과에 가니 온갖 인종이 창구에 줄을 서 있는데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비자과장을 찾았으나 자리에 없었다. 이러다가 눈에 띄겠다 싶어 다섯명을 끌고 나와 캐나다 대사관으로 갔다. 캐나다를 경유해 미국 비자를 받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 대사관에는 어두컴컴한 실내에 다섯 사람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관용비자 창구로 가서 최재현의 외교관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받아든 영사는 창구문을 닫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게 아니가. 한국 대사관에 확인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창구문을 마구 두드렸다.
"급한 일이 생겨서 일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비자 신청서를 도로 주시겠습니까?"
허둥지둥 캐나다 대사관을 나와 다시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잡히더라도 미국 대사관에서 잡히자는 심정이었다. 최재현과 나는 거기서 부부로 둔갑했다. 남편의 성도 최씨였으므로 나의 여권은 미시즈 최로 되어 있었다. 창구에 줄 서있는데 정말 기적적으로 아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훗카이도오 미국 영사관에서 부영사로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지옥에서 부처님이라도 만난 듯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했다.
"곤니찌와?"
-"아니 쥬리 아니요.. 반갑소."
"우리 가족이 지금 팬암으로 워싱턴에 가야 하는데 두 시간 반밖에 안 남았습니다. 비자 30분 안에 해줄 수 없어요?"
-"노
프로블럼(문제없다)"
이리하여 최재현 일가의 미국행 비자를 속성으로 겨우 손에 넣었다. 호텔에 들러 짐을 싣고 팬암이 뜨는 히드로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터졌다. 최재현 일가는 런던까지의 비행기표만 끊어 가지고 왔던 것이다.
"아니. 워싱턴까지 끊지 왜 런던까지만 끊었어요?"
-"한민통 사람이 런던까지만 가면 문여사님이 알아서 준비할 것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다섯 사람의 워싱턴행 비행기표를 끊으려면 3천 5백 불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의 신용카드로 3천5백 불이나 결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재현 일가에게도 그만한 현금이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 때 팬암 항공 카운터에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밥이었다. 워싱턴에 근무했는데 런던으로 전근 와 있었던 것이다.
"헤이 밥!"
-"헤이 쥬리"
나는 그에게 사정했다. 그는 오버차지인데도 내 신용카드로 다섯 사람의 비행기표를 끊어 주었다. 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비행기 표가 없어 런던 공항에 주저앉아야 했을 것이다.
팬암 탑승장에서 나는 교토통신 런던지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여행중인데 일본 신문에 한국관계 기사 뭐 나온 것 있어요?"
-"문 상. 지난번에 김재규의 동서 최세현이가 없어졌는데 이번에는 그의 동생 최재현이가 없어졌다고 야난이 났습니다. 그런데
[산케이신문]에는 문상 이름이 나왔는걸요?"
"그놈들이 뭐라고 썼는데요?"
-"최재현 일가가 없어졌는데 쥬리 문도 워싱턴 사무실에 없다. 뭔가 관련이 있는가 의심스럽다. 뭐 이런게 나왔어요."
가슴이 철렁했다. [산케이]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본의 극우신문이다. 미운 놈들이기는 하지만 점은 잘 쳤구나 싶었다.
탑승시간이 됐다. 스튜어디스가 놀라서 타올을 들고 뛰어왔다. 워싱턴에 도착한 후 최재현 일가를 모텔에 숙박시키고 사무실에 나갔더니 [아사히] 지국에서 한 시간마다 연락이 와서 야단이 나 있었다. 최세현 인터뷰 기사가 나갈 날이 바로 내일인데 나에게 도대체 연락이 되질 않으니 아사히는 아사히대로 발을 굴렀던 것이다. 나는 지국장에게 말했다.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벌어져서 미국 국내여행 하느라 그랬다. 기사는 예정대로 나가도 된다.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최재현 일가 구출 소동으로 기사는 예정보다 이틀 늦게 공개되었다.
80년 8월 17일 [아사히]신문은 전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 최세현 인터뷰 기사를 일면 톱으로 실었다. 제목은 '전 한국중앙정보부 일본 책임자 최세현 공사 증언, 김대중 조총련 돈 받은 적 없다' 였다.
[아사히] 80년 8월 17일 "김대중, 조총련 돈 안 받았다"
이 기사로 군사재판에서 김대중을 '반국가단체 수괴'로 몰아가려던 전두환 일당의 음모는 명분을 잃었다. 더군다나 한일 양국은 73년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정치결탁을 통해 해결하면서 납치사건 이전의 김대중의 일본 행적을 문제 삼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것을 문제 삼기 시작하면 김대중 납치사건을 묻어 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일당은 김대중을 사형시키기 위해 박정권과 일본 정부 간의 검은 약속까지 깨면서 73년 결성된 한민통을 조총련의 자금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로 몰고 갔다. 더구나 일본의 최대 신문 중 하나인 [아사히]가 최세현의 증언을 대서특필하자 일본 여론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은 다시 여론의 초점이 되었다. 일본 정부로서는 전두환 일당에게 항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80년 9월 17일 군법회의는 마침내 김대중 씨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일본에서는 김대중 피고 구출을 주장하는 시위와 집회, 기도회, 시가 촛불 행진이 있었고 일본 총평은 한국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스즈키 수상은 이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면서, "김 씨를 사형하면 한국에 대한 일본 국회 정세나 매스컴의 논조등이 거세지게 되고 그런 분위기에서는 한국에 협력할 수 없게 된다"라며 선처를 강력히 요구했다.
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김대중 씨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날 국무회의에서 그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김대중이 드디어 살아난 것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수많은 이들이 벌인 헌신적인 구명 투쟁의 성과라 할 것이다.
최재현 일가는 그 후 미국에 정착했다. 나는 보증인이 되어 사회 보장카드를 받게 하고 일자리를 주선하는 등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그러나 세상이란 넓고도 좁은 것인가. 최세현의 딸이 이순자의 삼촌인 이규광의 아들과 결혼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10.26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귀고 있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결혼에 대해 무어라 말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최 씨 일가가 전두환과 사돈이 된 셈이니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그들 일가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 후로는 알지 못한다.
한국의 80년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해였다. 한 가지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80년 봄 뉴저지에 사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여동생 김재회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물론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당시 김재규는 군법회의에서 속전속결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김재회는 애원했다.
-"문 기자님, 한 번 만나 뵌 적도 없는데 초면에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우리 오빠 일이 너무나 급박해 염치불구하고
전화 드렸습니다."
"나는 중앙정보부라면 넌덜머리가 나는 사람입니다. 당신 오빠 얘기는 하지도 마시오."
-"문 기자님, 제발 우리 오빠 좀 살려 주세요. 오빠는 신념이 있는 사람입니다. 김대중 씨가 진주감옥에서 단식투쟁으로 다 죽어 갈때 그분을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긴 것도 우리 오빠가 한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김재규는 독실한 불교신자에다 효자였다고 한다. 김대중 씨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긴 날, 김재규는 퇴근해서 자기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무이, 나 오늘 좋은 일 했습니다. 김대중 씨를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역시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야야. 니 참 좋은일 했다. 참 잘했다." 하면서 아들을 칭찬했다는 것이다. 김재회는 계속 나에게 매달렸다.
-"문 기자님, 전두환이가 곧 사형을 집행할 것 같아요. 우리 오빠 살릴 수 있는 건 미국밖에 없지 않습니까. 제발 좀 도와 주세요."
사실이 그랬다.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를 빨리 죽이기 위해 속전속결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의 압력이 없다면 김재규는 살아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미국 측은 김재규를 구명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거사를 결심한 것은 자신의 미국 정보기관 파트너가 어떤 형식으로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실컷 좋게 지내다가도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입 싹 씻고 쳐다보지도 않는 인종들이다. 나는 김재회의 간곡한 부탁에 설득되어 다음날 미 국무성 측에 김재규 문제에 대해 문의했다. 김재규가 죽기 전 지하벙커에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미국놈에게 속았다"라고 했다는 설은 아마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82년 12월 23일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김대중 씨가 도착했다. 전두환 정권은 80년 5.17 이후 줄곧 감옥살이를 하던 그를 신병치료라는 명목 하에 미국으로 내보냈다. 가장 큰 이유는 김대중 씨 신변에 대한 미국과의 합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항에서 김대중 씨는 1백여 명의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나의 구명을 위해 애쓴 세게 각국의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레이건 대통령,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감사한다. 하나님이 도왔다"라고 입국 일성을 밝혔다. 그러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당시의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성명을 발표한 후 일문일답으로 넘어가자 김대중 씨의 측근들이 텔레비젼 기자들에게 "마이크를 꺼 달라"고 해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소리가 안나오는 화면으로 어떻게 텔레비젼 뉴스를 방영한단 말인가. 텔레비젼 기자들은 화가 나서 "갓뎀" 하면서 마이크를 껐다. 한 미국기자가 나에게 말했다.
-"헤이 쥬리, DJ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레이건이 자기를 살려 주었다고 하지 않는가."
김대중 씨가 입국 기자회견에서 이처럼 신중을 기한 것은 "신병 치료에만 전념하고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미국에 왔기 때문인 듯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신중함이 마땅찮았다. 전두환 정권에게 쓴 각서란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 아닌가.
김대중 씨의 미국행을 전후해서 교포사회에서는 김대중 씨가 전두환 정권에 협조하기로 타협하고 그 대가로 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온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이는 물론 김대중 씨와 미주 민주화운동 세력을 이간하려는 안기부의 공작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귀국 일성에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말 한마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은 루머는 신빙성을 더해 갈 뿐이었다.
나는 분이(화)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서울 - 워싱턴 - 도쿄를 동시에 연결하는 일본 텔레비젼 방송에 출연했다. 앵커가 멘트를 시작했다.
-"이제 워싱턴의 쥬리 문 기자를 연결합니다. 쥬리 문 기자. 어제 김대중 씨가 워싱턴에 도착했지요?"
"네. 서울에서 노스트웨스트 편으로 시애틀을 경유해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3천여 명의 교포들이 나와 김대중 씨를 환영했다던데요?"
"김대중 씨를 환영 나온 인파는 약 3백명 정도였습니다.
노스웨스트는 한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비행기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환영.환송객들이었을 겁니다."
-"김대중 씨의 입국 제 일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구명을 위해 애써 준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감사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광주에서 희생된 시민들을 애도하는 발언은 전혀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를 환영 나온 많은 교포들이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동안 김대중 씨는 역대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을 한 몸에 받으면서 한국민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비쳐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의 모습은 국민들의 바람과는 좀 동떨어진 것 같습니다."
-"아하 그렇습니까?"
레이건 부부는 그 해 크리스마스를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의 온천지대에서 보냈다. 나는 백악관 출입기자들과 함께 레이건을 수행해서 팜 스프링에 다녀왔다. 그 사이 김대중 씨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그 때 김대중 씨 일가는 워싱턴 근교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83년 1월 초 알렉산드리아의 한 아파트를 월세로 얻어 이사했다.)
수도원에 갔더니 김대중 씨는 일본 텔레비젼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회견을 마치고 김대중 씨와 마주 앉았다.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어째서 김 의원의 워싱턴 도착 성명에 전두환 정권의 '전'자도 안나왔습니까? 다음 날 텔레비젼 방송에 나가서 그 얘기
했습니다."
-"저도 동경에서 전화가 와서 들었습니다."
동경에 있는 김대중 씨의 고교 동창생 김동춘 씨로부터 "문 여사가 텔레비젼에 나와 김 의원을 왕창 갈겨 놓았다"고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여기 교포들은 날이면 날마다 백악관 앞에 가서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고 데모를 하는 판인데 김 의원의 도착 성명에 광주의 '광'자도 없으니 얼마나 실망이 컸겠어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 선생. 나도 생각이 있어서 한 일입니다."
"무슨 생각이요?"
-"적은 절대로 정면에서 치는 법이 아닙니다. 특히나 강력한 적은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이 말이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말했다.
"물론 그럴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할지라도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한 번 원칙을 무너뜨리면 변질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언론인에게는 그런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치인입니다. 나는 강력한 적 앞에서 일단 후퇴하는 것을 비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목표를 결코 잊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정치인에게도 원칙은 필요합니다. 미국 국회의원들을 보십시오. 극우파인지 중도파인지 리버럴인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가 어떤 정치철학과 노선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사람인지 국민들이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처신합니다. 한국 상황에서는 뭐가 뭔지 모르도록 애매모호하게 처신하면 끈질기게 살아남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정치인이 아니라 정상배에 불과합니다."
-"문 선생이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압니다.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김대중 씨는 그의 말대로 그 후 수많은 적들을 정면에서 치지 않고 일단 후퇴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최초의 목표를 결코 잊지 않고 힘을 모으고 축적해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루어 내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DJP 지역연합이 정권교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원칙에서 벗어난 수단으로 정의로운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비록 집권과정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왕 집권한 이상 민족사에 남을 만한 성과를 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권 중반기로 접어들고 있는 현재까지 김대중 정부는 이 같은 기대를 충족시켜 주고 있지 못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특유의 신중함을 십분 발휘하면서 기득권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개혁과 통일이라는 과제를 조심스럽게 추진해 나가고 있다.
심지어 그는 지난 99년 5월 박정희와의 역사적인 화해를 선언하고 박정희기념사업회 명예회장직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박정희기념사업회 명예회장 김대중이 과연 민족사가 요구하는 과제를 수행해 낼 수 있을까. 그가 끌어안은 세력이야말로 그가 가고자 하는 길에 가장 철저히 저항하는 역사적 뿌리를 가진 집단인데 말이다.
나는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몇 차례 그와 만난 일이 있다. 나의 이런 의문에 대해 그는 한결같이 "지켜봐 달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력한 자신감을 표명했다.
지난 시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모든 사람들은 그를 지켜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싸운 것은 자연인 김대중의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워싱턴의 전화선으로는 무려 99가지 언어가 구사된다고 한다. 이처럼 복잡한 나라인 미국 워싱턴에서 코리아의 민주화를 외칠 때 우리가 '김대중'이란 이름을 앞세웠던 것은 그 이름 석자가 바로 한국민주주의의 수난을 상징하는 기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의 자리 또한 그의 것만은 아니다.
지난 50년 동안 군사독재정권과 싸워 온 학생, 노동자, 농민, 넥타이부대, 지식인들에게 그는 개혁과 통일이라는 빚을 지고 있다. 나는 그가 그 빚을 어떻게 갚는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대한민국이 바로 서는 그날까지 ... 로
답글삭제퍼갑니다~~(__)
먼저 승락을 받아야 하는 게 우선이지만
제가 시간을 날마다 낼 수 없어 승락을 기다리기가....sjfkd3333@gmail.com 으로 연락 주시면 삭제 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구글 블러그를 쓰지 않는 이유는
답글삭제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 까다롭고 의견 제시가 어렵다는 단점과 요청(신고)으로 인한
블러그 글 삭제를 감수하며 daum 계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첨엔 구글로 만들면 전혀 삭제당할 일이 없이 안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인터넷에 약한 사람들이(특히 나이 먹고 용공세력에 세뇌된 사람들)이 이용하기엔
넘 많은 장벽(^^*)이 있어서...
그럼
아무쪼록 수고 하세요~~
감사합니다.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답글삭제꼭 보고싶던 책이었는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구해볼려고 해도 절판이고, 헌책방에 문의를 해도 구할수가 없었는데...
올리기도 힘드셨을것 같은데...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소중한 자료 올려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백방으로 소문을 해도 구하기 힘든 책이었는데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답글삭제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여러 곳으로 공유를 하고 싶으나 이 좋은 자료가 혹시나 삭제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용히 감사하다는 마음만 전하고 갑니다.
답글삭제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귀한 자료 무지한 이나라 국민들 의식을 깨는데 도움이 됐음 좋겠네요 감사 합니다
답글삭제잘 읽어보겠습니다
답글삭제귀중한 자료 공으로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보세요! 현대사에 지식이 없다는걸 이제 깨닫게 됬네요!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생생한 역사! 정말 대한민국 시민으로 꼭 한번 봐야합니다! 지금 최순실 국정농단이 왜 어떻게 시작됬는지... 조금 이해가 되는군요!
답글삭제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
답글삭제안녕하세요. SBS 시사교양본부 정예슬 작가라고 합니다. 최동현 선생님에 대해 여쭤볼 일이 있는데 02)2113-5500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힘드시다면 seuly0121@naver.com 로 메일 부탁드립니다. 꼭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안녕하세요.
답글삭제저는 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아버지의 소개로 이 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검색후에 이 사이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 내용을 담아가서 책의 형식으로 소장용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책의 형식으로 제작하되 영리적인 목적이나 재판매할 의도는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더 편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작성자님께 연락이 닿을 방도가 없어 이렇게 댓글로 남겨봅니다.
문명자님의 책이 절판된지 오래라 중고서적을 알아보던중 250,000원이라 망연자실 했는데, 이블로그에 들어와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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